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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HSonG Jul 04. 2024

일본의 실험 - UWF와 실전 프로레슬링

"타 유파와의 싸움" 이 주는 판타지. 그리고 구현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보통 우리가 "이노키즘". 즉 안토니오 이노키가 가졌던 "프로레슬링 최강론"에 대해서 나쁘게 보는 것이 대부분이긴 합니다. 실제로 이 이노키즘을 이유로 종합격투기 경기에 출전했던 (그리고 그 직전의 이른바 이종격투기 시절 포함) 프로레슬러들이 줄줄이 대패를 하고 돌아온 것 때문에 이노키즘은 "한낱 개똥철학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긴 합니다. 물론 그게 맞긴 하지만 그래도 이노키즘에서 한 가지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있었습니다. 바로 이노키의 "타 유파 간 시합"에서 이어지는 "실전파" 들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고, 이들이 현재 일본 종합격투기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이 "타 유파와의 싸움"에 대한 부분은 역사가 정말 오래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언급해야 하는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오오야마 마쓰다쓰". 바로 대산배달, 최영의의 이름은 나오게 될 거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오오야마 마쓰다쓰 (최영의)의 훈련 장면 (퍼블릭 도메인)

오오야마는 그 유명한 "입산수도"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서도 나오는 그 장면이 맞습니다) 당시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라는 책이라 했습니다. 일종의 병법서이기도 하지만 미야모토 무사시의 개인적인 철학이 담겨 있기도 하고, 검법에 대한 설명이 자세해서 일본 검도 쪽의 "필독서"라 불리는 책인데, 이때 미야모토 무사시의 "실전적이고 효율적인 전투"에서 오오야마는 기존에 배우던 가라테에서 "실전적이고 효율적인 것만 남기자"라는 의미의 개량을 하고 이것을 "극진" (교쿠진)이라고 부르면서 이 극진 가라테의 효율성과 실전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도장 깨기"에 들어갑니다.


물론 이 "도장 깨기" 문화가 단지 최영의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이라던가 일본에서도 "남의 문파 도장에 쳐들어가서" 결투를 벌이는 방식이 알음알음 있었기도 하고, 일본의 경우에는 아예 이것이 "영주 간의 전쟁" 이 다소 큰 단위의 도장 깨기라고 할 수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이런 부분의 연장선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시기 때 초기 유도가들이 실험적으로 "유권"이라고 해서 당시 비슷하게 일본에 들어온 복싱 선수들과의 실험적인 대련을 한 기록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영의의 이 "도장 깨기"는 뜬금없이 들어온 개념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 여러 번의 도장 깨기에서 (물론 '가라데 바보 일대'나 '바람의 파이터' 같은 최영의를 소재로 한 픽션에서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이기긴 하면서 "극진 가라테"는 하나의 유파로써 인정을 받고 나서, 오오야마 도장을 세워서 극진가라테의 제자들을 만들어 낸 후의 이야기였죠.


하지만 이후 이런 타 유파 간의 시합이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한참 후에 오오야마 마쓰다쓰는 오히려 제자들의 안전이나 기타 이유를 들어서 "타 유파와 시합을 하는 사람은 우리 극진회관에서 제명이야!"라고 방침을 바꾸었지만, 이미 최영의 스스로가 일본의 많은 무도가들에게 "판타지"를 주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알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1950년대였고, 공교롭게도 2차 대전 직후 미국에 온 한국인, 중국인, 일본계 사람들을 통해 이미 전파된 쿵후와 가라테, 그리고 유도와 초기 태권도 (이때는 수박도 내지 당수도라는 이름으로 도장이 세워진 때였습니다. 물론 후에 태권도 협회가 생기고 나서는 다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바뀌긴 합니다.)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이 중 몇몇 미국 사람들이 이것들 중 괜찮은 동작들을 섞어서 신종 무술을 만드니 이것이 그 "카쥬켄보"였습니다.


