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의 기준으로 서고 두레의 힘으로 함께 짓는 일터
그동안 나는 노동조합을 이렇게 설명해 왔다.
“노동조합은 보험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임금이 깎였을 때, 부당한 인사평가를 받았을 때,
그때 꺼내 쓰는 안전장치.
이 설명은 한동안 꽤 설득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 3년이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노조 설립 이후 우리는 간담회 대신 공문을 받았고
대화 대신 법과 원칙을 들었고 교섭 대신 소송을 경험했다.
특별근로감독, 진정, 행정소송.
현장은 늘 긴장 속에 있었고 노동조합은 언제나 ‘사건 이후’에 등장했다.
그렇게 우리는 보험처럼 움직였다.
사고가 나면 출동하는 조직.
억울한 일이 생기면 나서는 조직.
문제가 터지면 방어하는 조직.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그렇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험이 된 이유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우리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환경이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대화가 닫혀 있던 시간.
조합원에 대한 불이익 논란.
교섭의 지연.
법적 다툼의 반복.
그 시간은 노동조합을 사후 대응 조직으로 굳혀버렸다.
조합원은 가입할 때 이렇게 묻는다.
“무슨 일이 생기면 보호해 주나요?”
노동조합은 그렇게 ‘위기 대비용’ 장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보험은 사고가 나야만 존재감이 생긴다.
사고가 없으면 늘 불필요해 보인다.
블라인드에 올라온 말들
블라인드에는 이런 말이 자주 올라왔다.
“노조가 뭘 해줬냐?”
“가만히 있어도 혜택은 적용되는데 왜 가입하냐.”
“노조 때문에 회사 분위기만 나빠진다.”
“회사 망하면 다 같이 끝나는 거 아니냐.”
어떤 글은 노조를 응원한다고 쓰면서도
“나는 가입할 수 없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회사가 나를 먹여 살린다”라고 믿는다.
그래서 노조의 문제제기를 회사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이 글들을 읽으며 화가 나기보다는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우리가 스스로를 보험으로 설명해 왔기 때문에
보험을 소비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워진 건 아닐까?
보험은 필요할 때만 찾는다.
평온한 시기에는 늘 불필요해 보인다.
향약, 공동체가 세운 기준
그래서 나는 다른 대안을 떠올렸다.
향약.
향약은 조선시대 마을 공동체가 만든 자치 규범이었다.
국가가 내려보낸 법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정한 약속.
향약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벌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공동의 규범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노동조합이 향약이 된다는 건 사건 이후에 대응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전에 기준을 세우는 조직이 된다는 뜻이다.
연장근로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연차는 누구의 권리인가?
평가는 어떤 기준이어야 공정한가?
복지는 비용인가? 조건인가?
이 기준을 노사가 함께 세우고 함께 점검하는 구조.
노동조합이 향약으로 자리 잡으면 회사는 노조를 ‘방해자’로 보지 않는다.
기준을 만드는 동반자로 보게 된다.
두레, 함께 짊어지는 힘
그러나 기준만으로는 부족하다.
두레는 농번기에 서로의 논을 돌아가며 일하던 공동노동 조직이었다.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함께 모였다.
두레의 힘은 강경함이 아니라 참여였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몇 사람이 대신 싸우는 조직이 아니라 각자가 조금씩 힘을 보태는 구조.
임금피크제 문제도 연장근로 문제도 복지 문제도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노동조합은 한계를 가진다.
앞에 선 몇 사람만 움직이면 회사는 계산을 끝낸다.
“감당 가능한 규모”라고.
하지만 함께 서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건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두레는 힘의 과시가 아니라 힘의 분산이다.
누군가에게 집중되지 않는 구조.
향약과 두레는 우열이 아니다
향약은 기준이다.
두레는 동력이다.
향약이 없으면 방향이 없고 두레가 없으면 힘이 없다.
노동조합은 보험을 버리고 향약으로 향약을 버리고 두레로 가는 게 아니다.
보험 역시 필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기준을 세우고 참여를 넓혀가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가?
3년이 넘는 갈등의 시간은 우리에게 방어의 기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방어만으로는 일터의 상식이 자라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보험에 머무르면 조합원은 소비자가 되고
비조합원은 무임승차자가 된다.
노동조합이 향약과 두레가 되면 조합원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비조합원도 스스로 선택을 고민하게 된다.
블라인드의 글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글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래서 더더욱 노동조합은 자신을 재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노동조합은 사고 이후에만 등장하는 장치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서로 약속을 맺었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일터의 공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보험이었고 그 시간은 필요했다.
이제는 향약의 기준으로 서고 두레의 힘으로 함께 짓는 조직이 되고자 한다.
회사도 노동조합도 이제는 방어를 넘어 기준과 참여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약속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이미 보호받고 있다.
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