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일기
익숙함을 떨쳐낸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게 익숙하다는 건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는 의미이고 애정을 쏟고 정이 들었다는 의미이므로. 정든 학교, 정든 친구, 정든 동네, 정든 집. 익숙하다 못해 애정이 깃든 것들과 이별한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이번에 나는 정든 집과 이별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사는 수없이 했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힘이 들었다. 특히 마음에 힘이 들어 아팠다.
이 집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으니 과장도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이 집을 떠나는 것이 익숙하고 안정된 공간을 포기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왜 이사를 결심했냐면, 아파트로 재건축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260여 가구 가운데 재건축을 반대하는 몇 안 되는 이십여 가구 중 하나였다. 재건축을 막기 위해 몇 년을 시끄럽게 싸웠나 보다. 하지만 세상의 논리가 그렇듯 약자는 힘이 없었고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찬성하는 다수의 힘에 밀려 우리의 목소리는 사업을 방해하는 집단의 잡소리로 치부되었고 조합을 비롯해 구청은 재건축 사업을 추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공간, 그것도 적합하게 소유한 곳에서 거주하고자 함은 존중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정한 거주이전의 자유보다 하위법이 힘이 더 세다. 정의보다 돈이 우선하는 나라니까. 우린 조합으로부터 매도청구소송을 당하고 법원에서 정해주는 적당한 가격에 따라 조합에 집을 팔고 나가야 하는 시점까지 이르렀다. 더 이상 언젠가 헐릴 집에 마음 편히 들어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시기까지 온 것이었다. 식탁에 앉아도 잠자리에 누워도 마음이 불안했다.
어느 순간, 헐값으로 조합에 파느니 매수를 원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그나마 현명한 처사라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집을 매도하기 위해 부동산에 내놓았다. 재건축이 진행되는 지역이라 시세만큼 집값을 받을 수 없다고 예상되었지만 더 손해를 볼 수도 없었다. 다행히 집은 매매가 되었고 우리는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잔금을 받고 우리 집의 매매 계약은 마무리가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방배동 집에 들러 마무리를 하고 부동산으로 향하셨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중개업자로부터 모든 계약이 끝나고 부모님께서 자리는 떠나셨다며 연락이 왔다. 그 자리에서 엄마는 결국 눈물을 쏟고 마셨다고 한다. 엄마는 줄곧 이 집을 파는 것을 억울해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매도 결정을 받아들이셨지만 그래도 화는 남아있었다. 하필 그 원한이 부동산 중개인에게 향해서 버럭 화를 내는 일이 종종 있었고, 중간에서 소개한 내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중개업자야 우리가 요구한 금액에 집을 팔아준 죄밖에 없는데 엄마의 분풀이에 억울한 사람만 늘어버렸다. 재건축을 추진하는 조합에 화를 낸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그것은 하지도 못하시면서 지금 역정을 내는 꼴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이다. 당신의 감정을 다스리시라고 그렇게 주문했건만... 그래도 울면서 계약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났을 순간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 심정이 십분 이해되었으니까. 20년 세월이 어디 한순간에 잊은 듯 사라질까. 그 억울한 마음이 무엇으로 해소가 될 수가 있을까.
http://news.mt.co.kr/mtview.php?no=2017102116075134287&outlink=1&ref=http%3A%2F%2Fsearch.naver.com
그 와중에 이 뉴스를 보니 고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이 씁쓸했다. 71세의 조합 이사는 그동안 죄를 뉘우치지도 않았다고 한다. 징역형은 주머니에 굴러들어 온 돈에만 혹해서 그 돈을 대가로 희생되는 사람들의 눈물은 나몰라 한 결과다. 겨우 이 정도 능력과 도덕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조합의 임원을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사람들이 운영하는 집단의 힘에 눌려 정든 터전을 떠나야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허탈하고 서글펐다. 바위에 부딪친 달걀처럼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 모습이.
다행히 우리 가족은 상처는 받았지만 약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고 힘차게 새 출발에 시동을 걸고 있다. 다시는 다치지 않을 곳을 찾아서. 다행히 부모님은 바닷가 근처의 땅을 찾아 집을 지으셨고 우리 부부는 조금 더 고생하여 터를 잡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이사하게 된 왕산리. 이 곳은 우리를 예상치 못하게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왕산리의 10월은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시기다. 이렇게 선명하면서도 울긋불긋한 단풍은 서울에서 잘 못 보았다. 은행나무는 어찌나 샛노란지! 눈으로 즐기다 보니 사진 찍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잊는다는 건 좋은 거다. 아름다움에 취한 사이 이사의 아픔도 잊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이사를 한지 보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하고 매일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뜨고, 창문 밖으로 매일같이 색을 갈아입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이것 또한 행복이구나.'하는 소소한 기쁨에 젖어들고 있다.
익숙한 집을 떠나는 건 고통스러웠지만, 늘 그렇듯이 아픔을 간직하고 산다는 건 성숙하게 익어간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가 이렇게 성장해가면 그것으로 되었다. 우리 가족이 더 단단해지고 어디에서 살아도 행복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땅에는,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정든 집을 떠나야 하는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생겨났었고, 앞으로도 생겨날 테지만 말해주고 싶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닐지 모름다고. 어쩌면 더 큰 행복이 무엇인지 갈구하고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행복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