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각보다 게으르다.
주 5일을 출근했던 지난 5년 동안 나의 시간은 그림에 비유하면 밑그림도 그려져 있고, 50% 채색되어 있는 삶에 가까웠다. 최대한 다른 색의 시간들로 채우고 싶어 주말을 강박적으로 알차게 보냈고 퇴근 후 시간에 집착했다. 그렇게 간신히 채운 그림은 여전히 완전히 나답거나 다른 삶으로 보이기는 어려웠다.
휴직을 하고 나와 출근 없는 첫 주를 보내며, 정말 오랜만에 인생에 백지를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그려도 괜찮고 어떤 밑그림이든 다시 수정할 수 있고, 나아가 어떤 색을 칠할지도 완전히 자유였다. 올해는 나다움을 백지에 그려보기로 했고 이를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했다. 가능한 치밀한 계획들로 채워서 말이다.
나름 혼자서 일을 잘하는 편이라 생각했기에 휴직을 시작하자마자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척척 해내는 나를 상상했으나 현실은 일단 늦잠부터 잤다. 하고 싶은 일들만 잔뜩 적어두고 언젠간 하겠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너무 치밀한 계획들에 시작도 못하는 거라고 핑계를 대는 나를 발견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래서 중요하다.
팩트 1. 나는 하고 싶은 건 엄청 많으면서 혼자서는 못하고 또 못해서 후회한다.
(결국 하고 싶은 건 많아 그것들을 안 하고서는 못 산다는 뜻)
팩트 2. 나는 타인과의 약속에 의해서만 일에 추진력이 생긴다.
(회사나 집단에서 일을 훨씬 더 많이 잘했던 이유)
창조하는 일, 생산성을 유지하는 일이 삶의 목표이자 기쁨인 만큼 이 게으른 나를 잘 구슬려 최대의 생산성을 이끌어 내는 일은 내 오랜 관심사였다. 회사를 너무 오래 다녔나, 내가 이렇게 과도한 자유 속에서 끝없이 게을러지는 걸 미처 파악 못했다.
직장인의 삶을 벗어나려고 한 휴직인데 회사에서의 삶을 흉내 내라니 앞뒤가 안 맞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숨 쉬듯 당연해진 그곳에서의 방식들은 실제로 일을 함에 있어 꽤 괜찮은 레퍼런스가 된다.
1. 장기적인 연간 목표를 세우고, 타인과 공유한다.
회사에서는 흔히 연초에 올 한 해 목표를 세우고 각 목표별 일정, 예상과는 결과물 등을 계획해 상사와 논의한다. 이 방식은 두 가지 이유로 못난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다. 1) 눈앞에 집중할 일이 생긴다. 산발적으로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와 시작 시점이 생기면 여러 일을 상상하느라 바쁘기보다 눈앞의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데 도움을 준다. 2) 타인과의 약속이라는 책임감으로 일을 완수한다. 또 어떤 계획이든 상사라는 타인과의 약속을 통해 말로만 하겠다는 계획이 아니라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 할 일이 된다. 이런 최소한의 큰 틀을 세우고 나면 큰 변수가 생겨도 같은 방식으로 우선순위를 변경하고 계획을 수정하면서도 체계성과 생산성은 유지된다.
➡휴직 계획도 하고 싶은 것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시선으로 우선순위를 분배한 계획을 세웠고, 이를 외부(가까운 지인, 가족들)에게 공유했다. 물론 나를 평가하는 상사에게 보고한 계획과 지인들에게 공유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만 허언증이 되지 말자는 작은 찔림을 줄 수 있다.
2. 공동의 목표를 수행하는 집단을 만들거나, 찾아서 소속된다.