다행히 이 카쥬켄보는 없어지진 않았고, 하와이나 괌, LA 등에서는 수련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오야마는 여러 인맥을 쌓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안에는 프로레슬러였던 리키도잔 (역도산) 이 있었고, 유도가였던 기무라 마사히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무라 마사히코가 여러 이유로 생활고에 빠졌고, 그것을 안 오오야마 마쓰다쓰가 당시 인기가 있던 일본 프로레슬링 경기에 기무라를 출전시키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리키도잔에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전설의 드림팀(?)인 역도산-기무라의 태그팀이 만들어지는데, 가히 드림팀이라 불릴 만했습니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이미 이 전에 그 그레이시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를 상대로 팔을 골절 내며 승리를 했고 (이때 만들어진 기술이 바로 그 "기무라"입니다.) 그 이후에도 브라질의 발리투도 경기에도 나가 타 유파의 선수들을 상대로 경기를 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도산은 이미 스모 쪽에서 세키와케까지 올라갈 정도로 실력이 있었던 데다가 프로레슬링은 당시 각본이나 합대련 상태를 깨고 갑자기 벌어지는 "시멘트"라 하는 실전 상황에 대한 대처도 필요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도 상대를 완력으로 제압 가능했던 강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태그팀은 미국에서 온 "샤프 형제"를 상대로 쇼매치에서 이기면서 일본 사람들에게 "일본인들이 힘을 합쳐 귀축영미의 사내들을 이겼다!!"라는 이미지를 심어줬죠.


1951년의 엘리오 그레이시 : 기무라 마사히코의 경기 자료 영상

문제는 여기서 역도산과 기무라의 "자존심"이 문제가 됩니다. 역도산은 일단 여러 부분에서 기무라를 "자기 밑"으로 봤습니다. 일단 표면적으로 기무라는 자기 아내의 병시중도 하기 버거워할 정도로 "못 버는" 상황이 문제일 정도로 돈이 없었지만 역도산은 당시 엔화 가치를 가늠해도 상당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기무라를 "유도만 잘하지 돈 버는 재주는 없는 놈"으로 봤고, 기무라는 그런 리키도잔을 "실속은 없는데 돈만 많은 놈" 정도로 봤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오오야마 마쓰다쓰라는 완충적인 존재가 있긴 했지만 이 둘의 감정싸움은 오오야마가 설득으로 막을 수 있는 레벨은 아니었고, 바로 태그팀은 깨지고 바로 1954년 12월 22일. "역도산 VS 기무라 마사히코"의 경기가 성사됩니다. 원래 사료에서는 이것도 워크매치, 즉 합대련 형태였고, 무승부로 끝낸다 라는 단서가 하나 달려있긴 했다 합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벌어진 장면은... 충격적인 장면이었죠.


1954년 역도산:기무라 마사히코 경기 자료 영상

경기가 진행되고 몇 분 후 기무라 마사히코의 킥을 맞은 후 갑자기 역도산은 기무라를 세차게 가격했고, 기무라가 유도 기술로 반격할 새도 없이 바로 KO. 경기는 종료됩니다. 문제는 앞에서 말하다시피 리키도잔을 이것을 입회인들에게는 "무승부로 할 거다" 란 식으로 말을 흘린 게 문제가 되었는데, 이 입회인 안에 "오오야마 마쓰다쓰가 있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진의는 아직도 역도산이 사망한 지라 미스터리에 빠져있지만, 아무튼 입회인들을 속인 꼴이 되었고, 이거에 분개한 오오야마 마쓰다쓰는 경기 며칠 후 기자회견을 열어 "나 오오야마가 리키도잔과 도쿄에서 붙겠다. 그리고 정말 죽여버리겠다!"라는 엄포와 함께 도전장을 내지만 역도산은 이 도전장을 받지 않고 9년을 질질 끌다가 1963년 사망합니다.




