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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HSonG Jul 11. 2024

브라질리언 주짓수, 북미로 침공하다 (UFC 01)

“Vale Tudo “가 브라질 바깥으로 나간 순간. 1993년.

이제 위치는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그리고 1990년 초로 다시 시계를 돌려봅니다. MMA계가 가장 특별하게 보는 날이 바로 1993년 11월 12일이었습니다. 바로 세계 격투 경기 역사에 유례없는 이벤트를 치렀던 날이었던 것이지요. 바로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쉽“ UFC 01 대회가 열렸던 때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 UFC 1회 대회 하이라이트 (TKO그룹 UFC 공식 유튜브 영상)


그리고 이 대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표면적인 이유였던 “그레이시 주짓수의 저변 확대” 와 함께 같이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1990년 시즌까지의 모든 격투 종목들의 이야기도 같이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드디어 이번 칼럼에서 “문단 나누기”를 좀 많이 하는 때가 올 거 같습니다.


- 1992 시즌까지, 복싱 그리고 레슬링, 기타 등등


일단 UFC 01 대회가 생기게 된 배경 아닌 배경을 먼저 이야기를 해야 왜 그레이시 가문의 “호리온 그레이시”가 몇몇 주최자들을 모아서 이 대회를 만들려 했는지가 좀 더 설명이 쉽습니다. 그냥 여태까지 언론들에게 알려져 있는 “그레이시 주짓수의 보급이나 홍보 목적의 대회“라고 퉁치기에는 대회 개최 과정에서 ”초청 선수“에 대한 잡음들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1회 대회는 참가 선수들을 직접 신청받거나 몇몇 프로모터들의 추천으로 초청받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그레이시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북미의 당시 상황을 한번 봐야 할 거 같습니다. 1993 시즌의 전년이었던 1992 시즌은, 모두가 알다시피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있던 시즌이었습니다.


1992년 올림픽 당시 복싱 금메달이었던 오스카 델 라 호야. 멕시코 출신이었지만 당시 미국 대표팀으로 출전합니다.
SBS 레슬링 해설위원인 박장순 해설위원의 현역시절, 바르셀로나 올림픽 결승전 장면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처음으로 “냉전 붕괴 후” 치러진 첫 올림픽이었습니다. 즉 1948년 런던 올림픽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 까지는 소위 “전후 시기와 냉전 시대” 였기 때문에 군데군데 소위 “불참국” 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때 올림픽에서 자주 나오던 단어가 아이러니하게도 “보이콧”이었을 정도로 국제적 이해관계나 특정 사건에 의해 보이콧 선언을 하며 출전하지 않는 국가들이 왕왕 나왔습니다. 또한 체육 인프라의 문제 때문에 “제3세계”로 분류되는 국가들의 출전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1년, 소련이 붕괴되어 냉전이 끝나면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냉전 붕괴 후 경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동구권을 살리려는 UN의 경제 계획과 함께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체육 발전이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같이 진행된 것이 “종목 확대” 그리고 “기존 종목의 출전 선수 확대” 였는데, 이러면서 투기종목들은 일종의 “대격변” 이 일어납니다.


