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WBC 우승
우승후보 1순위, 오타니의 일본을 꺾고, 돌풍을 일으켰던 다크호스 이태리마저 부순 베네수엘라가 결국 미국마저 무릎 꿇리고 처음으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정상에 올랐다.
이 승리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정치적 서사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현직 대통령 마두로가 미국에 체포, 압송되는 초유의 굴욕을 겪은 국가, 미국과 현재 진행형 대립에 서 있는 나라가 종주국인 미국을 꺾었다는 사실은 '언더독의 반란'이나 '정치적 설욕'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기에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우승을 단순한 '기적'이나 '정치적 복수극'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라운드 위에서 땀 흘린 선수들의 실체적인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일이다.
베네수엘라 팀은 결코 약자가 아니다. National League MVP 출신인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비롯해, 신성 잭슨 추리오(밀워키 브루어스), 윌리어 아브레우(보스턴 레드삭스), 타격왕 루이스 아라에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글레이버 토레스(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에우헤니오 수아레스(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마이켈 가르시아(캔자스시티 로열스), 베테랑 캡틴 살바도르 페레즈(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윌리엄 콘트레라스(밀워키 브루어스), 결승전 선발이었던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레인저 수아레스(보스턴 레드삭스), 마무리 다니엘 팔렌시아(시카고 컵스)등을 필두로 구성된 이들의 라인업은 그 자체로 MLB 올스타전을 방불케 했다.
비록 미국의 천문학적인 연봉 총액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총 연봉 2억 달러라는 수치는 이 팀이 이미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검증된 '수퍼스타 집단'임을 증명한다. 이미 미국 자본주의의 소득 순위 최상위에 올라 있는 그들이 정치적 울분을 풀기 위해 배트를 휘둘렀다고 보는 것은 가당찮다. 그보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프로페셔널들로서 자존심이 걸린 승리를 쟁취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람들은 흔히 스포츠에 국가적 비극이나 정치적 상황을 투영하곤 한다. 그러나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이번에 WBC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또 한 번 상기시킨다. 정치는 어떻게든 스포츠를 이용하려 들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선수들의 가치와 그들이 쏟아부은 역량이라는 점이다. 베네수엘라는 '가련한 승자'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야구 강국'으로서 세계 정상에 섰다.
이번 WBC 결승전은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외부의 시선은 미국과 베네수엘라라는 두 국가 사이의 정치적 긴장감과 해묵은 갈등을 그라운드 위로 소환하려 애쓰지만, 정작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누가 더 간절하게 정치적 복수를 꿈꿨는가'가 아니었다.
승패를 가른 것은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의 폭발적인 주력이었고, 살바도르 페레즈의 노련한 투수 리딩이었으며, 베네수엘라 선수들이 MLB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으며 갈고닦은 기량 그 자체였다. 그리고 미국대표팀보다 더 승리에 갈망한 선수들의 집중력이었다.
스포츠에 정치적 서사를 무리하게 투영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선수들의 노력을 가리는 행위: 승리를 '정치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순간, 개별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과 프로페셔널한 투혼은 국가 간 대리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스포츠 본연의 가치 훼손: 스포츠의 아름다움은 인종, 국적, 이념을 떠나 '공정하게 정해진 규칙 안에서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단순함에 있다. 여기에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스포츠가 가진 화합과 순수한 경쟁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베네수엘라의 우승은 '약자의 반란'도, '정치적 설욕'도 아니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한 거인(Giants)들의 값진 승리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그라운드 밖의 복잡한 셈법을 거두고, 오직 야구라는 종목 안에서 그들이 보여준 경이로운 퍼포먼스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야 한다.
스포츠는 스포츠로 존재할 때 가장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