다시 노키와 알리와의 경기 이후로 돌아와서, 이노키가 알리와 경기를 한 이후의 시기부터 일본 내의 격투가들은 일종의 "르네상스"를 맞게 됩니다. 이노키와 알리는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경기가 엉망이 되긴 했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복서도 레슬러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반대로 "이런 경우, 저런 경우를 다 놓아도 레슬러가 유리해!" 혹은 "그러면 발차기와 무릎-팔꿈치 공격이 자유로운 무에타이 선수들은 어떻죠?" 같은 논쟁이 벌어졌고, 이렇게 해서 2개의 바람이 불게 되는데 먼저는 노구치 오사무라는 복싱 프로모터가 "그러면 복서들과 가라테 선수들, 그리고 복서들과 태국 낙무아이 선수들과 경기를 해보죠!"라고 해서 1966년 "킥복싱"이라는 경기를 실험적으로 열었었는데 이노키-알리의 경기 이후인 1970년대 후반에는 아예 이것을 TV 중계 경기까지 편성하게 되었고, 그다음은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가 맛 들인 듯,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신일본 프로레슬링 쇼매치에 가끔 유도 선수나 복싱 선수를 초청해서 "스페셜 매치"라는 이름으로 프로레슬러들과의 경기를 몇 번 하면서 이런 호기심을 더 자극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진심을 가진 사람들이 몇 나왔으니 바로 "타이거 마스크"로 알려진 사야마 사토루, 그리고 마에다 아키라, 그리고 타카다 노부히코와 후지와라 요시아키입니다.


마에다 아키라:타카다 노부히코의 UWF 대련 경기 자료
사야마 사토루의 슈토 경기 자료

사야마 사토루는 프로레슬러로 활동 당시에는 "일본 최고의 루차도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날렵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공중기술이라던가, 스피드 한 경기 운영, 그리고 당시 인기 만화 <타이거 마스크>와 협업하여 낸 타이거 마스크의 캐릭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일본에서는 이미 스타 아닌 스타가 되어있었는데, 그런 그는 이노키의 "프로레슬링 최강론"에 굉장히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승 이노키가 그냥 "근거 없는" 프로레슬링 최강론을 내세웠다면 사야마는 "프로레슬링은 이래서 다른 유파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라는 근거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타이거 마스크를 스타로 띄워버린 다이너마이트 키드와의 1983년 쇼매치

그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1983 시즌 당시, 안토니오 이노키는 신일본 프로레슬링 외에도 각종 사업을 벌이는 것은 좋은데, 이게 너무 무리한 사업확장을 한 나머지 상당한 빚을 져 버립니다. 이것은 당시 이노키 도장 (현 신일본 도쿄 노게 도장)의 운영에도 차질을 빚어오고, 이때 신일본의 프런트를 맡고 있던 신마 히사시, 그리고 뭔가 새로운 실험을 해보고 싶었던 사야마 사토루, 그리고 그런 사야마 사토루가 데리고 왔던 마에다 아키라 등의 인원들이 "구조조정을 할 거면 우리 도장 새로 차립니다"라고 나가서 새로운 도장을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1984년에 세워진 "유니버설 레슬링 페더레이션 재팬" 즉 "UWF"였습니다. 이러면서 이들은 "쇼맨십적인 것을 없애고, 진짜 효율적인 것만 남기고 실전을 추구하는" 프로레슬링을 내세웠고, 이러면서 아예 경기에 "서브미션 공방" 그리고 "유효타 포인트" 라든가 "3 다운제"를 넣기 시작합니다. 더 웃지 못할 사실은 이런 UWF의 계획을 듣고 안토니오 이노키도 "첫 흥행 쇼매치엔 참여하겠다"라고 했지만.... 정작 첫 대회에는 나오지 않는 "노쇼"를 저질러 버립니다. 이것도 당시 신일본의 중계사인 아사히 TV와의 관계나 기타 여러 이유로 인한 노쇼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지만 이것도 안토니오 이노키가 세상을 떠나면서 영영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되어버렸죠.


