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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Jul 12. 2022

신에서 인간으로

조토_십자형 채색패널_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_1295년경

조토의 <십자형 채색패널>은 현재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의 중앙 제대 위에 걸려있다. 이 성당은 13세기 초에 도미니카수도회 수도사들이 지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오모 대성당(1296-1436)을 짓기 전까지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성당이었다.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화장품 장미수를 사러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성담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조토는(1267-1337) 당대 최고의 화가 치마부에게서 미술을 배웠는데, 생기있는 묘사로 사람을 표현하였으며 투시법에 따른 공간 묘사도 성공하였다고 한다.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의 <십자형 채색패널>은 이전의 패널들과 달리 조토만의 생기있는 묘사를 엿볼 수 있다.                                                    

우리집 이콘

우리집 이콘


  12세기 초에 제작된 사르자나 대성당의 <십자형 채색패널>은 신으로서‘예수’를 묘사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얼굴엔 미소가 있고, 몸은 정확히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찾아볼 수가 없고 여유마저 느껴진다. 12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에게서 고통을 함께 겪는다는‘공감’의 위로보다는 전지전능한 신이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랬던 <십자형 채색패널>은 13세기 초반에 다시 한번 변화한다. 볼로냐 산 도메니코 성당의 <십자형 채색패널>을 보면 이제 예수의 얼굴은 시무룩한 모습으로 바뀌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근육 또한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의 완전한 근육을 묘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13세기 후반 조토가 <십자형 채색패널>에는 참사람인 ‘예수’를 그렸다. 14세기 르네상스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배웠다면, 그 시작에 조토를 놓아야 마땅하다.

조토의 <십자형 채색패널>을 좀 더 깊이 보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몸은 축 늘어져 있고, 얼굴은 고통의 끝에 사색이 되었으며, 옆구리와 손바닥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날 구원할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예수를 보며 그 죽음을 다시 생각하고 위로를 받는다. 신은 인간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다만 신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그 힘을 주는 것이 아닐까. 예수는 그 고통을 몸소 겪었기에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어보는 것이다.

우리 집 벽에는 성모자 이콘이 걸려있다. 아주 오래전 수도원에 갔을 때 샀는데, 거기에는 오른쪽 뺨에 가시에 긁힌 자국이 남아있는 우울한 표정의 흑인 성모와 성경책을 한 손에 들고 인간을 축복하는 흑인 예수가 그려져 있다. 나를 지켜주고 축복하는 성모자이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도와주고 지켜줘야 할 존재로 보인다. 그런데 묵상하다 보면 어느새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내 마음에는 평화와 위로가 가득하다. 전혀 성모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에 위로받는다.

조토의 <십자형 채색패널>속 예수의 모습에 내 모습을 넣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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