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민영화? 미국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최근 한국에서 또다시 의료보험, 공공서비스 등의 민영화가 거론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의료보험 민영화는 김대중 정부 때도 논의가 된 적이 있고, 이명박 정부 때도 추진했었다가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계획을 접었던 것인데 아직까지도 호시탐탐 이런 기회를 노리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그 이면에 얼마나 큰 이권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대변해 준다.
의료보험이 민영화되면 자유로운 경쟁 시스템 속에서 서비스의 질은 더 좋아지고 가입자들의 부담은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주장인데, 과연 그럴까? 한국의 의료보험 체계는 이제 세계적 수준이 되었다. 의료제도 민영화는 그것을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복지정책, 오바마케어는 어떤 정책인가
미국은 선진국가들 중 국민들의 조세 부담이 낮은 편에 속한다. 미국의 소득세율은 총 7등급으로 나뉘어 있는데 최저 10%에서 최고 37%까지 누진세가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7단계의 소득세율 중 4단계 이상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다. 결혼한 부부의 경우, 공제 후 실질 연소득(Annual taxable income) 628,301달러 이상이면 37%의 최고 소득세율이 적용되지만 실제로 이 그룹에 들어가는 납세자들은 전체의 1%에 불과하다. 미국의 중간(평균) 소득 가정에 부과되는 소득세는 고작 1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유럽 복지국가들의 소득세율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미국 평균 가계소득 $67,521 기준, 2020년 US Census 자료.
미국은 세계를 움직이는 경제중심국이지만 지금 당장 거지가 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 2022년 2월을 기준으로 미국의 총부채는 30조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이를 현재 원화 환율로 환산하면 거의 4경원에 달하는 - 대체 얼마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 액수이다. 이 천문학적 액수의 부채를 청산하기란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어려워 보인다. 아마도 모노폴리(Monopoly) 게임처럼 주(州) 한 두 개쯤은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케어로 흘러나가는 정부 재정은 결코 적지 않으며 지난 2년간 실행되었던 바이든의 American Rescue Plan으로 다시 3천5백억 달러를 소모했다.
통상 오바마케어로 불리는 PPACA (The Patient Protection & Affordable Care Act), 건강보험 개혁법안이 발효되었던 2010년 기준, 미국의 건강보험 미가입자는 무려 15%에 달하는 4,720만 명이었다. 오바마케어 실행 이후 건강보험 미가입자 비율은 꾸준히 줄어 트럼프 취임 직전 8.7%까지 떨어졌다가 지금은 다시 11%(3,300만 명)으로 증가 추이를 보이고 있다.
약 2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건강보험 개혁법안의 핵심 중 두 가지는 '전 국민 건강보험 의무화' 정책과 ‘정부보조’ 정책이다. 그래서 건강보험이 없으면 과태료를, 저소득층에게는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조금을 주는 방법으로 가입을 독려했다. 실제 상당수의 저소득층이 이 혜택으로 보험료의 최대 95%까지 정부보조를 받아 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미국의 건강보험료는 독일의 두 배, 한국이나 이태리의 세 배 수준이며 OECD 평균과 비교해도 두 배 이상이다. 50%의 정부보조를 받는다 하더라도 연소득 10만 달러 정도, 45세 가장을 둔 4인 가정이라면 한 달 1천 달러, 1년이면 소득의 12% 수준인 12,000달러가 넘는 보험료가 청구되는데, 현실적인 부담 액수를 한참 넘어선다. 그러니 월급 받아 생활하는 샐러리맨들이나 맞벌이 가족에게는 정부보조 액수는 기대했던 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과태료는 보험료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보험 미가입률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오바마의 95%,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약속한 97% 가입률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수치였던 것이다.