초기 UWF의 경기 영상

그런데 이 UWF는 1985년 갑자기 "도산"이 되어 버립니다. 이 부분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먼저 사장이었던 우라타 노보루 사장이 "횡령 혐의"로 일본 경시청에 체포가 되어버린 것, 그리고 사야마 사토루와 마에다 아키라가 "실전형 프로레슬링"을 놓고 이견 차이를 보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야마 사토루는 좀 더 "격투기스러운 것"을 원했고, 마에다 아키라는 "그래도 흥미를 추구하는 것이 좋다"라는 방향을 내세웠는데, 이유 아닌 이유가 초기 UWF 영상 자료에도 나오지만 일단 "재미가 더럽게 없는 것" 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무에타이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킥복싱" 경기를 하게 된 것이 1966년 이후였고 이미 킥복싱이 1980년대 TV경기 중계가 될 정도로 대중화되었는데, 바로 이게 문제였습니다. UWF 경기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딱 이랬거든요.


"실전 지향의 프로레슬링. 그래 좋아요. 그런데 이게 킥복싱과 다른 게 뭐죠?"


네. 이 부분에 초기 UWF의 인원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여러 이유 때문에 UWF는 도산했고, 일단 여기서 사야마 사토루는 "진짜 격투기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하겠다면서 이탈, 그리고 이후 "수두"(修斗)라는 이름의 신종 무술을 만드는 데 이것의 일본어 발음이 "슈토"였고, 이것을 1985년에 첫 시연 후 1986년 경기를 시작하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슈토"가 만들어집니다. (물론 중간에 명칭이 잠깐 "슈팅"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후에 "Shooto"로 바뀝니다.)


사야마 사토루의 초기 "수두" 시연 영상

그리고 여기서 마에다 아키라는 “제휴단체 참여”라는 명목으로 다시 신일본 프로레슬링으로 복직합니다... 만 이유는 달랐습니다. "권토중래"를 위해서였는데, 일단 자기도 실전형 프로레슬링에 대한 실험은 하고 싶은데 돈은 없었으니 일단 신일본에 가서 다시 돈을 번 후에 다시 단체를 만들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일단 UWF의 상표권은 가진 채로 다시 신일본에 돌아왔고 이러면서 만들어진 각본이 "UWF군 침공작전" 각본이었습니다. 신일본 측도 이런 마에다의 계획을 모르지는 않았고, 이러다 보니 마에다 아키라를 약간 이지메 시키겠다는 상황에서 미국에서 데려온 임대 선수와의 경기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앙드레 더 자이언트" 였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전성기 시절의 앙드레 더 자이언트 (By John McKeon - Flickr, CC BY-SA 2.0 )

