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월세를 전전하던 싱글 여성이 말하는 '내 집'
나의 서울 첫 월세집은 양재천 앞 원룸이었다.
적당한 수심에 잘 정돈된 도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양재천에서 나는 상경의 첫 설렘을 느꼈다. 이렇다 할 직업을 가져본 적 없던 20대 청춘의 시선이었기에 그 정도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하고 좌절하던 때 가끔 머리를 식히러 양재천으로 갔다. 그곳을 갈 때마다 나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기 시작했다. 복잡한 마음을 잊어보려 정처없이 양재천 산책로를 따라가다보면 아스팔트 도로가 어느새 나무테크로 바뀌었다. 하천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도 보였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하늘에 닿을 듯이 높게 세워진 건물들이 화려한 불빛을 내며 그 위용을 드러냈다. 단 5분여 만에 머리 위로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한집에 40~50억을 호가하는 아파트가 밀집한 부촌 옆으로 늘어선 구옥의 2층 원룸. 지금 생각하자면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지만 당시엔 서울 하늘 아래 마음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눈을 뜰 때부터 잠들때까지 구직을 위해 열심히 뛰었던 20대. 아직은 꿈으로 부풀어있던 청춘.
내 자취 로망은 오래지 않아 산산이 무너졌다. 첫해 겨울부터 곰팡이가 피어나기 시작해 온 천장을 뒤덮었고, 급기야 숨만 쉬어도 퀴퀴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팔팔한 청춘이니 건강이야 둘째 치고, 옷에 켜켜이 배긴 곰팡이 냄새가 환장할 노릇이었다. 예쁘고 화려한 치장을 즐기고 과시하고 싶었던 20대인데, 체취만으로 마치 내 생활수준을 인증해버리는 것 같았다.
이 불편한 냄새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때 스스로 움츠러든 나를 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아났다. 아마도 내가 앞으로 갈 수 있는 집이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란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외면했던 내 처지를 마주하니 그제야 집 없는 설움이 가슴을 탁 치고 나왔다.
유독 추웠던 그 겨울, 나는 양재천에서 처음으로 맞은편을 바라봤다. 반년을 넘게 수없이 오갔던 길이지만 그곳에 판자촌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 번도 알지 못했다. 왜 하필 그때 내 눈에 들어왔던건지. 사람 키보다 낮은 판잣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그곳에선 불빛 한 점 없는 적막함이 흘렀고, 이를 응시하던 내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과연 나도 벗어날 수 있을까?'
서울의 원룸살이는 양재에서 서초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고급빌라, 주택들을 마주 보는 반지하 투룸이었다. 환기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맞은편 빌라 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가 박탈감마저 들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빌라 주차장을 놔두고 매번 원룸 주차장에 차를 대며 철면피의 모습을 보이던 이름 모를 입주민들. 전면주차 표지판을 번번이 무시하며 남의 집 주차장을 떡하니 차지한 그들의 당당함, 돈에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싶었다.
환기는커녕 매번 흙먼지가 날려 창문을 막기에 급급했던 나는 아침마다 차량에 전면주차를 부탁하는 메모를 남겼지만 그들은 여전히 반지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그렇게 얌체 주차를 지속했다. 고급 세단에서 골프 가방을 꺼내어 웃는 부부의 모습을 반지하 창문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더랬다.
청춘이라서 더 아프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매달 월세를 밀리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고, 쥐꼬리만한 월급으론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빚만 늘었다. 지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남 물가에 허덕이는 내 사정을 짐작조차 못하던 엄마는 입버릇처럼 월급을 어디에 쓰냐고 채근하곤했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종잣돈 모으기란 내겐 너무 먼 이야기였다. 다들 차곡차곡 잘만 모아가던데 왜 나는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수년의 공시생 생활 끝에 공무원이 된 친구들, 대학원을 나와 정부사업에 뛰어든 전 직장 동료, 다양한 직업으로 돈벌이를 하는 대학 동기들의 모습에선 자신감만 보였다. 차근차근 인생의 단계를 밟아가는 것 같이 보이는 주변인들을 볼 수록 나는 자꾸 뒷걸음질만 치는 것 같아 두려움마저 들었다.
내 집이 없다는 건, 나의 본질을 흔들리게 하는 약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두 발 뻗고 누워 휴식을 만끽해야 할 집이 나의 삶을 위협할 때 생존의 문제로 직결된다. 모두가 내 집 하나를 위해 달리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나는 서른다섯살이 되어서야 첫 전셋집에 입성했다. 오랜 프리랜서 생활로 인해 전세대출이 녹록치 않았고, 학자금을 갚느라 남들보다 한참 뒤처진 뒤에야 진정한 독립을 한 것이다.
모든 살림이 들어오고 강이 보이는 거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매월 거액이 빠져나가는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것,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냈다는 것, 무엇보다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는 사실이 위로와 응원이 됐다.
나도 여느 청춘처럼 내 집 마련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 여전히 많은 의문부호가 달린다. ‘과연 혼자 해낼 수 있을까?’. 내 삶이 이 목표를 위해 지나친 희생은 하지 않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치지 않고 더 빠르게 나아가길 원하는 아이러니함이란. 내 집을 마련할 때 그토록 원하던 평안과 안정을 느낄 수 있을까. 내 미래는 여전히 안갯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