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텔로_청동 다비드상_1430~1432_158cm_바르젤로 국립미술관
몇 해 전 피렌체에 갔을 때 옴팡지게 감기에 걸려 여행 내내 끙끙 앓았던 적이 있다. 겨울 방학식을 마친 다음 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는데, 학기 말 피로가 가시지 않은 체 로마에서 일주일 내내 비를 맞고 걸어서였는지 피렌체에 도착하던 날 쓰러지고 말았다. 하필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피렌체에서 쓰러지다니. 아쉬움이 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39도까지 오르는 열을 해열제와 전기방석으로 간신히 버텼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마지막 날 아침 컨디션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는 거다.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었고 불쌍한(?) 남편을 따라나선 아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바르젤로 국립미술관을 답사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 최고의 작품이 바로 도나텔로의 ‘다비드’였다.
도나텔로(1386년경 ~ 1466년 12월 13일)는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을 완성한 브루넬레스키(1377년~1446년 4월 15일)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함께 공방을 운영하며 라이벌이자 조력자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도나텔로의 대표작으로는 산타크로체성당의 ‘예수상’, 두오모 박물관의 ‘하박국 선지자’와 ‘막달라 마리아’그리고 오늘 소개하려는‘다비드’를 꼽을 수 있다.
사울은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힌 다음, 머리에는 놋투구를 씌워주고 몸에는 갑옷을 입혔다. 그리고 자기 칼을 다윗의 군복에 채워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것을 입어본 일이 없었으므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이런 것은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그것을 모두 벗어버렸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집어 들고 개울가에서 자갈 다섯 개를 골라 목동 주머니에 넣은 다음 돌팔매 끈을 가지고 그 불레셋 장수 쪽으로 걸어갔다. - 중략 -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팔매질을 하여 그 불레셋 장수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리하여 다윗은 칼도 없이 팔매돌 하나로 불레셋 장수를 누르고 쳐죽였다. 다윗은 달려가서 그 불레셋 장수를 밟고 서서 그의 칼집에서 칼을 빼어 목을 잘랐다. 불레셋 군은 저희 장수가 죽는 것을 보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공동번역 사무엘상 17:38-39, 49-51)
우리가 잘 아는 다비드와 골리앗 이야기다.
‘다비드’하면 아카데미아미술관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대체로 떠올릴 텐데, 그보다 앞서 만들어진 도나텔로의 ‘다비드’ 또한 뛰어난 작품으로 비교해서 보면 좋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청년의 모습으로 위엄있게 표현했다. ‘다비드’는 처음엔 두오모성당 꼭대기(10여 미터)에 장식하려 했기 때문에 원근법을 고려하여 아주 큰 손과 큰머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왼손 손가락으론 돌팔매 줄을 부드럽게 잡아 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오른손 안쪽으론 작은 자갈돌을 감싸 쥐고 있다. 인체 근육에 대한 해부학적 표현력과 몸을 반쯤 틀은 체 두 눈을 부릅뜨고 강렬하게 정면을 바보는 시선이 인상적이다.(정면과 측면 모두에 중심을 두고 있다.) 콘트라포스토 자세와 위치가 다른 두 어깨에서 역동적 힘이 느껴질 뿐 아니라, 손등과 팔뚝 힘줄에서 청년의 강인함이 풍긴다. ‘다비드’라고 이름 지어지긴 했지만 발가벗은 남성의 모습은 신화 속 인물 같다. 대부분의 ‘다비드’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목을 벤 후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싸움 전의 모습을 표현했다.
반면 도나텔로의 ‘다비드’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볼 빨간 잘생긴’ 어린아이다. 그래서인지 강인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여성스러운 면이 강조되어 미소년이라 불러야 되지 않을까 싶다. 다비드는 머리엔 투구(모자로 보이기도 한다.)를 쓰고 발엔 부츠를 신은 것만 빼면 누드로 제작되었다. 투구 아래의 머리는 보면 살짝 긴 머리에 말려져 있는 모양새가 왠지 여자 같고, 얼굴 또한 입술을 살짝 다물고 무표정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부츠로는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데 두 무릎이 살짝 모아 강인함보단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게다가 오른발 부츠 뒤쪽으로는 골리앗의 투구에서 뻗쳐나온 날개가 탱탱한 엉덩이 아래 허벅지가 타고 올라와 관능미를 느끼게 한다. 도나텔로가 동성애자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무래도‘다비드’에 대한 이러한 표현이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도나텔로의 ‘다비드’는 미켈란젤로보다 70년 정도 빨리 제작되었음에도 어린아이의 매끈한 몸과 투구와 부츠 그리고 골리앗의 머리 부분의 섬세함은 미켈란젤로에게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와 모두 성서 속의 다비드와의 차이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돌팔매질 할 준비는 되어있으나 청년 다비드로 신화 속 인물로 만들었고, 도나텔로는 골리앗을 목을 벤 어린 다비드이지만 부드러움을 강조한 나머지 에로틱하게 만들었다.
같은 소재이지만 예술가에 따라 개인의 문화적 취향을 반영하여 작품을 제작하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느낌이 들도록 했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르네상스 최초의 누드 조각인 도나텔로의 ‘다비드’를 보았을 때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에선 피렌체의 영원함을 떠올리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