앙드레 더 자이언트, 그리고 일본에서는 중간의 “더”의 발음 문제로 인해 (일본어 발음으로 말하면 안드레-쟈-자이언트인데, 이 동일 발음 2번이 읽기 너무 힘들다는 이유였습니다.) 안드레 자이언트로 불렸던 그는 WWE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고의 거구이자, 이른바 “폴리스맨” 즉, 갑자기 실제 상황 (이른바 슛 상황이라 합니다) 발생 시 이 상황을 실전으로 수습이 가능했던 인물이었고, 한때 WWE가 스테로이드 파동이라는 사태로 회사 자체에 문제가 발생하자, 라이벌인 헐크 호건과 함께 신일본으로 잠시 임대되어 활동했던 때가 마에다가 신일본에 잠시 돌아와 있었던 1986 시즌 즈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토니오 이노키 포함 신일본 제작진과 수뇌부는 “각본 외의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마에다 아키라를 “견제” 할 필요도 있었고, 마에다 아키라도 초기 UWF 설립 당시 안토니오 이노키가 첫 쇼매치에 나가겠다고 말하고 노쇼를 했던 건을 잊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런 “자존심”의 충돌은 엄청난 돌발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쇼매치가 시작하고 몇 분이 안 되어, 이노키의 의도를 간파한 마에다 아키라는… 그대로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그대로 발로 찬 후에 연속으로 공격하여 “KO “를 내버립니다. 여태까지 안드레 더 자이언트를 ”슬램으로 들어서 “ 쓰러뜨리거나, 그냥 쳐서 쓰러뜨린 경우도 손에 꼽게 없었는데, 마에다 아키라는, 일부러 각본 합으로 넘어가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실전 격투 상황, 즉 시멘트 상황에서 그대로 앙드레를 쳐서 쓰러뜨린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제작진은 쇼매치를 집단 난입 형태로 중단시켰고, 앙드레 더 자이언트에게도 이른바 ”멘탈 붕괴“를 안겨주는 상황이 오게 되죠. 참고로 이때는 앙드레가 40대여서 전성기 때보다는 폼이 떨어져 있던 것도 감안해야 했지만, 그래도 완력 하나는 남아있던 앙드레가 하단 밸런스가 완벽하게 무너진 채로 레그킥 연타로 쓰러졌다는 것은 앙드레 본인에게도 충격이 컸다는 회고도 있습니다.


당시 경기 리뷰 영상 (https://youtu.be/oXnb-SoONgw)

이로 인해 마에다 아키라를 이지메 시키는 데 실패한 신일본 수뇌부, 이후에 마에다 아키라는 아예 노골적으로 “안토니오 이노키와 내가 그냥 실전으로 KO 될 때까지 하면 안 될까?”라고 도발을 했지만, 이노키는 일단 내빼면서 바로 “신일본 내전 각본”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신일본과 전일본을 오갔던 초슈 리키와의 각본을 만든 후 이후 “초슈 리키 VS 마에다 아키라“ 쇼매치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도 약간 ”파묻어 버리기 “ 성격이 짙었습니다. 왜냐면 초슈 리키 역시 실전 강자였거든요. 재일 교포로 한국 이름은 ”곽광웅“ 그리고 그는 이미 재일교포로써는 센슈대학 재학 당시 대한민국 민단에서 진행했었던 ”재일교포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에서 자유형 레슬링 분야에서 입상해 실제로 1972년 뮌헨 올림픽까지 다녀왔던, 레슬링 국가대표 출신의 전문 그래플러였고, 올림픽 레슬링 선수를 은퇴하자마자 바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했던 선수였죠.

초슈 리키, 현재는 은퇴 후 방송인으로 활동 중입니다.


문제는 이것 역시 마에다가 간파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마에다 아키라와 초슈 리키는 구면이었는데, 마에다 아키라도 “재일교포” 였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보통 1960년대 ~ 1980년대는 소설 <파친코>에서 언급되는 대로 재일교포가 상당한 “차별”을 받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재일교포는 고향만 같다면 나름의 “자이니치 게토”라고 하는 게토 커뮤니티화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 말 그대로 “한두 집 건너 아는” 사이의 상황이었는데, 이 둘은 처음에는 출신지가 달라서 (마에다는 오사카 출신, 초슈는 야마구치 출신이었는데 야마구치는 후쿠오카 옆입니다.) 면식이 없다가 신일본에 입문 후 안면을 트면서 알게 된 케이스였죠. 그러나 마에다 입장에선 일단 “이노키 이것이 또 애 하나 장기말로 삼는구나”라는 입장이었고, 이것을 정말 못 참은 마에다는 쇼매치 도중에… 초슈의 얼굴을 차버리게 됩니다.


