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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트랑제 Apr 22. 2020

카뮈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내가 기억하는 휴머니스트

사진을 좋아한 적이 있다.


이때 나는 '결정적 순간 l'instant décisif'과 '캔디드 포토 Candid Photo'라는 단어에 특히 이끌렸고, 이를 실천하고자 손에 항상 사진기를 들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건 꽤 고행이었다.


어느 날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가면서 사진을 찍다가 넘어진 적이 있는데, 일어서서 보니 약간 망가진 사진기를 발견했다. 그리고나서야 내 손을 살폈는데, 꽤나 많이 다쳐있었다. 사진기를 보호하고자 내 손등을 바닥에 먼저 짚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좋아했던 사진가들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Henri Cartier-Bresson과 로베르 드와노 Robert Doisneau 였는데, 언제나 두 사람의 사진들은 내 가슴을 뛰게 했다. 한 번은 드와노의 고향인 파리 남부 '장티이 Gentilly'에 가서 그 사진들의 배경을 찾아본 적이 있었지만, 나는 날이 저물도록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소득이라고는 장티이의 분위기만 알게 됐다는 것. 그 동네는 아름답지 않았는데, 파리가 고속으로 개발되면서 유입된 도시 노동자들의 터전들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Cyclo-cross à Gentilly, Robert Doisneau

하지만 드와노의 '시청 앞의 키스'가 연출된 사진이라는 말에 나는 더 이상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됐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만 편애했다. 특히 다음 사진에.

Hyères, Henri Cartier-Bresson

이 사진은 내 방 벽면에 오랫동안 붙어있었는데, 왜 이 사진에 그토록 이끌렸는지 지금까지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겠다. 유선형의 구도와 오묘한 흑백의 대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욕망을 자전거를 타는 남자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 찍기에 골몰하던 나는 어느 순간 사진기를 내려놓았다. 사진을 찍다 보니 되려 내가 보는 실체와 그 순간에 함께 있던 사람들, 그리고 경험들에 멀어지는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선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들었으나, 그림 그리기도 얼마 있다 그만뒀다.


올해 초 책 <알베르 카뮈와 알제리>를 마무리하던 중의 일이다. 편집자분께서 곧 출간될 책의 초안을 보내줘서 그 초안을 이리저리 훑어보는데 그 안에서 카르티에-브레송을 마주했다. 아, 얼마만인가. 그가 찍었기에 너무도 유명해진 카뮈의 사진들을 다시 한 번 곰곰히 살펴봤다.


카르티에-브레송을 좋아하는 건 단지 그가 사진을 잘 찍기 때문만도, 고집스런 사진에 대한 그의 철학 때문만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진들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ndalucia. Seville, Henri Cartier-Bresson
Romania, Henri Cartier-Bresson

카뮈 역시 그렇다.


카뮈를 소설 <이방인>의 작가 혹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만 기억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휴머니스트이다.


Albert Camus, Henri Cartier-Bresson


땅을 돌려주시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너무 가난해 뭔가를 원하거나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에게 모든 땅을 주시오. 이 나라에서 이 여자처럼 대부분 아랍인이고 얼마 동안은 프랑스인인, 고집과 인내만으로 여기서 살아가는 엄청난 수의 비참한 무리에게 땅을 주시오. 신성한 것은 신성한 사람들에게 주듯이. 그렇게만 되면 나는 다시 가난해지고 세상 끝 최악의 유적에 던져져 미소 짓고 내가 태어난 태양 아래에서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땅과 추앙했던 사람들이 드디어 한곳에 모였음을 알고 만족하며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_ 알베르 카뮈, <최초의 인간>,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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