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짐
모두가 읽을 수 있는 브런치에 아들에게 남기는 글을 써온지 두 달이 되어가고 있어. 문득,
앞으로 계속 어떤 글을 써야 하지?
라는 질문에,
"아들이 훗날 이 글들을 보고 삶의 사유에 도움이 될만한 글"
이라고 생각해 보았어. 막연하게 시작한 브런치에의 글쓰기가 조금씩 구체화돼 가고 있지만 점점 어려워진다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남기는 글들이 십수 년 뒤에 아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가, 또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 '아빠는 이렇게 살아왔으니, 너도 이렇게 살아가렴.'이라는 프레임을 은연중 씌우는 것은 아닐지..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본인의 주장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아. 대신 아빠가 할아버지께, "현재, 저 어떤 상황입니다."라고 말씀드리면, "넌 최고야, 어디서 무얼 하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것이야. 대신 그 선택에 항시 후회가 없게 해."라고 항상 말씀해주신 것 같아.
그 격려가 매번 비슷해서, 언제부터서는 '또 뻔히 그런 대답류 이시겠지'라는 생각을 했어. 그래도 가끔은 그런 할아버지 대답을 듣고 싶어서 전화를 드리곤 한단다.
아빠의 박사 학위 논문 첫 페이지에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 원서 글귀를 인용한 문장이 있어.
"Freedom is the fundamental condition for any growth."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any growth'야. 사람이 심리적 또는 환경적으로 자유로운 상태가 되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뭐든 '성장'할 조건이 된다고 하는 것 같아. 앞으로도 이 맥락과 닿은 내용을 다른 글들을 쓰면서도 종종 언급할 것 같아.
(할아버지가 이 프롬의 책을 읽어보시진 않았겠지만) 아빠를 믿으셨기에 아빠가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던 것 같아. "이거 해라 저거 해라"가 아니라 "그래, 넌 잘할 거야, 대신 그것에 대한 후회는 없도록 최선을 다해라"라는 식으로.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자유'만을 제공하는 방법으론 지금의 아빠가 있기는 힘들었을 것 같아. 할아버지의 '무한한 신뢰' 덕분에 자신감을 갖고 무슨 일이든 기죽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생활할 수는 있었지만, 그 자유를 좀 더 체계적이고 도덕적, 상식적으로 짜임새 있게 활용하진 못했단다. 돌아보면, 오만방자한 행동과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일들도 많이 저질렀어. 다행히도(!) 우연히 시작한 7년 가까이의 대학원 생활 동안, 인내력과 솔직함, 인간 중심의 논리적 사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 지력 등을 훈련하면서 오만방자했던 아빠의 자유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컨트롤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키워온 것 같아. 이러한 자신감 또한 할아버지의 '무한한 신뢰'에서 비롯한 자유스러운 느낌일 때문일 거야.
이러한 경험들을 토대로 아들에 대한 교육을 극대화하는 데 있어서, 선결 조건은 '아빠가 먼저 행하고 있어야 한다'인 것 같아. 아빠가 부정한 돈과 행동에 마음이 흔들리면서 아들에게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할 순 없고, 아빠가 엄마 외의 여자에게 흔들리면서 아들에게 상식적인 사람이 되어라 할 수 없고,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무례하게 굴면서 아들더러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한다면, 이 글을 쓰면서도 아빠 스스로가 참 부끄러울 것 같아.
아빠의 글쓰기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이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고 고쳐보면서, '모범적인 아빠가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가 되고, 또 오픈된 공간에 써놓은 내용에 대한 신뢰성 유지를 위해 더 양심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 것 같아.
열역학에서 '엔트로피의 증가 = 무질서도의 증가'라고 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생각 없이 사용할 때는 저 공식대로 돼버리겠지만, 특별한 교육과 반성을 통해 생산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면 성취감과 보람, 뿌듯함과 같은 긍정적인 느낌을 안겨주는, '엔트로피의 감소'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아.
더디지만 꾸준히 수행하는 인문고전 독서로부터 깨달음을 하나씩 얻을 때마다 소소한 글들로 아들에게 남기도록 할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