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조합원의 위원장입니까? 노동자들의 위원장입니까?

책임의 경계에서 위원장이 서 있는 자리

by 기록하는노동자

최근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나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 하나를 받았다.

“당신은 조합원의 위원장입니까? 아니면 노동자들의 위원장입니까?”


공격적인 질문도 비판이 담긴 말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물음이었다.
그래서 더 깊이 박혔다.


순간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설명과 전제가 스쳐 지나갔다.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 조합비를 내는 사람들의 책임,
의사결정의 무게와 결과를 감당하는 문제.


그러나 실제로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생각보다 짧았다.

내가 내린 대답, 그리고 즉각적인 안도감

“처음에는 노동자들의 위원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조합원들의 위원장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였고 대화는 그쯤에서 자연스럽게 끝났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위원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조합원의 위원장이라는 말은 책임의 범위가 분명하다.
조합비를 내고 노조의 결정에 신뢰를 보내고
그 결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감당하는 사람들.


위원장은 그들에게 먼저 설명해야 하고 그들을 우선 책임져야 한다.

그 답을 하고 나오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화 이후 찾아온 부끄러움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따라붙었다.

부끄러웠다.


조합원의 위원장이라고 답한 것이 왜 이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답변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정답을 피해 간 느낌이 들었다.

조합원의 권익을 지킨다는 말의 무게

조합원의 권익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해 존재하고 위원장은 조합원의 선택과 위임으로 서 있는 자리다.


조합원이 감수해 온 비용과 불편, 갈등의 최전선에 서야 했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위원장 자리를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조합원의 권익을 우선 고려하는 판단은 회피가 아니라 책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이 하나의 경계로 작동하는 순간
노동조합은 스스로를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두게 된다.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

노동조합의 결정은 조합원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단체협약의 기준은 비조합원에게도 적용되고

현장의 관행은 노동자 전체의 일상이 된다.


노동조합이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 그 자리는 회사와 관리자의 판단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권익을 지키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어느 한쪽만 택하는 순간 노동조합은 본래의 역할에서 멀어진다.

왜 그날 나는 더 쉬운 답을 골랐는가?

그날 내가 ‘조합원의 위원장’이라고 답한 이유는 아마도 그 말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하기 쉽고 책임의 범위가 명확하고 당장의 논쟁을 만들지 않는 답.


그러나 위원장의 자리는 항상 안전한 답을 고르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은 불편한 질문을 대신 떠안기 위해 존재하고
위원장은 그 질문 앞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그날 느낀 부끄러움은 실수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내가 아직 그 역할에 완전히 다다르지 못했다는 자각이었다.

내가 지금 다시 세우는 기준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다시 붙잡고 싶다.

위원장은 조합원의 위원장이어야 한다.
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조합원의 권익을 지키는 결정이 노동자 전체의 기준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그 연결고리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설계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위원장의 역할이다.


완벽한 답은 없다.
모든 선택이 환영받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불편한 질문을 앞으로는 피하지 않기로 다.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

이번 글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남기는 기록이다.


위원장이란 자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 합리화로 기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경계에서 어떤 질문을 붙잡아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조합원의 위원장으로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는 일.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겠다는 다짐이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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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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