미국의 병원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건강보험이 없다면 맹장수술 한 번 받고 수만 달러의 청구서를 받아 들어야 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MRI(자가 공명) 한 번 촬영하는 데 평균 2,000달러가 든다. 산모가 제왕절개와 무통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하면 대략 50,000달러 정도의 수술, 마취 및 입원비가 청구된다. 간단한 검사비조차 수백 달러가 들어가며 조직검사 같은 것은 아예 수술로 간주된다. 넘어지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이라도 실려가게 되면 대략 5,000에서 10,000달러까지 청구서가 날아온다. 멀쩡히 보험에 가입해 놓고 굳이 한국에 나가 치료나 수술을 받고 돌아오는 한국인들이 많다는 것은 이러한 미국의 의료수가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병원비 때문에 미국 가구의 17-19%가 일정액의 의료 부채를 안고 있으며 병원비 때문에 파산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1년에 53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보고서도 있다(2017-2018년 US Census 자료를 근거로 추산). 보험이 있어도 가입자가 지출하는 비용이 적지 않게 발생하는 미국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의사들의 비양심적인 과다/허위 클레임(청구)
직업상 손님들이 보험사에서 받은 진료 클레임(청구) 기록을 이메일로 보내 문의해 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보험사가 의사들이 청구한 액수를 전부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클레임이 보험사로부터 거부된다. 그러다 보니 의사들은 아예 처음부터 넉넉하게(?) 보험 클레임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부 간 큰 의사들은 환자가 받지도 않은 검사나 치료, 수술비 등을 슬쩍 끼워 넣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의사가 아니라 사기꾼이다.
제약회사들은 또 어떤가. 물론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 제약회사가 신약을 출시하면 평균 10년간은 독점권이 법적으로 보장되는데 이 기간 동안은 다른 제약회사들이 복제품 약(generic)을 만들 수가 없다. 결국 독점기간 동안에는 제약회사들이 약값을 받고 싶은 만큼 받아도 제재하기가 어렵다. 일반 보험 가입자들은 5에서 50달러 사이의 코페이(30일치 가입자 부담액)만 내고 처방약을 받아 오지만 실제 그 약값이 한 알에 얼마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상상하는 것 이상 비싸다. 한 알에 100달러를 호가하는 약들이 부지기수다.
영어가 불편한 노인들은 먹지도 않는 처방약이 자신의 보험사에 청구되는 것도 모르고 약국에서 내미는 무엇인지도 모르는 종이에 덥석덥석 싸인을 해 준다. 일부 약사들은 그렇게 빼돌린 약을 무보험자에게 되파는 방법으로 부당이득을 취한다. 실례 하나로 1998년 미국 화이자(Pfizer)에서 비아그라(Viagra)를 출시한 후 많은 약국에서 암암리에 비아그라를 판매했다. 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이 가능한 약을 그렇게 팔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의료보험에 그것이 몰래 청구되었거나 약이 굳이 필요 없는 사람이 처방받은 약을 재판매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보험 일에 종사하는 필자가 이러한 불법행위에 대해 여러번 보험사에 고발을 했지만 실제 처벌을 받거나 면허를 박탈당한 경우는 많지 않다.
시니어 (메디케어) 보험 남용
미국의 의료 수가와 보험료가 높은 데에는 노년층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미국의 메디케어(Medicare) 역시 국민들이 납부한 세금으로 운영된다. 메디케어는 65세가 되는 해에 가입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의료 서비스가 거의 무료다. 미국에 현재 6천만 명 정도(2022년 기준)라는 65세 이상의 시니어 그룹이 소비하는 의료 비용은 전체의 48.6%이다.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병원을 더 많이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메디케어는 남용되고 있다. 특별한 증상이 없는데도 일 년에 두세 번씩 위/장 내시경을 꼬박꼬박 받는 환자들은 물론이고 먹지도 않는 비싼 약들이 무분별하게 처방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2020년 기준 미국의 65세 이상 시니어들에 의해 소비되는 처방약은 연간 평균 한 명 당 14,000달러 정도인데 65세 이상 인구를 약 6천만 명을 잡는다면 대략 8천억 달러어치의 처방약이 매년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줄이지 않고는 보험료는 낮아질 가능성이 없으며, 마지막 베이비 부머 세대(1965년생)가 은퇴연령에 합류하는 오는 2030년이 되면 약 1억 명에 육박하게 될 시니어 그룹에 의해 메디케어 예산은 모두 소진되어 지금의 30세 이하의 세대는 은퇴 후에 메디케어 혜택을 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오바마케어는 모래 위에 올린 성이었다
오바마케어는 민영화 이후 난항을 겪어 온 미국의 의료체계를 개혁하겠다는 대의적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익에만 혈안이 된 보험사들과 병원, 제약회사들을 통제할 장치를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추진으로 주/연방정부의 막대한 지출이 생겨났고, 이는 결국 또 다른 부작용들만 양산했다. 준비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유럽식 복지정책을 도입하려 했던 셈이다. 이는 지속적으로 오바마케어를 반대했던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이미 시행 전부터 경고된 내용이었다.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2013년부터 10년 동안 오바마케어를 위한 정부의 지출이 약 1.76조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는데 이 예상이 거의 맞아떨어지고 있다.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할 것인지, 과연 의도하는 대로 개혁이 될 것인지, 제도가 연착륙할 수 있도록 행정 능력과 계몽이 되어 있었는지에 대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런 이유들로 오바마케어에는 시행 전부터 수도 없이 많은 허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실례를 하나 들어 보자.