제일 큰 격변이 일단 “북한, 쿠바를 포함한 옛 소련 소속권 국가의 별도 국가 출전”이었고, 그다음이 바로 “유도 종목에 드디어 남녀 동시 출전” 이 가능해졌으며 “레슬링과 복싱에는 출전 체급이 늘어나는” 조치가 시행됩니다. 유도는 1972년 정식종목 채택 이후에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는 “남자 종목” 만 있어서 종주국인 일본 마저도 메달을 많이 따기가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여자 종목의 시행은 유도가 “학교 체육 및 생활 체육화” 되어 있던 일본에게 있어선 그나마 메달을 더 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숨겨진 격변은 바로 드디어 ”태권도가 종목 진입 논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태권도는 물론 1988년 시범종목으로 도입이 되고는 했지만 ”정식 종목 진입“은 당시 논의가 애매했던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서울 올림픽이 대흥행 “ 하면서 한국의 IOC 내 입지가 커진 덕에 태권도를 한번 더 시범 종목으로 채택해 보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유럽 쪽 한정으로 태권도 보급이 빨랐던 곳이 스페인이었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태권도 용품 업체인 “대도”는 1983년 스페인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세운 회사였습니다.) 이런 ”태권도 해외 보급사“ 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좋을 거 같지만 이것도 장편기획이 될 거 같아서 이건 당장은 안 하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래서 태권도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번 더 “시범 종목”으로 시행이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통적인 투기종목의 강국들이었던 영국과 미국에게는 다소 “폭탄”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복싱은 쿠바가 올림픽 출전을 한 이후로 미국이 “굴욕”이라고 말할 정도로 쿠바에게 메달을 뺏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업적(?) 아닌 업적이 쿠바의 “체육 활성”이었는데 이것으로 수혜를 크게 본 종목이 야구와 복싱이었기 때문입니다. 쿠바는 카리브 국가권이라서 야구가 이미 반쯤 국기같이 퍼져 있었고, 근처 국가였던 멕시코와 미국의 영향으로 복싱도 퍼져있었는데, 이게 쿠바 공산당의 집단적이고 집중적인 정책집중을 하면서 실력이 갑자기 급상향 해버린 것이 컸습니다. 게다가 레슬링은 당시 러시아(당시 소련)의 먼치킨 레슬러 “알렉산더 카렐린” 의 등장으로 한동안은 “소련을 이길 적수가 레슬링에선 없다” 소리가 나올 정도였지요. 이러면서 영국과 미국은 진짜 울며 겨자 먹기로 “귀화선수 영입”에 사력을 다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대표적으로 멕시코 출신이었던 오스카 델 라 호야가 “미국 대표팀”으로 출전한 것입니다. 재밌게도 이것은 냉전 당시 IOC의 출전 규정을 오히려 미국이 역이용했는데, 냉전 때는 오히려 소련 시절의 러시아가 “러시아 내에서는 인재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소련 내의 타 소비에트 (특히 현재 키르기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 지역에서 사람 데려와서 “USSR 대표팀” 으로 출전시켰던 전례가 있는데, IOC의 규정상 “속인주의” 즉 출신지가 아니라 “국적주의” 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망명을 하거나, 이민을 해도 “거주지 국적으로 출전이 가능하면”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렐린의 “패배”에 대한 것은 서프라이즈에서 재연극화로 다룰 정도로 “이례적인 이야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러고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의 투기종목들 (태권도는 시범종목이었으므로 유도, 레슬링, 권투만 기준으로 놓고 보면) 성적을 보면 더 묘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레슬링에서는 북한이 48Kg급 자유형과 52Kg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따지 않나 (김일옹,이학선) 한국이 74Kg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따지 않나 (박장순) 소련이 없어지더니 그 사이를 메꿔버린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선수들까지... (물론 유고연방이 없어지면서 IOC 기록에는 “무국적” 으로 표기가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미국은 반쯤 "우물 안 개구리" 취급이었죠.

유도에서는 그나마 일본이 선전을 하긴 했지만, 쿠바가 유도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올리다스 히메네즈, 여자 미들급) 한국이 일본을 이기고 금메달을 따는 (김미정, 여자 하프 헤비급) 상황이 벌어졌으며, 복싱은 그래도 미국 대표 오스카 델 라 호야의 활약으로 미국이 금메달을 하나 따내긴 했지만, 쿠바 대표팀의 메달 싹쓸이를 막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고, 북한 마저도 금메달을 복싱에서 따내는 (최철수, 남성 플라이급) 미국 입장에서는 “굴욕 그 자체”인 결과를 당했죠. (그나마 통일 독일이 금메달 2개, 아일랜드가 금메달 1개를 가져가긴 했지만 그래도 쿠바가 너무 압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1992년의 여름이 지나가자, 미국과 영국 복싱계는 “올림픽은 반쯤 포기한다”라는 입장을 내버립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쿠바가 강했던 것은 여전했으나 그때는 “북한이 출전하지 않았던 것” 이 그나마 좀 일종의 “희망회로”를 돌릴 수 있을 거 같았는데, 1992년이 되자마자 북한 마저도 금메달을 따버리는 상황에서 “쿠바와 북한에게 굴욕을 당하느니 그냥 프로복싱에 집중하자”라는 상황으로 가버립니다. 이러면서 미국과 영국은 거의 프로복싱에 몰빵을 해버리는데, 왜냐면 올림픽에서는 다소 제약이 있는 규정이 프로복싱에는 없거나 완화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선 미국이 정말 ”각종 방법“을 써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습니다. 무하마드 알리 이후의 프로 복싱 쪽은 이런 부분을 잘 활용했고, 이쪽은 미국인과 영국인 챔피언들이 주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 프로복싱이 주류이던 미국에도 있던 빈틈, 그래플링


