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격투기”라는 말에서 ”종합격투기“라는 말의 시대로
우리가 MMA 종목을 접할 때 많이 혼동하는 것이 “종합격투기” 와 “이종격투기”라는 말입니다. 순간 ”엇, 같은 말 아닌가요? “라는 질문이 나오면, 정상입니다. 원래는 같은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MMA는 “Mixed Martial Arts” 란 의미, 즉 ”합쳐진, 종합적인 “ 의미이기 때문에 ”종합격투기“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이종격투기는 영문표기상으로는 “Heterogeneous Combat Sports”라는 표현이 맞습니다. 기존의 컴뱃 스포츠 중 “다른 종목들끼리 섞여서 경기를 한다”라는 말에 더 가깝기 때문이죠. 그래서 종합격투기는 후에 이런 “이종 격투기” 경기들에서 나왔던 것들이 “종합적으로 체계화되고 정리되어서 나온 새로운 스포츠”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의 “중간기나 과도기” 가 당연히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용어의 혼동은 나올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그런 혼동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는 바로 UFC 01 대회 이후, 그리고 일본에서 나온 이 대회의 이름이 무조건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대회 이름은 몰라도 이 대회의 시그널 음악은 기억하는 바로 그것, PRIDE입니다.
UFC 01회 대회 이후였던 1993년, 일본도 여러 격변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조용했던 곳은 타카다 노부히코의 UWF-i였습니다. 그냥 타카다 노부히코가 한참 후에 PRIDE 운영 때나, 거기보다 더 뒤에 프로레슬링 단체 HUSTLE을 만들 때 보여준 “우유부단함” 때문인가요?라고 하기엔 좀 사정이 복잡했습니다. 일단 이쪽이 “머릿수” 가 많이 적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야마 사토루의 슈토의 경우, 이미 본인이 “사야마 수두도장” 이란 것을 만들어서 제자를 받은 후에 크기가 커져서 슈토가 되었고, 마에다 아키라의 링스는 이미 마에다 아키라와 그 주변 사람들이 2차 UWF 당시 주축 인원이었기 때문에 이 인원이 그대로 링스로 계승된 마당이었으며, 판크라스의 경우, 아예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고문역으로 칼 이스카츠, 그러니까 칼 곳치를 아예 회사 고문역으로 초빙하여 칼 곳치가 알고 있던 캐치레슬링 도장이나 주짓수, 삼보 등의 고수들의 초빙이 용이해지면서 바로바로 큰 이벤트 개최가 쉬웠던 반면, 타카다 노부히코의 UWF 인터내셔널은 타카다 도장이 늦게 개설된 것도 있으며, 소속 인원도 많지 않아서 이벤트를 운영할 상황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거물을 데려올 상황이 전혀 아니었죠. 뭐 그렇다고 안토니오 이노키를 데려오면 안 되냐… 싶지만, 당시 신일본은 “신일본 프로레슬링 따로의 야심에 찬 계획” 그러니까 이노키의 이노키즘에 편승하여, 프로레슬링은 프로레슬링 대로 하면서 신일본의 출신 선수 중 일부를 K-1 내지, K-2 (경량급, 이후 K-1 MAX로 이름이 바뀝니다.) 등의 입식 경기로 보낸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독자 노선을 탔기 때문에 그것도 제대로 안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이유로 타카다 노부히코는 여러 모로 “몰려버리는” 상황에 처해있었죠.
그러던 도중, UWF-i는 이럴 거면 “UFC 토너먼트를 도전해봐야 하나…”라고 고심하던 중 당시 도장 안에 있던 안조 요지라는 선수가 ”그럴 바에야 그냥 그레이시 도장을 도장 깨기 하면 안 됩니까? “라는 다소 무모한 계획을 꺼냅니다. 이때는 UFC 01 대회 종료 후였고, 이미 호이스 그레이시가 우승을 하여 ”그레이시 도장이 무규칙 경기의 최고 도장“이라는 명예를 이미 받아놓은 마당인데, 그런 데 웬 일본의 ”U-계 레슬링“ 을 하는 도장의 사람이 도장 깨기를 하겠다는 것은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지만, 그냥 안 하는 거보단 나았다는 이노키-알리 경기 때의 교훈 때문일까요? 타카다 노부히코는 그냥 갔다 오자…라고 하여 1994년, 미국의 LA 그레이시 아카데미 스쿨로 도장 깨기를 떠났고, 그리 하여 당시 거기의 관장 힉슨 그레이시와 안조 요지의 도장 깨기가 열립니다. 그리고 “당연히” 깨져서 돌아옵니다. 힉슨이 아예 코에 손을 넣고 얼굴 째로 제쳐 올려버리는 굴욕까지 선사하면서 말이지요. 정말 무모한 도전이 맞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힉슨 그레이시는 오히려 “야… 일본에서 도전장을 보내오네.. 일본엔 어떤 놈들이 있는 거야?” 하고 바로 그 해의 슈토에서 열린 VTJ 대회에 나가게 됩니다. 호이스 그레이시가 아예 인터뷰로 “나도 강하지만 형 힉슨이 몇 배는 더 강하다 “ 는 말을 할 정도가 허언이 아니듯, 힉슨 그레이시는 바로 그 해의 VTJ1994 대회 무제한급 토너먼트를 가볍게 ”우승”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 VTJ1995 대회도 연속우승해 버렸습니다. 동생만큼이나 대단한 형임을 입증한 순간이었죠.
