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성과 존재가치의 양립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모든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진시황이 불로초에 집착했고 인간의 창의성이 뱀파이어와 윤회의 세계를 만들어 냈듯이 현대 과학으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의 단계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공포와 미지의 존재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유한성이 삶에 가치를 선물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철학의 단골 질문인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샤르트르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즉 삶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써 그는 세계에 기투된 인간이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뜻깊게 보았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본질이 규정되지 않았으며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이기에 스스로의 주체성과 결단은 곧 삶의 방향성을 창조하고 본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의견이다. 하이데거 또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는 존재자가 되어 본질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칸트가 인간 이성을 강조하고 니체가 니힐리즘을 벗어날 것을 명명했다면, 실존주의적 본질 회복은 삶의 의미에 대해 정의하고자 한다. 이는 오랜 시간 동안 철학이 풀고자 한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인간 삶의 유한성과 가치, 실존과 본질 사이를 저울질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중에서도 인간 실존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 두 작가, 까뮈와 쿤데라의 사상은 다른 방향성을 띄지만 동시에 공통적으로 파격적이다.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통한 실존 회복을 촉구한 까뮈와 유한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물은 쿤데라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특히 쿤데라가 그의 저서 초반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언급하며 모든 일들이 무한히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운 신화' 는 곧 까뮈의 <시지프 신화> 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실존에 대한 까뮈의 입장은 그의 저서 대부분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시지프 신화>에서는 유한성의 굴레 속 실존 회복을 색다르게 조명하고 있다. 바위를 산꼭대기로 옮겨야 하는 영원한 징벌을 받게 된 시지프의 숙명은 언뜻 보기에 끔찍한 고행이자 고통의 연속뿐으로 보인다. 그러나 까뮈는 시지프가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찾을 수 있으며 곧 본질의 회복까지 이루게 된다는 해석을 보인다.
까뮈의 존재와 자아의식에 대한 해석 아래 분노한 신들은 시지프는 유한한 인생의 앞날을 결정짓기에는 성공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만다. 시지프는 부조리한 '존재'의 상태에 기투된 인간을 나타내는 존재자로써 작용한다. 물과 태양을 사랑했던 그의 모습은 지상에서의 인간 삶을 즐길 줄 알았던, 까뮈의 시각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내포한다.
시지프의 운명이 결정된 이후 그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는 고정되어 있다. 바위를 산꼭대기로 옮기고, 정상에 다다른 후 굴러 떨어지기 시작하는 바위를 따라 내려가는 두 단계의 과정이 그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의 전부이다. 까뮈는 이 과정을 시지프가 스스로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상태와 '자각하고 있지 않은' 상태로 나누었다. 바위를 옮기는 동안 시지프에게는 시간도 장소도 무의미하다. 바위뿐만이 그의 관심을 차지한다. 즉 그는 자신에 대한 자각을 잃은 채 맹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좇아 내려가는 시지프에게는 이성적 자각이 발현된다. 이때 그는 '자각의 시간'을 거치며 그의 운명, 그리고 그가 처한 징벌보다 더 위대한 사고 과정을 거치게 된다.
바위라는 존재를 진정으로 마주할 때 시지프는 마침내 그의 운명을 비판적으로 저주하게 되고 그가 단지 '바위' 이상의 객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운명으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하는 과정, 즉 이성적 자각을 통해 운명의 효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까뮈가 말하는 시지프의 '부조리한 승리'는 행복이 부조리에 대한 발견과 자각에 후행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의 최상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늘 약간의 불안감을 동반한다. 행복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으며 부조리를 자각함으로써 우리는 깨어있게 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운명이 무한한 이상, 신은 의미를 잃게 된다는 까뮈의 말에 있다. 이는 우리가 논하고자 했던 유한성과 존재가치 사이의 관계성과 결부된다. 시지프는 그의 이성적 자각과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통해 그의 징벌과 인생에서 모든 신을 인간으로써 내쫓는다. 더 이상 운명은 신들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닌, 시지프 그 소유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으로 까뮈가 친절히 설명하고자 했던 표상되는 세계)에 의해 앞날이 무한히 결정지어졌다는(바위를 굴리는 것)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까뮈는 세계에 기투외어 운명이 결정지어진 불행한 인간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나름의 기쁨을 찾고 이성적 자각을 통해 삶과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화를 차용해 무한한 삶을 가정한 까뮈의 섬세한 비유는 현실 세계의 우리에게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던져 준다.
까뮈가 시지프를 행복하다고 명명하는 것, 그리고 그를 '부조리한 영웅'이라고 칭하는 것은 시지프가 그의 운명을 진정으로 소유함으로써 그 자신의 주인이 그뿐이 되고 곧 그에게 고행을 선고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유한성과 존재가치에 대한 고찰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에서도 등장한다. 책의 다소 충격적인 제목을 한번에 상정하는 질문은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에서 파생된다. 첫 페이지에서 쿤데라는 니체의 사상을 언급하며 이렇게 논지를 펼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람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9)
저자의 말을 '영원회귀를 따르지 않는 인생'에 대한 설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객체들은 곧 그 무게가 더없이 가볍기 때문에 참으로 덧없고 보잘것없다. 너무나도 미미하고 미약한 생이기에 가치를 따질 이유조차 부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한성의 무거움과 반대되는 유한성의 가벼움은 그가 뒤에서 소개하는 '프랑스 혁명의 자부심'과 '히틀러와의 화해'를 가능케 해 준다. 이들이 모두 유한하고 가벼우며 단 한 번만 반복된다고 가정하기에 우리는 이들을, 다르게 말하면 '아낄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번, 역겹같은 시간 속 하찮은 찰나에 불과하기에 우리는 전쟁의 부조리를 용서할 수 있고 프랑스 혁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히틀러조차도 용서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이를 한 번 다시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곳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10)
'정상참작'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사를 마치 미취학 아동의 악의 없는 실수처럼, 그리고 지나간 학창시절을 낭만주의자가 되어 추억하듯 결국 이성적 비판을 내려둔 채 그저 향수로써 바라보게 된다. 무한한 삶은 참으로 무의미하며, 반대로 그 때문에 나름의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논리를 소개한 이후 그래서 과연 무거움은 부정적이고 가벼움은 긍정적인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책을 시작하게 된다.
유한성과 무한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두 사상가가 공통적으로 주장했듯 만약 삶이 유한하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인간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부조리한 무한함 속에서도 삶의 가치를 발견한 까뮈의 신화 해석과, 삶의 유한함을 덧없게 볼 수 있도록 색다른 시각을 조명해주는 쿤데라식 삶의 접근법은 본질 너머의 시선을 깨닫게 해준다.
이는 삶의 의미 부여를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샤르트르식 가치 접근에서 한 발자국 뒤떨어진 결론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기투된 상태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하로 인간은 모두 존재함과 동시에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