그런데 이 프로복싱이 주류이던 미국 격투계에도 "빈틈" 이 존재했습니다. 차라리 태권도는 상황이 나았습니다. 그나마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등에서 충분히 보급되어 뿌리를 내린 태권도는 이미 각 국에서 "세계선수권을 위한 국가대표팀"을 꾸릴 수는 있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무에타이와 킥복싱도 나았습니다. 이미 북미 쪽의 무에타이 수련자 중에서는 룸피니나 라차담넌에서 경기를 할 수 있는 급의 선수들도 나왔습니다. 게다가 1992년 경, 가라테 계에서 엄청난 발표를 하였죠. "가라테뿐만 아니라, 킥복싱, 권법, 무에타이, 쿵후, 태권도 등의 어떠한 선수들도 나갈 수 있는 입식 격투 경기 대회"를 정도회관에서 개최하겠다고 발표를 했고, 바로 그다음 해에 8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10만 달러의 우승상금이 걸린 토너먼트를 했고, 이게 성공하여 계속 진행되었으니 이게 바로 "K-1 월드 그랑프리"의 시작이었습니다.


비록 빛은 바랬지만 K-1 시기 압도적이란 평을 받았던 것은 역시 최홍만이었던 건 맞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래플링"이었습니다. 유도는 여전히 일본에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모두 다 유리했고, 애초에 이건 북미쪽이 메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레슬링을 "프로화" 하기엔, 세계레슬링연합(UWW)과 IOC의 입김이 너무 강했습니다. (세계레슬링연합은 1912년에 세워졌고 이 역사는 현대 올림픽과 역사를 거의 같이 합니다.) 이미 한참 전에 IOC와는 독립하여 체계화가 된 프로복싱과는 다르게, 레슬링은 국제 협회연맹이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IOC와 거의 붙어서 체계화가 되어버린 나머지, 북미는 NCAA-팬아메리카게임-올림픽이라는 이 "테크트리"가 너무 굳어졌으며, 그 수도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것이 컸습니다. (미국에서는 학생 때부터 레슬링을 체육과목으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이 포화상태에서 도태되어 버리는 선수도 나왔습니다. 그나마 조금 다행이었던 것은 여기서 그래도 좀 운동신경이 남아있다 하면 여러 운동을 체육시간에 하는 미국 특성상 미식축구로 간다거나, 역도로 간다거나, 복싱으로 간다거나, 기타 종목으로 간다거나 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애매하면 프로레슬링 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올림픽을 못 나가면" 레슬링이라는 운동으로 한우물을 판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 "브라질리언 주짓수"였습니다. 남미에서는 브라질리언 주짓수 혹은 루타 리브레로 1980년대 까지도 발리투도 경기를 하면서 먹고살았던 "프로 그래플러" 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레이시 가문도 "그레이시 주짓수" 도장으로 계속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으며, 역시 초기 마에다에게 유술을 배웠던 사람이었던 루이즈 프랑카, 그리고 프랑가의 제자인 오스왈도 파다의 "프랑카-파다 주짓수" 도장도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리우의 발리투도 경기, 혹은 상대의 도장에서 벌이는 도장 깨기를 하고 있었고, 또 일부는 외국으로 나가서 일본의 가라테 선수들, 태국의 낙무아이들과 경기를 하기도 했고, 이걸 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84년, 그레이시 도장에서 브라질에서 특이한 발리투도 경기를 한번 엽니다. "주짓수 VS 격투기"라는 이름의 경기였는데, 1차적으로는 브라질 내에서 그레이시 주짓수 도장의 홍보용 경기이기도 했지만, 여태까지 그냥 1:1로 하던 방식이 아닌 "그레이시 도장에서 길러낸 주짓떼로 4명"과 브라질 포함 외국에서 받은 격투가 참가자 4명의 "팀배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기는 후에 UFC의 레전드가 되는 마르코 후아스, 레이 줄루도 경기를 뛰었는데, 재밌는 것은 이때 "그레이시 도장이 전승으로 이기질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레이시 도장 선수들이 4번의 팀배틀 중 2승밖에 하질 못했는데, 오히려 그레이시 도장은 실망하기는커녕 이런 결론을 냅니다.