당시 경기를 기록한 부틀렉, 3분 24초 시점에서 마에다가 각본을 깬 공격을 합니다. (https://youtu.be/gY-vaRYa37k)

경기는 몇 분을 더 진행했지만 이후 난장판이 되어버렸고, 마에다 아키라는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공격을 당했던 초슈는 “전치 4주의 안면 골절”을 당하면서 한 달 정도를 쉬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죠. 신일본 측에서는 회유책으로 “차라리 그러면 멕시코나 좀 갔다 오라”라고 했지만, 이미 돈을 적당히 모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미련이 없다 생각했는지, 마에다는 그냥 신일본을 나가버렸고, 이후 다시 인원들을 모아 다시 “UWF”를 만듭니다. 이것이 ”2차 UWF”라고 하고, 이것은 1990년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2차 UWF부터는 1차 UWF와는 뭔가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경기 양상이 지극하게 “실전적으로 “ 바뀌게 되는데요. 물론 이때도 합대련, 즉 ”워크 매치“ 로 치르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느 상황에서는 합대련 상황이 아닌 ”실전 상황“ 이 섞인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암바 와 니바 그리고 힐 훅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이때부터 "그래도 뭔가 킥복싱과는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집니다. 또한 결정적인 것은 “룰이란 게 드디어 정립”된 것입니다. 당시 UWF의 매치 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KO, 항복으로 승부를 가르며 한판 승부를 기본으로 한다.
- 다운의 제한은 5번, 5번 다운당할 시 TKO패를 적용한다.
- 로프브레이크 (로프 잡기, 로프터치) 3번 시 다운 1번으로 친다. (즉 15번 로프브레이크 제한)


그러나 이 UWF도 2년을 넘기지 못하게 됩니다. 일단은 원인은 크게 2개였습니다. 먼저는 역시 여기서는 경영진과의 갈등이 문제가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프로레슬링 계는 버블경제의 흐름을 타고 일본의 대기업이었던 “메가네슈퍼” 에서 “SWS”라는 프로레슬링 단체를 만듭니다. 그리고 소위 "돈으로" 선수들을 잔뜩 영입 하거나 프리랜서 초청을 하고는 했는데, UWF의 선수들이 이 프리랜서로 나가냐 마냐에 대해 갈등이 있었고, 이로써 발생하는 급여 차이 등의 금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은 2차 UWF에 온 신일본 출신 인원들, 즉 “후지와라구미” 가 문제였습니다. 후지와라 요시아키와 그의 동료인 후나키 마사카즈, 그리고 스즈키 미노루 등으로 구성된 후지와라구미 역시 신일본을 벗어나 “실전“을 추구하려 했는데, 이들이 정작 ”다른 방향성“ 을 꿈꾼 것입니다. 즉 현행 UWF 체제마저도 ”온전하지 않다 “라고 봤고, 좀 더 ”제한이 없는 룰“ 로 가기를 원했죠.


결국 이로 인한 문제들로 마에다 아키라는 “UWF를 해산하자”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후 나머지 인원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는데, 이때 타카다 노부히코가 “UWF의 상표권을 내가 가지고 가겠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상표권은 일단 가진 채 후진 양성을 하게 되죠. 이때를 “UWF-i”라고 합니다. ”UWF 인터내셔널“이라고 하고, 잠시 일종의 ”캐치레슬링 및 프로레슬링 도장“ 의 형태로 남습니다. 그리고 타카다는 후진양성을 하게 되는데, 그중에서 인재를 발굴하니 그것이 일본 MMA의 레전드, 사쿠라바 카즈시가 됩니다.


일본 MMA의 레전드이자 역사상 최고의 “그레이시 헌터” 로 불린 사쿠라바 카즈시, 그를 어떤 이들은 “UWF의 마지막 적자”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후지와라구미. 여기서 후나키 마사카즈와 스즈키 미노루가 “Hybrid Wrestling”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옵니다. 프로레슬링이라기엔 다소 실전적이지만, 그렇다고 고전적인 자유형 레슬링이나 캐치레슬링보단 타격이 많은, 그러나 그래도 ”레슬링“ 이기 때문에 주먹 타격이 아닌 장타(손바닥으로 치기) 나 손날 공격만을 허용한, 방식을 제창했고, 그 개념을 실제로 옮기기 위해 단체를 따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판크라스“ 였지요.


