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이란 말은 시간의 흐름과 지역에 따라 그 판단의 기준을 달리 한다. 가령 ‘풍만함’을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인식하던 17C 서양의 기준과, 마르고 가녀린 몸매를 선호하는 오늘날 여성들과는 사뭇 다른 미적 가치와 판단의 기준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여성을 대지의 어머니로 생각하여 풍부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던 시기와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자기의 몫을 다하는 여성의 모습이 많아진 지금의 사회구조는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의 인식 체계에도 영향을 주어 그들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란 단어의 의미 뿐 아니라 가치와 판단의 기준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변화와 지역의 범위가 바뀌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고전’ 이란 단어로 시간의 한계와 지역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여 준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거나 애호 되어진 것들, 혹은 유행처럼 비슷한 경향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기와 시간들이 쌓이면, 우리는 그 작품 혹은 물건, 생각에 대해 고전적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가 하면 단순한 옛 것을 고전이라 하기도 한다. 즉 어제의 것도 고전이 될 수 있고 지금 막 끝낸 작업도 내일은 고전의 범위에 속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시기의 사조나 경향, 특정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전이 되어진 생각 뿐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기억되어 지고 회자되어진 내용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들로부터 파생되어진 일반적인 ‘미의식’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7월 16일 ‘광주 시립미술관’에서는 북유럽의 ‘바로크’ 그림들이 전시 되었다. 벨기에의 화가 ‘피터 폴 루벤스’를 주축으로 17세기 ‘바로크 화가’들의 그림들이 각 테마별로 전시장을 장식 하였다. 이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그해 11월이 되어서는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미술관을 방문하였다. 낯선 지역, 낯선 시간에 그려진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기 위해 까만 눈동자의 동양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미술관을 방문한 것이다.
이 낯선 47인의 작품은 광주의 여세를 몰아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에서 2008년 12월10일부터 2009년 3월31일까지 ‘루벤스, 바로크 걸작 전’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또다시 사람들의 발걸음을 기다렸다. ‘안토니오 반다이크’, ‘반루이스달’, ‘얀 반 호이엔’ 등 쉽게 기억조차 되지 않는 화가들의 유화 75점이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의 기억을 만들었다.
언론에서는 17세기 북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아우르는 개혁적인 작품들로 소개하였다. 16세기 유럽전역에 퍼져있던 ‘르네상스’ 양식의 변종으로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 발전한 양식을 ‘바로크 미술’이라고 한다. 바로크(1)의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pérola barroca’의 프랑스 전사인 ‘Baroque’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 건축에서도 그 시대적 흔적이 남겨져 있다.
바로크 예술 양식은 한때 타락한 예술로 사람들에게는 피하고 외면하여야 하는 양식으로 생각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성적이고 교회에 헌신함으로서 좀 더 성스럽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적 기하학과 대칭적 질서로부터 인간의 개성과 감성을 되찾고자 했던 한 시대적 요구가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일부 귀족들의 취향과 욕구가 반영된 과장되고 감각적이면서 쾌락적인 그래서 너무도 사치스러워 보이던 그들의 표현 양식은 훗날 ‘로코코’적인 양식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 그들의 열정적이며 인간을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를 갈구하던 그들의 생각이 재조명 받고 있다. 웅대하고 동적이며 화려한 색체의 풍만함은 21세기의 풍만함과 잘 어울리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예술가들이란 그들이 가진 관념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극한의 상황을 즐기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해프닝과 창작의 결과물들은 또 다른 세계를 여는 열쇠처럼 신선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교와 규범을 기조로 한 귀족 중심의 ‘역사화’ ‘종교화’가 주를 이루던 당시의 분위기는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속하는 별개의 세상 이었을 것이다. ‘오레이티아를 납치하는 보레아스’ ‘삼미신’ ‘파리스의 심판’ 등 그나마 눈에 익은 루벤스의 작품들조차 그 제목부터가 참으로 난해하다.
더구나 종교와 규범으로 무장한 17세기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그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광경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과연 어디에서부터 그들에게 감동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지 잠시 막막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흐드러질 것 같은 여인들의 나체와 너무도 낯선 포즈들, 언뜻 예술이라 하기엔 그림이 너무나 외설스럽고, 색채들은 너무나 감각적이다. 때문에 관객들의 반응을 쉽게 가늠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작업 속에는 재현과 묘사에 충실한 그들만의 놀라운 기술과 인내력의 산물처럼 살아 쉼쉬는 생기와 풍부한 햇살을 창조한다. 어느 작품은 어둠이 만들어 내는 공간의 깊이와 절묘한 색감의 광란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한입 베어 물면 시큼한 사과향이 입안 하나 가득 녹아 날 것 같은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성스럽고 고귀하며 감히 어찌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품위를 발산하고 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보다는 어느 귀족의 주문에 그리고 신화의 세계에 혹은 종교의 성스러운 작업에 참여하여 자신이 가진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예술가의 최고의 덕으로 여기며 살았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Time’ 이란 단어와 ‘Local’ 이란 단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의 화두를 제시한다. 때로는 세상을 뒤엎을 만큼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생활의 단편으로 삶의 한 귀퉁이에서 낮은 소리를 속삭이며 삶의 여정에 동반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이 있기 마련이며 그곳에서 지내는 시간만큼의 기억으로 남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태어난 곳을 벗어나 멀리 타향을 떠돌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과 연관 지어진 가족과 친구 혹은 직장, 학교, 선후배 등등의 고리에 안착하여 살아간다.
