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우리 사회가 거대한 '결벽증 수용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단 한 번의 실언이나 매끄럽지 못한 행보라는 칼바람 한번에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최근 민주진영의 큰 물줄기를 만들어왔던 몇몇 인물들을 향한 대중의 서슬 퍼런 비난들을 보며, 나는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성웅 이순신 장군이 술 한잔을 걸치고 졸음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거나 부정하게 축재한 돈으로 차명부동산을 사 뒀었더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의 잣대대로라면 그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 아니라 '잠재적 살인마' 혹은 '양심을 팔아먹은 파렴치한' 등의 낙인이 찍힌 채 광화문 광장에서 진작에 끌어내려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과오를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잘못은 잘못이다. 하지만 그가 지켜낸 이 나라의 산천초목과 후손들의 삶, 민족적 자존심이라는 '공(功)'이, 개인의 뼈아픈 '과(過)'에 가려져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일까. 물론 내가 언급하는 인물들이 ‘이순신장군’ 급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까방권(까임 방지권)'이라는 속된 말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 인색한 사회가 되었을까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2. 100%의 바름과 100% 청렴이라는 허상
우리는 종종 리더들에게 신의 도덕성을 요구한다. 99번을 잘했어도 마지막 1번의 삐끗함에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돌린다. 마치 나 자신은 단 한 번의 먼지도 묻히지 않고 살아온 성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60 평생을 살며 수많은 브랜드의 부침을 지켜봤다. 완벽한 브랜드는 없었다. 다만 그 브랜드가 가진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이 세상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가 본질일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대한민국 민주화의 척박한 땅에 물을 대고 거름을 주었던 이들의 고뇌와 헌신이, 최근의 논란이라는 필터에 걸러져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 무척 아쉽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비판의 자유'조차 존재했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타인의 과오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불 꺼진 거울 앞에 세워둔다. 리더에게 요구하는 100%의 올곧음을 스스로에게 대입했을 때,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 말씀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건, 우리가 돌을 던지는 쾌감에 취해 '헤아림의 미덕'을 잠시 잊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로와 과오는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공은 공대로 기억하고, 과는 과대로 짚어보되,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난도질하는 모습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
이곳의 필명(筆名, Pen name)인 짐꾼의 마음으로 세상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면 발을 헛디딜 수도 있고, 숨이 가빠 험한 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 짐을 포기하지 않고 어디로 향했느냐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지고 온 그들의 '짐의 무게와 가는 방향'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비틀거리는 '발걸음'만을 꾸짖고 있는 걸까. 이순신이 구한 것이 조선의 영토였듯,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도 어쩌면 서로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지 않는 최소한의 여백이 아닐까 싶다. 오늘 밤엔 나부터 거울 앞에 서서 묻은 때를 먼저 닦아봐야겠다.
-26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