"아.... 신기한데? 이거 브라질 밖에서 한번 더 해보자!"


그러면서 그레이시 가문, 그리고 그중에서 (엘리오의 아들인) 호리온 그레이시와 힉슨 그레이시가 "이 재밌는 걸 브라질 밖에서 해보기로" 합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선 자금을 모아야 했는데, 그 방법은 역시 "브라질리언 주짓수 교본 및 홍보 비디오 등을 만들어서 미국과 캐나다에 팔자!"였습니다. 1980년대 말~1990년대는 VHS 비디오 기기가 미국과 캐나다에 충분히 보급이 되어 있었고 (물론 소니에서 내놓은 베타맥스라는 사파(?)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홍보를 하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엘리오의 형제인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후진 양성을 다소 많이 했고, 그 제자들 중 일부가 "그레이시 주짓수 스쿨"이라 하여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 도장을 차린 곳이 있었고 (물론 히스패닉이 많이 사는 곳에 차리긴 했습니다. 1970~80년대는 흑인만큼이나 히스패닉들도 차별을 엄청 당했던 곳이 북미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일종의 "유통 거점" 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카를로스의 아들인 칼슨 그레이시가 일종의 유통책(?)이 돼주었는데, 이 가족들의 의기투합으로 이들은 1985년 경부터 그레이시 주짓수의 영상 교본 및 "도장 깨기" 모음집 영상이라 하는 <그레이시 액션즈>라는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일단 그래도 장사 수완은 좋았는지, 90년대 초까지 이 비디오는 꽤 잘 팔렸다고 합니다. (물론 주짓수의 몇몇 동작은 홈트레이닝 동작으로 하기 좋은 동작이 있긴 합니다.)


- 미국에서 "발리 투도"라는 것을 해보자


이렇게 하여 일단 "자금"은 확보한 호리온 그레이시, 그런데 문제는 "장소"였습니다. 그래플링계가 겪은 장벽 중 하나가 바로 이 "장소 확보"에 있어서 이미 입지가 탄탄했던 프로복싱계와 무에타이 포함 킥복싱계를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 컸습니다. 당연히 이들의 마음은 미국은 당연하고, 미국에서도 프로복싱의 성지라 불리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혹은 라스베이거스 MGM 아레나 이런 데를 바랐겠지만.... 역시 프로복싱계의 텃세는 엄청나게 체감했고, 뭔가 좌절하던 찰나, 호리온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호리온 그레이시에게 취미 운동으로 주짓수를 배웠던 광고 제작자 아트 데이비라는 사람이 브라질의 "발리 투도" 영상을 접했습니다. 남미에서 하는 다소 겉으로는 야만적이지만 뭔가 체계가 있어 보였던 격투기 경기를 보고 호기심을 가졌고, 데이비가 알고 있던 브라질 사람이 호리온 그레이시였기 때문에 그가 호리온에게 "발리 투도가 뭡니까?"라고 물어보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죠.


"Vale Tudo, 뭐든지 가능하다는 브라질 말이고, 규칙이 없이 그냥 승패만 있는 격투기 경기죠"


이것에 "띠용" 했던 아트 데이비는 호리온이 "이걸 미국에서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열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듣고, 업계 사람들을 수소문합니다. 이 계획을 알렸을 때 놀랍게도 격투기 팬이기도 했던 영화 각본가 존 밀리어스가 "브라질에서 한다는 발리 투도를 미국에서 하겠다고요? 재밌겠다" 해서 합류를 합니다. 비슷한 시기 공연 및 프로복싱 PPV 기획업체였던 "세마포어" 사의 공동대표였던 밥 메이로위츠와 데이비드 아이작도 기존의 프로복싱 PPV 시장이 뭔가 "포화상태"라는 생각이 들어 신사업 발굴에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때 데이비드 아이작이 "브라질에서 하는 발리투도 경기를 미국에서 열겠다는 사람"의 소식을 듣고 바로 호리온 그레이시를 찾아갑니다. "이거구나!!!" 싶었던 데이비드는 바로 메이로위츠에게 연락을 했고, 세마포어 엔터테인먼트 사는 프로복싱 PPV 기획을 했던 회사였기 때문에 프로복싱 프로모터들의 "텃세"를 어느 정도 틀어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첫 번째 대회는 "실험적" 이기 때문에 굳이 큰 아레나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들의 의견을 호리온이 받아들여 첫 번째 대회는 다소 작은 경기장에서 치르기로 했고, 그리하여 콜로라도 덴버의 8000석 규모의 맥니콜스 스포츠 아레나에서 경기를 하기로 합니다.


