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수술
그렇게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생활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는 단칸방에서 4명이서 살부비며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더는 불안에 떨 일도 내가 죽을까 어머니가 죽을까 오빠들이 죽을까 걱정하며 밤마다 울어야 할 일도 없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그 사람과의 생활은 나에게 너무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인해 조금만 큰소리가 나면 그 자리에서 굳어야 했고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다. 혼자 걷는 길에서 뒤에서 오는 차가 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어디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어린 나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런 내 개인적인 힘듦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만 괜찮다면 말이다. 어두운 밤을 지새워도 어머니의 몸이 멀쩡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어머니가 일에 나가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불안에 떨어야 했고 밖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가슴이 철렁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괜찮을 거라고 우리는 이제 괜찮다고 생각하며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버텨낸 청소년 시절을 지나 나는 20살이 되었다.
20살이 되어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그것은 오른쪽 눈에 있는 눈에 띄는 상처였다. 면접을 보는 내내 그것이 문제가 되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상처에 대해 궁금해했다. 사람들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한다. 본인의 궁금함을 없애기 위해 하는 질문이 상대방에게 무례한 질문이 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눈이 너무 싫었다. 이것이 내 앞길을 막는다는 것도 너무 싫었고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죄인이 되는 것만 같아 너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눈이 점점 아프기 시작했다. 날마다 강도는 심해졌고 어머니와 함께 대학병원을 찾게 되었다. 병원에서 교수님은 내 상태를 보자마자 이제껏 어떻게 참았느냐는 말을 먼저 하셨다. 그 말을 듣고선 어머니는 당연히 눈물을 흘리셨고 아무튼 그렇게 긴급하게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 수술은 의안 수술이었는데 눈동자의 안수를 다 빼고(검정,흰 동자 제거까지) 그 안에 산호로 된 구슬 같은 것을 넣는 것이었다.그리고 그 밖으로는 의안이라고 하는 내 눈동자와 똑같이 생긴 가짜 눈을 렌즈처럼 끼는 것이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상처가 없어지고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수술비용이었다.
우리집에는 당장 800만 원이라는 돈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모아서 준 300만 원이 있었지만 그래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때 나는 종종 일방적으로 연락 오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소년기 내내 아버지는 어떻게 번호를 알아내고선 종종 연락하셨다. 그것이 나는 아니고 우리 오빠에게 결론만 말하자면 돈을 벌 수 있는 나이니까 본인에게 와서 돈을 벌라는 개소리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버지에게 내 눈이 이렇게 된 거 아버지 탓이 없는 거 절대 아니고 그때 수술비로 노름했었으니까 그거 돌려달라고 말했다. 나 수술 안 하면 너무 아프고 더는 이렇게 살기 싫다. 애꾸소리 들으면서 20년을 살았으니 지금이라도 아버리로써 도리를 다하라고 하며 돈을 달라고 했다.
그 끝에 돌아온 아버지의 대답
지금 살림합친 여자의 딸에게 얼마 전에 차를 선물해줬단다. 그래서 돈이 없다고 그러니까 내 기억을 되살려 최대한 비슷하게 말해보자면 “너희 언니한테 얼마 전에 차 사줘서 아빠가 돈이 없다” 일단 너희 언니라는 말이 상당히 거슬리고 짜증이 났다 내게 언니가 어디 있을까 진짜 뻔뻔하고 낯짝 두꺼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여자 딸에게 차를 몇천만 원짜리 차를 사줘서 자기 때문에 실명된 내 눈 수술비 500만 원은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진짜 이 사람은 죽어서도 좋은 곳 못 갈 거라고 정말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었다. 그것도 쌍욕. 나는 욕을 하면서도 그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때 그 사건은 내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