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2025. 3.22., 서른한살의 기록
디즈니의 실사영화 "백설공주"로 떠들석한 가운데, 영화가 다양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생각하며 "공주와 개구리"를 다시 봤다.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다. 흑인 디즈니 공주라니.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고 해도 흑인 디즈니 공주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충격은 영화를 보면서 점차 감탄으로 바뀌었다. 열다섯살의 나는 가본 적 없는 뉴올리언스를 애정하게 되었고, 미국 남부의 문화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주인공 티아나의 어린시절 추억과 현재를 따라가며 그녀를 이해하고 응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16년만에 다시 본 "공주와 개구리"는 더 환상적인 영화였다. 그 자체가 재즈같은 영화다.
우리 모두 익히 잘 아는 동화의 내용에 예상할 수 없는 변주를 더해 비틀고, 그 변주가 전개되면서 "스윙"을 만들어낸다. 2D라는 단순한 악기로 리듬을 타며 등장인물들은 때로는 우당탕하기도 하고, 때로는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가장 작고 가장 낭만적인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두 개구리들의 데이트가 이토록 낭만적일 수 있다니!). "If I can mince, you can dance."라는 대사(아마도 올해 본 영화의 대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명대사가 될)는 이 영화의 메세지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얼마나 "스윙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다양성을 그려내는 태도는 어떨까? 티아나 이전에 포카혼타스(1995)와 뮬란(1998)을 통해 디즈니는 다양한 피부색깔의 공주들을 그려내고자 했다. 개인적으로 이 두 영화 모두 좋아하지만, 이 영화들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중국인의 문화를 제대로 알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우리가 보고싶은 것을 보기 위해 그들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공주와 개구리"는 다르다. 현관에 걸터앉아 이웃들과 나눠먹는 뜨끈한 검보수프의 맛, 창문마다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과 그 거리의 공기를 아는 사람이 이야기를 쓴 것같은 느낌이 든다. 피부색이나 국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배경을 갖고있는 "개인"을 그려냄으로써 그 개인에게 서사가 부여된다.
처음 흑인 인어공주가 등장했을 때(사실 디즈니 원작에서도 최초의 진저 공주이긴 하다.) 에어리얼이 자신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며 기뻐하던 흑인 아이의 인터뷰를 잊지 못한다. 피부나 머리카락 색이 어떻든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나와 닮은 영화 속 주인공을 보며 꿈을 꿀 권리는 있으므로 다양한 주인공들을 앞세우는 영화를 응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하고 포용력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영화가 다양성을 묘사할 때 등장인물을 피부색이나 국적으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 인물에게 마땅히 부여해야 할 서사와 개연성을 결여해놓고, 사회적 소외계층을 인물로 앞세웠으니 다양성에 기여한 영화라고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티아나를 응원하는 것은 그녀가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mince and dance 할 수 있는 "티아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