열려있음에서 배우다- 에릭사티
우리는 오랫동안 창조적인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서 창조성을 엿보았다.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삶을 창조적 관점으로 보고, 그들의 선택과 태도 그리고 현상들에 이름을 붙이며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동안 창조적 인간을 따라가며 누군가는 이름으로, 누군가는 태도로, 또 누군가는 작업의 방식으로 그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과정과 창작 사이에서 다양한 생각이 오고 갔다. 어떤 예술가는 자신의 작업 속에서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다른 예술가는 자신과는 다른 어떤 행위를 통해 자기의 다른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그 기록들을 보며 우리 안의 창조적 자아와 실제적 자아가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리고 사실 창조의 언어는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인생에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언어 이전의 경험을 설명해야 할 때를 만난다.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내 안의 무수한 것들이 어떤 형태인지 알아봐야 할 때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순간들은 말로 다듬을수록 오히려 더 멀어져 버림을 알게 된다.
에릭사티의 음악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의 음악은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예술가'라고 불렀다. 당대의 기준으로는 불친절했으며 자신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도 않았다. 집중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며 감정을 느끼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청자는 자신의 속도로 음악과 함께 있다. 사티는 음악에 의미를 덧붙이지 않으며 듣는 사람을 신뢰하는 태도로 의미가 생겨날 자리를 남겨두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음악을 설명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닿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가구음악'이라고 불렀다. 음악이 반드시 중심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은 클라이맥스나 웅장한 전개도 없고 마치 우리 삶의 배경처럼 스민다. 사티에게 음악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창조적인 인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새로움, 영향력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나 사티는 그 모든 단어들로부터 조용히 물러난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들린다.
에릭 사티를 떠올리며 나는 창작을 바라보는 또 다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창작의 어떤 순간들은 잡아내려 할수록 잡히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창조적 인간'들을 만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다시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기를 택한다. 이제는 설명보다 그저 느끼고 남겨두는 방식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음을 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을 넘어 혼란을 통해 질서를 찾는 과정을 그저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릭사티의 설명없는 음악과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