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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Oct 17. 2020

슬리퍼 찍찍 끌며 술 마시러 함께 가던 그 친구!

여주 휴류암_정수영

여주 휴류암_정수영

 둘째 아이는 날 보고 친구도 없다며 늘 놀린다. 정작 본인은 친구 때문에 마음이 아파 자주 울면서도 말이다.

우리 둘째에게는 친구랑 노는 것이 삶의 첫 번째 낙이다. 나 또한 수업은 일주일씩 안 들어가도 친구랑 술집은 꼬박 매일매일 다니던 친구 없이 못 살던 그런 대학생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낯선(벌써 경기도에 올라온 지 스무 해가 다 되어가는데도) 경기도에 살아 친구가 없노라고, 아빠도 고향 친구들 많고 대학 때 친구들 많다고 자위해본다. 

  오늘 같이 볼 그림은 ‘한임강유람도권’에 실려 있는 ‘여주휴류암’이다.

  아무래도 이 그림이 생각난 걸 보니 친구가 보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의 계절인가 보다. 

  정수영의 ‘한임강유람도권’은 작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강산을 그리다.’라는 특별전에 전시된 그림인데 24.8㎝×1575.6㎝의 크기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그려졌다. 15m가 넘는 워낙 큰 그림이라 모두 펼치지 못하고 일부분만 전시했다. 

  ‘한임강유람도권’은 뱃길로 한양에서 출발해 원주 흥원창에 이르는 여정과 경기도 양평, 금천 등을 스케치하듯 스물여덟 곳을 그렸다. 스물여덟 곳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여주휴류암>이다.

한 척의 배가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뒤로는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있는 바위산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쪽에는 ‘휴류암(鵂鶹巖)’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휴류암을 배경으로 정수영 일행이 뱃놀이하고 있는 그림이다. 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술상도 보이고, 현을 연주하는 노인도 보인다. 역시 뱃놀이에는 술과 음악 있어야 제맛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 있는 양반님의 모자가 희한하다. 모두 갓을 쓰고 있는데, 혼자만 다른 모자(관)를 쓰고 있다. 이 이야기는 뒤에 하기로 하고. 뭍하고의 거리를 보니 배가 강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보인다.                                   

여주 휴류암_일부분

  이 그림이 뭐가 좋을까? 사람도 대충 그려졌고, 붓의 놀림도 특별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기암괴석이 멋지기는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 그려진 탓에 조금 정신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림 중간중간에 먹으로 인장을 지운 부분도 있어 그림을 감상하고자 하는 마음을 싹 가시게도 한다. 아무래도 첫 번째 소개하는 그림으론 다소 약해 보인다.

  그런데도 내가 이 그림을 첫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이유.  대충 그린 듯한 화가의 붓놀림이 순간적인 느낌을 살려주고 있다. 그리고 클로즈업되어있는 화면 구성은 우리를 그림 속 휴류암 안으로 이끈다. 그림 속 상황을 지금 내가 보는 듯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돋보기를 준비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다. 이 그림은 찰나의 순간을 그린 화가의 안목과 솜씨도 뛰어나지만(거친 면이 없잖아 있지만 문인화가라는 한계를 고려하여) 그림 속 글을 읽으면 ‘바로 이거지.’하는 생각이 든다.(구라쟁이에게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한자 문맹이다. 한자만 잘 알았더라도 박사님 되지 않았을까 싶다.)


관을 쓴 사람이 여춘영이다관만 쓰고 우리를 배웅하러 강 머리에 나왔는데손을 잡아 배에 태우고 사공을 불러 출발을 재촉하였다뱃놀이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현과 피리 소리가 들린다고기 잡는 한 노인이 해금과 풀피리를 불고 있다뱃놀이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지노인까지 배에 태우고 음악 듣고 술 한 잔 나누며 대탄(지명)의 이상사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을 정수영은 아름답게 그렸다. 

풍류를 즐기는 조선 후기 양반들의 모습이 웃음 짓게도 하고 소싯적이 떠오르게 하는 그림이다. 집 앞에 구멍 난 츄리닝에 슬리퍼 찍찍 끌고 나온 친구랑 팔 한쪽 붙잡고 다짜고짜 술 한잔하러 가던 그때가 떠오른다.(강대 다니는 공부방 후배에게 시험인데 갑작스레 전화 걸어 술 한잔하러 나오라 했던 적이 있다. 나오라고만 하고 만날 장소를 알려주지 않아 다급하게 다시 전화가 왔던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그 후배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허물없이 지내던 그때 그 친구가 보고 싶어지는 그런 그림이다.

구라쟁이 모두 오늘만큼은 슬리퍼 찍찍 끌고 친구 만나러 가면 어떨까? 

물론 술 한 잔 거 하게 하고 오면 더없이 좋으리라. 


추신 : 노래도 한 곡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노래 추천 남자에겐 안재욱의 ‘친구’,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는 동물원의 ‘산다는 건’. 


 - 짧은 소개 : ‘우리옛그림연구소’에서 주변 선생님들과 함께 옛 그림 읽기를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 그림보단 서양화를 더 좋아하지만, 박물관 공부 인연으로 맺게 된 우리 옛 그림, 이제야 그 맛을 조금 느낀다. 수줍음에 당차게 내 마음을 전달하진 못하겠고 이렇게 그림 보며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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