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정말 태어날 때부터악한 것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소위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닌 것 같다. 아직도 기독교(개신교)의 교리에 대하여 여기저기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나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것들 중 하나는, 인간이 원죄를 물려받아 태어난다는 논리였다. 잠든 어린아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천사 같은 모습 어느 구석에 태어날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죄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인지.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모두 죄인이고 그 원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절대자가 그 독생자를 피의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기독교에 원죄론이 있다면 동양의 유교에는 성악설(性惡說)이 있다.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악하다고 보는 순자(荀子)의 학설이다. 맹자가 사람이 태어나면서 악을 거부하고 선을 실행하려는 마음씨를, 즉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는 성선설을 주장한 반면, 순자는 이와 정반대로 사람은 누구나 다 관능적 욕망과 생(生)의 충동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이러한 욕구들이 표출되어 서로 쟁탈하는 싸움이 일어나고 사회적 혼란이 생기고 도덕 질서가 파괴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순자가 말하는 죄성은 욕망과 사회적 치란(治亂)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이 본래부터 악하다던 순자조차도 사람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선한 방향으로 교정(矯正)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자는 이것을 ‘위(僞)’를 쌓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순자의 이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회면을 뒤덮는 잔혹한 범죄와 사회악들은 도무지 교화가 불가능해 보인다. 대체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무섭고 악하다. 힘없는 어린아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짓을 저지르는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보며 그 잔인함과 악마성에 나는 할 말을 잊는다. 정말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된 아담과 하와의 원죄(原罪)가, 하나뿐인 동생을 시기하여 들에서 돌로 쳐 죽인 가인의 끔찍한 원죄 유전자가 대물림된 것일까.
유명인들이 과거 어린 시절 저질렀던 '학폭' 논란이 뜨겁다. 철없던 어린 시절 저지른 일이니 용서해야 한다는 여론부터, 피해받은 친구들이 평생 시달렸을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의견들이 분분하다. 기실, 우리 세대에 덩치 크고 힘센 녀석들에게 맞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나는 주로 맞고 돈을 뺏기는 쪽이었지만 그때는 내가 힘이 없어서 맞는다고 생각했지 때리는 녀석들이 원래부터 본성이 악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젠가 키가 크고 힘이 세지면 나도 피해자 입장에서 때리는 쪽(가해자)으로 옮길 수 있겠다는 막연한 계획(?)을 가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그 행위 자체는 인간 내면에 본성으로 뿌리박고 있는 죄성, 악마성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지금처럼 특수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은 이전에는 반에 약간의 (혹은 중증의)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꼭 한 두 명씩 있었다. 그중엔 몸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약간 지능이 떨어지는 친구들도 간혹 섞여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대하는 반 친구들은 대략 세 부류 - 측은하게 여겨 늘 도와주려고 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리고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 - 였다. 물론 때리고 놀리고, 못살게 구는 녀석들은 일부였지만, 대부분은 무관심하거나, 불편해 하거나, 어떻게든 어울리지 않으려고 했다.
중학교 때 2급 정도의 정신지체를 가진 친구와 2년 정도 한 반에 있었다. 나는 소위 무관심파였지만 그 친구와 한 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더군다나 내 뒷자리나 옆자리에서 수업시간 내내 킁킁거리고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방귀를 뀌어대는 것이 싫어서 선생님께 자리를 옮겨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말이지만 그 친구에게 불쌍하다거나 측은한 마음을 가져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을 모르지 않았을텐데, 그냥 싫었다. 다른 녀석들이 그 친구의 등에 죽은 바퀴벌레를 테이프로 붙여 놓으면 괴성을 지르며 온 교실을 뛰어다녔는데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웃고 즐거워하는 쪽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 때리고 못살게 군 녀석들이나 보고 재미있어 했던 나나 별 차이가 없었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학대하거나 깔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인간의 잔학성은 여러 가지 삐뚤어진 모습으로 표출된다. 돌도 안된 아이를 입양해 1년 동안 지속적으로 학대해 결국 18개월 때 내부 장기 파열로 숨지게 한 양부모 사건은 인간 내면의 잔인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아직 재판 중인 이 사건을 가지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는 복부에 췌장이 절단될 정도의 강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여자의 힘으로 그 정도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는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바닥에 눕혀 놓고 위에서 뛰어내려 밟아야 했다는 실험 결과(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21년 1월 2일 방송분)를 보고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양부모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판결받아 평생을 감옥에서 썩은들 그 죄가 씻겨질 수 있을까.
지난 2년 동안 검찰과 언론, 그리고 정치인들의 제물이 되고 뭇사람들의 술안주감이 되었던 전 법무장관의 얼굴은 오늘도 어김없이 포털 메인에 올랐다. 그의 부인은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있다. 이번에는 극우 보수 현직 의사 등 1600명이 전 장관의 거짓말로 인해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 사람 당 100만 원씩 총 16억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부인을 감옥에 둔 전 장관의 딸은 소위 '아빠 찬스'를 사용해 부정입학했다는 누명을 쓰고 있다. 사생활은 이미 처참하게 훼손되었고, 이 가족이 그동안 겪은 고통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가 없다. 소위 강남좌파 기득권에서 오래전 '약자'의 신분이 되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항변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릴 적 우리 반 장애자 친구에게 친구들이 그랬듯 여론은 이제 너덜너덜해지다시피 한 이 전 장관에게 오늘도 온갖 독(毒)스러운 저주를 뱉어내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옳았다. 인간은 그 내면에 악마성(悪魔性)을 가지고 있다. 이 악마성은 반항할 수 없는 힘없는 대상들에, 군중 속에 묻혀 있을 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을 때, 그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한다. 평소에는 그 악마성을 종교와 이성으로 최대한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늘 625 전쟁 때 얘기를 들려주시면서 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다.
"총이나 땅크보다 더 무선 거이 뭔 줄 아니, 젤로 무선 것은 사람이여."
인쇄소를 운영하시면서 제법 부유한 살림을 하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않으셨었지만, 자신에게 그렇게 도움을 받았던 이웃들이 전쟁통에 폭도로, 약탈자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라셨다고 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끝갈 데 없이 사악해져 버린 인간들의 모습에서 얼마나 상심이 크셨을지 짐작이 간다.
전쟁통에 어쩔 수 없었든, 군중 속에서 판단력이 흐려졌었든, 그러나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곧 부끄러움을 느끼고 후회한다. 군중 속에 섞여 돌을 던졌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당화하는 대신 그 행위에 대해 부정하고 감추려고 할 뿐이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꼭 그래야 했을까라고 후회하는 것이다. 그게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이다.
나는 지금도 우리 반 장애우 권XX에게 했던 내 행동을 후회한다. 같이 때리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가해자가 아닌 것이 아니었다. 힘없고 방어능력이 안 되는 친구를 왜 괴롭히느냐고 때리는 아이들을 막아서야 했다. 과거를 돌이킬 수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내가 대신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다. 내가 네게 마음으로 돌을 던졌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우리는 인간이다. 하나님이 그의 모습을 본떠서 창조하셨다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악마성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제어할 이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안다면, 지금이라도 손에 쥔 돌을 내려놓고 군중 속에서 조용히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갈 일이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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