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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진 Jul 15. 2022

도둑맞은 가난할 권리

당신의 가난은 그들의 체제 유지 수단이 아닌가


 1958년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가 열풍을 불러일으킨 이후 전 세계는 그의 예견을 몸소 실천하듯 직접 과도한 능력주의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성실과 노력은 성공의 척도이며, 대학은 또 다른 계급을 낳는다. 마이클 영이 경계하고자 한 능력주의는 1960년대 이후 냉전 체제를 거치면서 오히려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안으로 세워졌고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는 비로소 현대에 와서야 재차 발견되고 있다.


 능력주의는 언뜻 일반적인 국민 또는 경제적 우위가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사회의 풍조로 보인다. 노력만 하면 누구나 부를 누릴 수 있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으며, 마치 새로운 세계가 주어지는 것처럼 포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을 일궈내기 위한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이 능력주의의 허점이자 우리가 간과하는 맹점이다. 의무교육을 예로 들어 보자. 같은 교육을 받는다 한들 학군에 따른 체제와 커리큘럼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일부는 심지어 경제적 어려움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또 제 3세계의 사람들은 어떤가. 내전과 기아, 질병으로 교육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은 21세기에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의 ‘실패’를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이는 다분히 비합리적인 처사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근 수십 년간 노력과 성공을 직결하여 너무나도 보기 좋게 포장해 왔다. 백 미터 달리기 경쟁에서 누구는 50미터 앞에서 출발하고 누구는 자동차를 타고 가고 누구는 다리 한 짝이 없다면 그것은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경쟁일까? 우리는 눈을 뜬 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 이러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지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키케로는 묻는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재미있는 예시로 미국의 유명 셀러브리티인 킴 카다시안이 있다. 그는 스스로 자수성가했다고 말하며 다른 ‘금수저’ 여성 기업인들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자수성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정말로 개천에서 난 용이었을까? 킴 카다시안은 모든 것이 다 주어진 미국 최상류층 베벌리 힐즈 출신에 oj심슨 사건 변호를 맡은 아빠를 둔 엄청난 금수저였다. 그가 2억 명의 팔로워를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었을 부단한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애초에 그러한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기반 자체가 굉장히 특수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키케로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누가 이득을 보는가? 바로 특권층이다. 노력이 성공을 좌우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이 정당한 노력을 했음을 입증하기만 하면 특권층의 특권은 너무나도 쉽게 정당화된다. 날 때부터 모든 것이 주어진 부자들이 가질 수 없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을 극복한 자수성가 이미지라는 역설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부를 정당화하고 인생을 다채롭게 꾸미기 위해 self-made타이틀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자수성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건 비단 사람들의 인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오랫동안 이어졌던 이들의 부당한 체제 유지에 대한 대항과 반발을 묵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성공 여부가 개인의 노력에 있다는 현대의 능력주의 사상이 퍼지는 건 부자들에게 굉장한 이득이다. 과거에는 부의 여부가 개인의 노력과 연결되지 않았다. 하늘, 또는 신, 또는 부모에게서 세습된 계급에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이다. 교육 수준이 높아짐과 함께 계몽된 사람들은 결국 이의 부당함을 깨닫고 귀족들을 숙청하며 계급 사회를 타파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현대 사회가 계급에서 자유로운가? 오히려 경제적 계급은 더욱 교묘하게 작동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날 때부터 저항할 수 없는 신분이 아닌, ‘개인의 노력’이 스스로의 성공을 좌우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부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자본가, 즉 금수저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돌리게끔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체제 전복의 가능성을 뿌리 뽑아 버린다. 사람들이 어디에 화를 내야 할 지 모르게 만들고, 부당한 상황임을 직시할 권리조차 빼앗는 이 사회를 우리가 과연 정의롭다고 논할 수 있을까.


 전 재산을 기부하고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금수저 유명인이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성공은 평등할까? 특권층과 일반 국민 간의 격차는 비단 ‘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금수저 지인이 공실을 임대해주고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또 다른 지인이 명품을 협찬해주며 대대로 부자였던 부모님의 주은행이 대출을 해 줄 것이다.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부의 크기뿐만 아니라 태어난 그 순간부터 얼마나 관심과 애정과 관리를 받고, 어떤 환경에 노출되었는지부터가 다르기에 경제적 자본을 배제한다고 해도 사람들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극단적인 예시로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만들어진 자존감과 멘탈, 태도도 있다. 돈을 물려주는 것뿐만이 아닌 자존감과 인맥과 지식과 학업 환경 등을 물려주는 것이,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물려주게 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실태이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의식 자체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능력주의를 세뇌시키고 계급 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저소득층 혹은 특권층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도 언젠가는 한탕주의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은연중의 기대가 깔려 있다. 비트코인 열풍이 그것이고 주식 열풍이 그것이다. 현재 처해 있는 상황, 나의 유리천장은 인식하지 못한 채 준거집단이 항상 위를 향해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의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마르크스가 부르짖었던 프롤레타리안 혁명을 이룩하기에 우리는 시간도 돈도 여유도 없다. 우리가 길러야 할 것은 비판적 시각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다. 시몬 베유는 주의와 다른 관심을 강조했다. 사심 없는 미덕, 기다림이 그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는 만큼만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 똑같이 흘러가는 매일매일을 그저 넋 놓고 바라보고 있지만 말고 능동적인 행위를 위한 관심과 시선이 필요하다.


 전통적으로 사회적 취약계층이 오히려 개혁을 지지하지 않고 심지어 무관심했던 것은  자신들이 오늘 하루 먹고살기도 고달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눈감고 넘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될 일인가? 능력주의 사회에 종속된 , 불합리한 체제의 영속을 바라는 특권층이 원하는 그대로 굴종하는 것이 아닐까? 부정의로 가득한  사회를  자식과 미래 세대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각성과 연대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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