1993년 초기 판크라스 경기, 현재도 판크라스는 MMA 단체로 운영 중입니다.


그리고 이미 슈토를 만들었던 사야마 사토루는 슈토에 아예 “무제한 룰“ 을 도입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게 브라질의 발리투도와 워낙 비슷했던 터라. 아예 1994년부터 남미 쪽이나 유럽 쪽의 선수들을 초청해서 경기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슈토의 대표 토너먼트였던 <발리투도 재팬> 이 됩니다.


1994년 열렸던 VTJ 1회 경기 영상 (https://youtu.be/Hv8PUayb1E4)

그리고 마에다 아키라는 여태까지 했던 실험을 모아서 <Rings>라는 단체를 만듭니다. 처음에는 2차 UWF 당시의 룰과 비슷했으나 몇 번의 룰 개량을 거쳐서 슈토 급의 무제한 룰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의 ”종합격투가 가능한 “ 대회가 되었습니다.


1993년 초기 링스 경기 영상 (https://youtu.be/LhGG7REEmBA)

이런 역사적인 흐름으로 인해 아시아 쪽에서 MMA의 종주국은 아이러니하게 “일본” 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이것은 버블경제의 영향도 컸습니다. 물론 버블경제 자체는 1991년~1992년 경에 붕괴되어 버리긴 했지만 이때의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에서 다양한 토건 사업을 했었고 여기에는 “돔 구장” 내지는 “아레나 급 경기장” 건설이 컸습니다. 원래 이전까지는 복싱이나 유도, 스모등의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 무도관 (닛폰 부도칸), 아니면 일본 양국국기관 (료고쿠 국기관) 등의 전후 내지 올림픽 시기 지은 경기장에서 했었습니다. 그것도 안되면 그거보다 조금 작은 아레나(?)인 후락원 경기장 (고라쿠엔 경기장)을 쓰거나 해야 했지요. 그러나 특히 1980년대 말 프로복싱 경기가 규모가 커지고 라스베이거스 MGM 아레나 내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경기장에서 경기를 경험한 일본의 프로복서들이 알음알음 나오면서, 일본 내에서도 ”미국 등에서 하는 프로복싱급 경기를 일본에서 개최하려면 경기장이 적어도 ‘부도칸보다는’ 커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이 나오며 “격투기 경기를 크게 할 수 있는 경기장” 건설에 착수합니다. 일단 야구도 MLB의 영향을 받아 “우천 시에도 야구 경기를 할 수 있는 돔구장”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러면서 공사를 시작하여 2개의 경기장이 만들어지는데, 바로 이게 1988년에 개장했던 “도쿄 돔” 그리고 1989년에 개장한 “마쿠하리 멧세 아레나“ 였습니다.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는 2000년에 완공했기 때문에 그다음 세대 경기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쿠하리 멧세 아레나는 당시 격투 경기보다는 다른 종목으로 경기를 많이 하게 되었고, NPB의 리그 특성상 홈 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경기를 하지 않는 날” 이 많았으므로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부는 도쿄돔, 일부는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경기를 나눠서 치렀습니다.) 비는 날이 많았고, NPB의 비시즌이었던 늦가을 ~ 초봄까지는 도쿄 돔도 수익사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때를 활용해 프로레슬링과 격투기 경기, 프로복싱 경기를 유치하면서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가 2000년 완공하기 전까지 도쿄 돔은 “일본 격투기의 새로운 홈 경기장” 으로 불리게 됩니다. 물론 유도, 검도는 여러 특성상 부도칸을 쓰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적어도 “부도칸보다는 관객이 많아야 한다” 싶으면 냅다 도쿄 돔에서 경기를 하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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