자, 돈도 모였고, 추진위원회도 결성되었고, 대회 장소도 결정되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단 처음에는 16명을 초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초청을 하려고 몇몇 격투기 선수들이나 무술 수련자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돌아온 답변은 이랬습니다.


"네? 급소공격도 되고, 깨물기도 되고 박치기도 되는 격투 경기라고요? 사람 죽을 일 있어요?!!!"


발리 투도의 "장점" 이자 "단점"이었던 이 "규칙 없음" 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청장을 보냈던 선수들은 족족 "못 나가겠다"라는 답변을 보내옵니다. 이 중에는 미국에 태권도를 전파했었던 조희일 사범도 있었다는데 이때 조희일 선생은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쉽에 나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라는 이유로 거절하셨다 합니다. 물론 1993년 당시 이미 중년의 나이셔서 "체급 제한 없음, 나이제한 없음" 이란 경기에는 나가시기엔 무리가 있었죠.


게다가 처음 이 초청장을 보냈던 것이 1993년 4월 10일 "K-1 월드 그랑프리" 1회 대회에 참여했던 선수들과 다소 중복이 있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이때 나갔던 선수들 중 UFC 01의 초청장을 받았던 선수들은 피터 아츠, 어네스트 후스트, 사타케 마사아키였는데, 이들은 입식 격투 위주로 활동했던 마당에서 굳이 "그래플러"들도 섞인 경기를 나가는 것에 다소 거부감을 가지는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K-1은 일본에서 열렸던 대회였고, 이미 그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판크라스 1회 대회"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이미 입식 격투가들이 몇 명 참가해 보고 내린 결론이 "가라테, 킥복싱도 그래플러에게 킥캐치를 당하거나 돌진을 피해서 태클 후 테이크다운이 들어갈 시 막을 방도가 없었다"라는 것이었죠. 결국 그리하여 이 선수들은 초청장을 받지 않습니다.


위기에 빠진 UFC 01 대회 추진위원회. 결국 그래서 당초 계획에서 조정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확정된 것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토너먼트는 8강부터 진행하며, 체급제한 없음, 나이제한 없음은 초기에서 유지
- 반칙 기술은 눈 찌르기, 깨물기, 고간 공격 금지로 제한하며, 사용 시 증정 참가비에서 1500달러를 벌금으로 차감한다.
- 예비 참가자를 추가로 받으며, 토너먼트 참가자가 경기 당일 이탈하거나, 전날 불참의사 표시 시 "추가 참가자 결정전"을 진행한다.

이렇게 "발전된 안이 나오고" 다시 초청자를 받으니 그래도 참가자가 제법 모였습니다. 초청자를 넘어서 "내가 남과 맨주먹싸움에도 자신이 있다!" 하는 사람을 따로 "예비 참가자"로 신청을 받았고, 그렇게 하여서 나왔던 선수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라드 고르도 / 테일라 툴리 / 켄 섐락 / 호이스 그레이시 / 케빈 로지어 / 아트 짐머슨 / 제인 프레이저 / 패트릭 스미스

- 예비 참가자 : 트렌트 젠킨스 / 제이슨 델루시아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때는 "다양한 무술이 겨루는 토너먼트"를 내세우고 싶었는지, 이들의 뒤에 따로 "무술 이름" 이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밝혀진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뒤에 달린 무술을 수련하지 않은" 선수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중 제이슨 델루시아는 실제로 "소림권 권법" (미국에서는 샤오린 켄포) 도장에 다닌 적이 있고 후에 UFC 2회 대회에서도 "켄포 선수"로 나가긴 했긴 합니다. 패트릭 스미스의 경우도 "태권도 3단"이었던 것은 맞지만 당시에는 "킥복싱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경기 중계에서도 "저게 뭐가 태권도죠?"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냥 킥복싱 기술만 써서 경기를 했었을 정도로 "구색 맞추기"가 강했습니다. 제라드 고르도도 "어린 시절에 사바테를 배웠던 것"은 맞지만 이미 당시엔 극진회관 소속의 가라테카였으며, 오히려 커리어상으로는 극진공수도 대회 우승이 많은 가라테 선수였지만, 그냥 사바테 수련자로 자막이 나갔다는 것이 개그 포인트였죠.


