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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gene Jun 03. 2015

짬뽕 국그릇

권여사님의 경고

대학시절 집 떠나 학교앞에서 자취를 하던터라 한두달에 한번씩 대구집에 다녀오곤 했었다.

가끔씩 가던 내 방은 먼지가 어디서 자꾸 기어나온다고 권여사님이 봉인을 한 터라 매번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은 주로 청소였었다. (권여사님은 절대 방청소를 해주지 않았다. 방문을 잠글지언정)


밤이 되어 나는 몹시도 흡연의 욕구를 참을 수 없을 때가 가끔 있었는데.. 밤잠없는 권여사님이 거실에서 늘 티비를 보시던 터라 밤에 몰래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생각해 낸 것은 그냥 집에서 몰래 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용기가 대단했다)

내 방엔 따로 베란다가 하나 있었는데, 장판도 깔려있고 해서 옷장이랑 오디오 및 잡동사니를 두며 거의 방으로 쓰고 있었다. 방과 베란다 사이에 샤시를 닫으면 방음도 좋고 냄새도 감쪽같았었지. (라고 그때는 생각했었다 ㅠ)

몰래 야밤에 한대씩 피기 시작하면서 어느샌가 대담하게도 재떨이를 하나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갈기갈기 찢어 없애는 것도 일이었기에..

어느날인가. 집에서 중국음식을 시켜먹고 난뒤 그릇을 밖에 내 놓았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다른 그릇은 다 가져가고 짬뽕 국그릇 하나만 덜렁 남겨져있었다. 근처 중국집 이름 '만리장성'이 새겨진 플라스틱 국 그릇이었다.

유레카! 이것을 재떨이로 써야겠구나. 나는 신이 나서 국그릇을 들고 들어와 부지런히 씻었고, 베란다 한켠 옷장 깊숙한 곳 박스 하나에 숨겨놓고 가끔 집에 내려가면 꺼내서 재떨이로 활용하곤 했었다.

몰래 하나씩 피던 나는 점점 용기가 생겨 어느샌가 재떨이(a.k.a 만리장성 국그릇)는 용량이 차기 시작했다. 낮에 권여사님 안 계실 때 몰래 비우고 밤에 쓰고 그렇게 꽤나 오랜시간을 나와 함께 보냈었다.


몇 달이 지나고 오랜만에 집에 내려간 나는 밤이 되자 문득 그 재떨이가 생각나 옷장을 뒤졌다. 옷장안에 박스가 어디갔더라.. 여기가 아닌가. 내가 다른데 뒀던가. 서랍인가. 다른 옷장인가?

몇달만에 집에 간 거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던지라 온 방을 다 헤집어 놓고 나서야 나는 쉽게 마음을 정리했다. 그래. 내가 그 그릇을 버렸었구나. 맞다. 버리고 나서 깜빡했네. 그렇지. 내가 이렇게 깜빡깜빡한다니까. 아하하하하하.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을 나의 건망증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날밤은 그렇게도 꿀잠을 잤었더랬다.




"딸아. 고마 자고 일어나가 밥 무라"




매번 그렇듯이 권여사님이 문밖에서 아침을 먹자고 문을 두드리며 나를 깨웠다. 아- 역시 집밥이 최고구나. 이래서 다들 집을 그리워하는구나. 온 집에 퍼진 소고기무국 냄새가 나를 절로 일으켜세운다.

(그렇다. 나는 권여사님의 소고기무국을 참 좋아한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소고기무국이라니. 타지에서 고생하던 딸래미를 생각하는 권여사님의 마음이 마구마구 느껴졌다.


부엌으로 가서 늘 앉던 식탁 내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밥 두그릇도 먹겠구나. 얼쑤. 하는 마음도 잠시. 묘하게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우리 집은 잘 안 깨지는 순백의 코렐그릇을 쓴다. 설겆이 편하게 하겠다고 몇년째 코렐만 쓰는 식탁에 뭔지 모를 그릇이 내 앞에 고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만리장성


찾았다!

중간중간 불에 그을리고 침도 뱉고 담배빵까지 난  그 허름한 만리장성 짬뽕 국그릇이!!!!!

내 앞에 소고기무국을 가득 담고 있다.


"딸아. 니 소고기무국 좋아해가 내가 오늘 좀 마이 끓였다 아이가. 마이 무래이- 묵고 더 무라!"





권여사님의 무시무시한 경고.

그날 난 소고기무국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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