회사에서도 장기적인 목표 수립을 마쳤다면 타임라인에 따라 우선순위의 일부터 착수한다. 회사마다 일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프로젝트 기준 내부 기획, 보고, 착수단계를 거친다. 보통 기획 단계에서는 혼자 일하고 착수 후 협력사와 유관부서가 붙어서 일하는 방식이었던 나의 경우, 어김없이 일의 속도감은 유관부서와 협력사가 함께 할 때 힘을 받았다. "이번 주까지 리서치도 하고 기획서 초안을 마무리해야지"보다는 "이번 주 수요일 협력사 미팅이 있으니 그전까지 문서 완료해야지"나 "프로젝트 관련 문의 회신 줘야지"가 훨씬 강력한 동기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선호하는 일의 특성상 혼자 해야 하는 일뿐이었다. 다만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서로를 느슨하게 감독할 수 있는 모임에 속하면 하는 일이 다르더라도 서로 약속된 기간까지 일을 수행하도록 도울 수 있다. 책을 만드는 모임, 영어 공부하는 모임, 디자인 작업을 주기적으로 공유하는 모임 등 부담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고, 회사에서 유관부서와 일할 때의 느슨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일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3. 나에게 맞는 호흡의 프로젝트 기간을 설정한다.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하다 보면 프로젝트의 규모 예산 등에 따라 1~2년 동안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부터 짧게는 한 두 자리 가벼운 프로젝트까지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창조적인 일이 그러하듯이 기간이 짧으면 아이디어를 낼 시간이 부족하다든지 퀄리티를 올릴 시간이 없다고 불만을 표출하기 마련이지만, 나의 경우 길게 늘어지는 프로젝트는 더 쉽게 질리고 힘들 때가 많았다. 좀 힘들어도 바짝 일하고 쉬고 다시 새로운 일을 하는 패턴이 맞는 방식이 나에게는 더 옳았다.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2달로 잘라서 계획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회사원으로 살면 프로젝트 기간과 상관없이 1년을 기준으로 살게 되고 그 안에 큰 변주를 주기는 어려웠다. 휴직이란 기간 동안 여행을 가든, 글을 쓰든 디자인 프로젝트를 하든 모두 2달로 잘라서 진행 중이다. 어떤 두 달은 힘들고 어떤 두 달은 여유롭고 다 달랐지만 인생의 다이내믹함은 한껏 올라갔고 모든 순간에 몰입할 수 있었다.
게으른 휴직자의 알찬 한 해를 위해 직장인의 업무 목표 설정 방식을 비슷하게 따오더라도 그 방향과 성격까지 같다면 휴직이 무슨 의미일까? 쉽게 오는 시간이 아니니 나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내가 이 시간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 생각을 다듬어 기준으로 삼았다.
1.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 - 뾰족하게 살자
조직에 속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보다 합의를 도출하고 조율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이런 태도는 다수에게 맞는 태도인 반면 개개인의 독창성은 추상화되기 쉽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다시 또렷한 나를 마주해보고 싶었다.
➡'뾰족해 지기', '조금은 이기적이게 되기', '타인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을 우선순위에 두기'
2. 어떤 것을 할 것인가? - 규정짓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보자
회사에서는 우리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기대받지 않는 뜬금없는 역할은 쉽게 개발되지 않고 정체되어 있기 쉽다. 온전히 내가 설계해서 살아갈 휴직 한 해 동안은 최대한 직장인으로서 해볼 수 없었던 그러나 하고 싶었던 역학들을 확장해서 수행하고, 그 다양성을 최대한 넓히려 한다.
➡ '회사를 다니면서 할 수 있었던 일인가? 지금만 할 수 있는 무슨 일인가?' 질문하기, 가능한 모든 변주를 실험해보기
미술 입시 때 선생님은 그림을 자주 망쳐봐야 다음 그림을 잘 그린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실패 확률은 낮지만 비슷한 인생을 그려온 지난 5년보다 망할 확률이 높은 올해의 그림에 나는 더 기대가 된다. 더 뾰족한 태도로 나다운 그림을 설계하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한 데 엮어 그려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전의 어떤 그림과도 다를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올 한 해를 잘 지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의 개성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며 남은 한 해를 열심히 살아가 봐야겠다.
* 본 글은 저의 개인적인 성향을 토대로 수립한 목표로, 모두에게 다 정답일 수 없습니다. 각자의 정답은 각자가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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