오바마는 최저생계소득의 138%에 못 미치는 소득을 대상으로 의료비의 100%를 주(State)에서 보조받아 메디케이드(Medi-cade)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 구체적인 숫자로 예를 들면 2인 가족 기준 25,000달러 정도의 소득세를 신고했다면 이 부부는 건강보험료를 부담할 재정이 안되니 주에서 보험료를 100% 부담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일 시세 천만 달러의 건물을 소유한 사람이 대대적으로 건물 보수를 하느라 그 해 임대수입이 없거나 오히려 적자가 났다면 어떻게 될까?
답을 예상하겠지만 천만 달러짜리 건물 소유주가 100% 주정부 보조를 받아 1년 동안 무료 건강보험을 갖게 된다. 그 해 소득이 없었으므로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었다. 이를 일찌감치 파악한 사업주들은 이 조항을 다양하게 이용하여 무료보험, 혹은 80-90%까지 정부 보조를 받았다. 이전 대학 등록금에 대하여 다룬 칼럼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백만 달러짜리 집에 살면서 아이들을 정부 보조받아 대학 보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결국 오바마케어도 마찬가지로 월급이 통장으로 또박또박 들어오는 일반 샐러리맨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세금이나 보험료 징수대상인 자영업자나 기업들만 혜택을 누리는 불평등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오바마케어 같은 국가적 정책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국가의 복지혜택(세금)을 공공재로 인식하는 수준의 국민의식이 절실히 필요했다고 본다. 독일 사람들은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빨리 갈 수 있도록 웬만하면 고속도로의 중간 차선을 비워 놓고 운전한다고 하고, 전 세계 최고의 소득세를 납부한다는 핀란드, 벨기에 국민들은 국가에 내는 세금에 대해 본인들이 그에 합당한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으므로 절대 손해가 아니라는 신뢰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책임을 가지는 최소한의 시민의식이 준비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10년 전 어느 시니어 건강보험 세미나에서 필자는 노인들을 앉혀 놓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려 분들이 받는 연방정부의 의료혜택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입니다.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아끼고 소중히 쓰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무분별하게 메디케어를 남용하시면 여러분들의 손주들이 여러분 나이가 되면 메디케어 예산이 바닥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보험을 구입해야 하거나,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나름 원고까지 준비해서 진심을 담아 토로한 말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에게서 나온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정부 혜택은 못 찾아 먹는 사람들이 바보’라는 인식들을 대부분의 노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적잖이 놀랐던 것이다. 손주들이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죽은 후에도 한참 뒤에나의 일인데 그걸 내가 왜 걱정해야 하느냐, 당신이 뭔데 나보고 정부 혜택을 써라 마라 하느냐는 노여운 질문을 하는 분들까지 있었다.
물론 언급한 의사, 약사, 자영업자, 노인들의 이야기는 전체가 아니고 일부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조리들이 묵인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닐뿐더러 더구나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가에서 벌어지면 안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오바마케어는 연착륙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미 부분 시행된 지 12년, 완전 시행된 것이 8년이나 지난 이 연방법(Federal Law)을 뒤집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와야 하는데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지난 2021년 세 번째로 제기된 위헌소송이 대법원에서 기각된 이유도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동장치가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병원비는 갈수록 비싸지고, 보험사들은 매년 보험료를 올리고 있다. 세계 경제를 주도한다면서 국가가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져 주지 못하는 미국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정치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일이라고 했고, 국가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한국 정치인들은 의료 민영화를 논하기 앞서, 1971년 닉슨 대통령 정부에 의해 민영화된 이후부터 지속적인 추락을 거듭해 온 온 미국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의료제도건 무엇이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방향으로 선회하는 정책들 때문에 국민들이 불안에 떨어야 한다면 그 정치는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정치가 아니고 그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