현지, 혹은 본고장 내지는 어느 특정의 지방을 의미하는 ‘Local’이란 단어는 ‘Original’ 혹은 ‘원조(元祖)’ 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농수산물 원산지 표시를 들 수 있다. 농산물 표시제는 농산물의 생산 또는 채취된 국가나 지역을 표기하여 다른 지역의 농산물(수입품, 혹은 상표의 도용)과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동일 작물, 동일 품종의 농작물이라도 재배지역의 기후나 토질 혹은 재배방법과 시기 등에 따라 그 품질이 크게 달라지며 그로 인한 가치의 차이는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거대한 경제적 소득의 차이로 이어진다. 때문에 이미 EU를 비롯한 일본,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원산지표시를 제도화 하여 자국의 농민 혹은 경제를 보호 하고자 하는 국제규범을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고 있다.
더불어 시간이란 단어를 생각 하여 보면,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과 그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의 경험, 혹은 장소의 이동, 내지는 속도의 변화로 인한 일상생활 패턴의 변화를 사례로 생각하여 볼 수 있다. 가령, 전 세계를 단 몇 시간 만에 돌아 볼 수 있다거나, 자연의 순리라 할 수 있는 계절의 변화에 상관없이 원하는 과일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입 할 수 있다는 사실들은 시간이란 단어의 순환과는 별개의 고리가 형성되어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너무도 쉽고 빠르게 넘나들며 지루한 자연의 시간에 맞추어진 욕구를 간단한 쇼핑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물질사회에서 21세기 정보화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은 참으로 경이로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급속도로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든 인터넷의 위력과 글로벌 기업들의 발 빠른 상술은 지역과 국가를 넘나들며 사람들의 Life Style과 생각의 틀 까지도 바꾸어 가고 있다. 상호 너무도 닮은꼴의 취향과 기호를 창출하고,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정보들이 넘처 나며 놀라울 정도의 정교한 Ready-made의 복제품들이 세상에 동시에 뿌려진다. 언제 어느 곳에서도 너무나 낯이 익고 친숙한 물건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누구나가 손쉽게 물건을 구할 수 있으며 소비한다. 또한 그 물건이 가진 일정한 용도의 관념에 너무도 빠르게 적응하며 그 편리함에 감탄사를 난발 한다.
그러나 17세기의 사람들에겐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지역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보를 접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긴 시간의 여행을 통해 다른 지역의 문물을 접하고 교류하며 다시 자신들의 생각으로 전환하여 가는 과정이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는 범위를 벗어 날수도 있다. 그만큼 그들이 어려서부터 접하게 되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의 조상이 상상했던 세계와 가치관들은 고스란히 장인들의 손을 통해 물건으로 하나씩 만들어 지고 독창적이며 그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간 것이다.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몇몇의 근 현대의 예술가들은 이미 이러한 변화에 새로운 의미를 담는 작업에 주목하여 왔다. 어느 물성에 부여된 고유한 실용성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즉 뜻하지 않은 장소로 옮겨진 일상의 물건에 작가만의 직관과 철학 혹은 미학적 관점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인해 파생되어지는 의문점을 통해 단순한 물건과 새롭게 규정 되어진 세상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2)
이렇듯 시간의 고리와 지역의 한계는 사람들의 생각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요소로 작용하며 때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변화 까지도 수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할 것이다. 얼마 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젊은 여성의 80%가 현재 체중에 만족하지 못하며 74%는 체중 감량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만약 그러한 여성들이 17세기에 살았더라면 자신의 풍성한 몸매에 누구보다 만족하며 살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도 이질적이고, 동양의 사고방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양식의 문화가 서울의 한 복판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근대 이후 서양의 문화와 문물에 익숙할 대로 익숙한 사람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하고 있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의 짧은 지식과 그들과 상이한 미의식은 낯선 시간, 낯선 장소의 한계를 뛰어 넘기가 그리 쉬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느 평론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말을 남기고 있다. “예술의 속성은 그 정점에 이르면 문화와 언어가 서로 달라도 언제나 소통의 가능성을 내제하고 있다. 다양하고 빠른 방식으로 타 문화를 넘나들며 낯설음을 제거하는 예술의 혼성화가 가속화 되면서 국경 혹은 경계의 의미가 쇠퇴하거나 무의미해지고 있다. 안으로는 전통과 현대가 화해하고 바깥으로는 상이한 타 문화들과 교차하고 또는 화해하는 형식으로 상호 배타성을 제거해 나간다. 결국 예술은 다른 문화들과도 손쉽게 우호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1). 프랑스어: baroque, 영어: baroque, 이탈리아어: barocco[*], 독일어: Barock
2). 뒤샹 의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