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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꾼의 목장 Apr 16. 2021

얘들아, 가만있지 말고 도망쳐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은 찾아왔고 다시 세월호 앞에 서 있다. 7년이나 지났건만,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채 피고름만 뚝뚝 배어 있다. '시체팔이.'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300의 아이들에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이유라도 밝혀 주자는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한 일부 사람(일부라 하기엔 너무 많은)들의 조롱이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피해자 가족 앞에 퍼질러 앉아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는 사악스러운 그들이다.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발라 주지는 못할 망정, 소금을 뿌리고 있으니 새 살이 돋아나기는커녕 점점 더 덧날 수밖에.


4월 16일, 세월호 7주기. 세월호의 '세'자만 꺼내도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걸로 매도되는 세상, 이제는 좀 내려놓고 아이들을 보내 줘도 될 것 같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 기억이 여전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리기 때문이다. 잊는다는 것이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배가 가라앉는데 "가만히 있어라."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다가 수장된 아이들. 아이들은 가만히 선실에 남아 있으라 하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간 어른들. 피어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져 간 우리 300명의 아이들. 이미 전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으니 살겠다고 갑판으로 뛰쳐만 나왔어도 절반은, 아니 거의 다 살았을지 모르는 그 아이들. 자신들이 죽는 것도 모른 채 마지막까지 친구에게 부모에게 하트문자를 날리던 그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로 아이들을 가둬 놓고 도망친 어른들도 무서웠을 것이다. 시커먼 바닷물이 점점 얼굴로 다가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죄다 뛰어나와 아수라장이 되면 자신들이 죽을 수 있겠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렇게 구명정에 올라 침몰해가는 배를 바라볼 때까지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겠지. 배가 가라앉아가는 순간에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겠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헤엄칠 줄 모르는 아빠가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채 아이를 들어 올려 아이만 살리고 자신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고 또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부성애가 작용했기 때문이지, 정말 극한 상황이 된다면 우리 몸을 통제하는 이성적인 명령체제는 일시적으로 기능이 정지되고 철저한 본능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10년 전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가 덮친 후쿠시마현의 한 바닷가 초등학교의 운동장에는 몇십 구의 아이들 시신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미뤄 봐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사람 키 몇 배나 되는 쓰나미의 공포 앞에서 아이들보다는 제 목숨 먼저 건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었으리라.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엔 거의 매일같이 교실 안에서 무차별 폭력이 벌어졌다. 분명 ‘맞을 짓’에 대한 벌 이상으로 부당하게 맞고 있다는 생각, 우리 인권이 유린되고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 했었겠지만 그렇다고 부당함에 대하여 그 앞에서 항의 표시를 한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맞고도 아프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짓는 것이 내가 선생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항거였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아이들에게 '어른'이라는 건 무조건 때리는대로 맞아야 하는 존재도, 믿고 복종해야 하는 존재도 아니다.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정말 아이들의 생명이 걱정된다면 "상황을 보다가 정 안 되겠으면 도망쳐"라고 말해 주는 것이 어른들의 책임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린 이미 그런 세상에 들어와 있고 그런 세상을 살고 있은 지 오래되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부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불편한 건 "나서지 말라"는 의미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건, 괜히 나서다가 손해 보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뜻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때, 아버지는 나를 앉혀 놓고 지겹도록 한 가지를 당부하셨는데 그건 "데모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티브이를 틀면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화염병을 던지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뉴스를 뒤덮던 시절이다. 포승줄로 굴비 꿰듯 줄줄이 꿰어 간첩죄로 재판받고 옥살이를 하던 때다. 옳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끌려가 두들겨 맞거나 빨갱이로 찍혀서 감옥 가고, 출세길이 막히던 때다. 아버지인들 당시의 전두환 철권 군부독재가 살만한 시절이었을까. 데모하지 말라는 것은 그런 부당한 체제를 인정하고 살라는 뜻이 아닌, 데모하다가 다치거나 잡혀가면 너만 손해니 몸조심하라는 걱정이셨던 것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네가 그런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아. 그러니 평범하게 살아. 튀어 봐야 힘 있는 놈들의 표적밖에 안돼. 그냥 보통 사람으로 큰 목소리 내지 말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


그걸 한마디로 함축한 것이 "데모하지 마라"가 아니었을까.




강산이 거의 네 번이 변했지만,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나라고 별 수 없다.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하셨던대로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가만히 있어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재난 등에 비교적 안전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는 미국도,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의 상황이 되면 학교에 남아서 교사의 지시를 따르라는 프로토콜이 있다. 학교가 제일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학교 총기난사 사건들을 보며 상황에 따라 오히려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어른들이 너희를 지켜 주지 않고 먼저 도망갈 수도 있어. 도망가야 할 상황인지,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인지 너희들이 판단해. 그래서 도망가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얼른 도망가."


세상에 아빠가 돼서 한다는 말이, 어른들 말 듣지 말고 도망가라니. 그러나 정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선생님들이 절대적으로 아이들 먼저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내게는 없다. 나부터라도 내 발등의 불이 급하지 남들이 보이겠는가. 그래서 우리 가족은 (Life threatening의) 비상시, 재난시에 각자 (알아서) 피신해서 모이는 장소를 여러 군데 정해 놓았다. 그것이 훨씬 더 생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 성인이 된 큰아이와 둘째 아이에겐 또 이런 말을 해 준다.


"경찰이나 공권력이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맞서지 말고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나중에 법적으로 시비를 가리는 쪽을 택하는 것이 당장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스마트한 방법이야. 괜히 덤비다가 총에라도 맞으면 그 시비를 가리는 일을 너희들이 아니라 아빠가 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점입가경이다. 그러나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길바닥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소수계라는 이유로 경찰들의 고압적 체포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더 비정상으로 보일만큼 왜곡되고 비틀어진 세상이다. 통제하는 쪽과 통제당하는 쪽의 괴리는 도저히 줄어들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말 못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대꾸 한마디 하지 못하고 꽃잎처럼 스러져간다. 사회의 통제 시스템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그늘 속에는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피어 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안타까운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계모에게 맞아 내장이 터져 죽은 정인이처럼.


뭍에 올라온 지 4년째. 그 오랜 시간 시뻘건 녹을 더께로 얹은 채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세월호를 본다. 그렇게 가만히, 말없이 선 배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한사코 배 옆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과 우리들은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오늘도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진상규명을 '다짐'한다. 말로는 당장 내일이라도 모든 의혹들이 밝혀질 것만 같다. 그러나 오늘뿐, 내일이 되면 아이들은 그렇게 1년에 한 번 추모받는 이벤트로만 기억되고 잊혀진다. 그리고 또다른 1년을 다시 검은 바닷물속으로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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