초기 UFC 개최자 및 출전 선수들의 회고영상 (FOX스포츠 공식 유튜브)

그런데 오히려 이런 "얼렁뚱땅한" 요소는 UFC 01회 대회를 "흥행"하게 하는 데 큰 요소가 됩니다. 특히 이 중 아트 짐머슨은 복싱 선수로 나갔는데, 물론 커리어는 초기에만 반짝하고 이후 기량이 하략해서 이미 반쯤 은퇴한 프로복서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프로복싱계에서 딱히 제재를 하지 않아 UFC 01 대회에 나갔는데, 1차전 상대를 "그레이시 가문에서 보낸" 호이스 그레이시라는 지뢰급 대진을 만난 와중에 "아 무규칙이라 했지 이거?"라고 하여 복싱 글러브의 한 손을 빼 던져서 경기를 하는 "하이브리드" 스러운 경기를 보이면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또한 반칙 기술마저도 "아 어차피 후에 참가비 받을 때 깐대매"라는 규정 조항을 이용해서 그냥 토너먼트 내에서 받는 돈이 깎여도 좋으니 그냥 어떻게든 쓰러뜨리고 보자 라는 마인드로 대놓고 고간 공격, 대놓고 깨물기 공격 등이 난무했고, 박치기 공격 (버팅) 은 당시 반칙이 아니어서 냅다 버팅부터 하고 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추가 참가자 결정전 - 트렌트 젠킨스 : 제이슨 델루시아 → 델루시아 승 (52초, 서브미션)

1회전 (8강)

제라드 고르도 : 테일라 툴리 → 제라드 고르도 TKO승 (26초, 정규경기 첫 최단시간 경기)
케빈 로지어 : 제인 프레이저 → 케빈 로지어 TKO승 (4분 20초)
켄 섐락 : 패트릭 스미스 → 켄 섐락 서브미션 승 (1분 49초)
호이스 그레이시 : 아트 짐머슨 → 호이스 그레이시 서브미션 승 (2분 18초)

2회전 (4강)

제라드 고르도 : 케빈 로지어  → 제라드 고르도 TKO승 (59초)
호이스 그레이시 : 켄 섐락 → 호이스 그레이시 서브미션 승 (57초)

결승전 - 제라드 고르도 : 호이스 그레이시 → 호이스 그레이시 서브미션 승 (1분 44초)


이렇게 하여서 "호이스 그레이시"가 첫 UFC의 우승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다소 감안하셔야 하는 것은 "호이스 그레이시는 도복을 입은 채로" 우승을 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 규정에 지금 MMA 같은 복장의 규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호이스 그레이시와 켄 섐락의 4강전은 지금의 경우엔 "호이스가 반칙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나와야 할 정도로 처음에 초크 그립은 섐락이 문제없이 막았지만 두 번째 그립에서 이걸 도복 소맷깃으로 한번 더 잡아 묶어서 항복선언을 받아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섐락은 UFC 이전에 일본 판크라스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판크라스는 이미 당시 복장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트렁크, 파울컵, 링 부츠만 허용한다) 이런 규정적인 부분에서 엄격했던 섐락은 그래서 다른 선수들이 도복을 입고 경기를 한다거나 할 때 순수하게 판크라스 규정 복장만 입고 경기를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서로 도복을 입은 상태에서 경기를 했던 제라드 고르도 : 호이스 그레이시는 큰 이견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론상에서나 볼법한 "극진 가라테 : 그레이시 주짓수"의 대진이 성사된 것도 사실이었고, 보통 제라드 고르도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래도 극진회관 출신이면 주짓떼로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반응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제라드 고르도의 타격을 캐치한 호이스 그레이시의 테이크다운 후 리어네이키드 초크였고, 이 부분에서 "극진가라테에 환상을 가졌던 미국인들의 환상 하나"가 박살이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1회 대회 참가자들의 회고인터뷰, 이 중 패트릭 스미스, 케빈 로지어는 이미 작고, 아트 짐머슨은 투병 후 2024년 5월에 지병으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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