물론 이건 사야마 사토루 포함 슈토 입장에선 조금 “날벼락” 이 떨어진 격이긴 했습니다. 분명 도발은 타카다 노부히코가 했는데, 쇼크는 슈토가 당한 꼴이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이때는 UWF 분열의 영향으로 판크라스-슈토-링스는 일종의 “불문율”을 가진 상황이었습니다. 외국 선수가 와서 경기를 하는 것은 터치를 안 했지만 “슈토/판크라스/링스 출신이 타 단체에서 경기를 하지 않는다”라는 일종의 “불가침 조약” 상태였던 것이지요. 어쩌면 이게 일본 종합격투기 쪽이 후에 “침체기”를 겪는 원인 아닌 원인이었다는 것이 큰 아이러니였습니다. 그런데 UWF-i는 이런 불가침조약에는 이름도 들어있지 않았던 일종의 “중간지대”의 상황이었는데 이쪽이 그레이시 가문을 건드려버리면서 말 그대로 “페리제독의 개항”과도 같은 충격을 힉슨 그레이시로 겪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단, 여기서 판크라스가 조금 이 여파를 덜 받았습니다. 왜냐면… 판크라스에는 당시 켄 섐락이 활동 중이었고, 이 켄 섐락은 그래도 지긴 졌지만 ”그 호이스 그레이시와 호각으로 붙어본 “ 양반이었기 때문에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섐락을 통해 ”그레이시 가문도 공략방법은 있을 거다 “라고 듣긴 했지만 켄 본인도 그 방법을 계속 연구 중이었던 마당이라 명확한 답이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1995 시즌, 이미 이 때는 호이스 그레이시가 “UFC 03 때 탈진으로 인한 결승 기권”을 빼고는 모조리 다 우승을 하면서 UFC 05까지 무려 “3회 우승”을 이미 한 상태였습니다. (UFC 01/02/04 우승) 그리고 05에서는 03 토너먼트 당시 “호이스 그레이시가 탈진을 해서 기권을 한 이상 호이스와 붙고 싶었는데 이러면 나도 결승 안감!”을 한 켄 섐락의 건을 빌미로 드디어 “슈퍼파이트 디비전”이라는 원매치 경기가 새로 생깁니다. 그렇게 하여 “UFC 토너먼트 3회 우승”의 호이스 그레이시, 그리고 “판크라스 초대 무제한급 챔피언“ 켄 섐락의 소위 “본좌”를 가리는 결정전이 성립하죠. 어쩌면 “북미 최강” 과 “태평양권 최강“ (당시 판크라스는 일본 외에도 미국 및 사모안, 호주, 뉴질랜드 출신 선수들도 참가했으므로)의 ”최강 결정전“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이 경기는 “켄 섐락”이 30분의 정규 경기 후 5분의 경기까지 무승부로 끌고 가면서 첫 번째 슈퍼파이트 디비전에서는 조금은 아쉬운 결과를 받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UFC 역사상 첫 번째 “라이벌리” 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죠. 이후 켄 섐락과 호이스 그레이시는 계속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됩니다. 이후 켄 섐락은 UFC 6에서 이어진 슈퍼파이트 디비전에서 댄 세 번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첫 슈퍼파이트 디비전 승리라는 업적을 달성하죠.
재밌는 것은 UFC 토너먼트 우승자들에게 UFC 06 토너먼트 때 일종의 “암묵의 규칙” 이 생겼던 것입니다. UFC 6 때 슈퍼파이트 도전자였던 댄 새번의 경우 그 전의 UFC 05의 토너먼트 우승자였기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되면서 UFC 06 토너먼트의 우승자는 “슈퍼파이트 디비전에 도전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고, 이때 토너먼트를 우승한 러시아 출신의 올렉 탁타로프가 바로 그다음 UFC 07의 슈퍼파이트에서 켄 섐락에게 도전을 하게 됩니다.
참고로 UFC 07의 슈퍼파이트 디비전은 드디어 “공식적인 무승부 룰“ 이 추가됩니다. 이전의 2번의 슈퍼파이트의 경우 제한시간 30분 안에 승부가 안 나면 “심판 재량 10분 내의 연장전”을 부여했고, 그래서 호이스:켄의 경우 심판이 5분 추가시간을 선언했었습니다. 그러고도 추가시간 오버로 무승부가 나자 야유가 났었고, 켄:새번의 경우 그래도 경기가 켄 섐락의 서브미션 승리로 끝나서 문제가 없었는데, 켄 섐락 : 올렉 탁타로프부터는 아예 “30분이 되고도 승부가 안 나면 그냥 무승부 처리” 로 아예 룰을 굳혔고, 경기는 이렇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마저 “켄 섐락이 30분을 버티면서” 무승부로 경기가 끝납니다. 그리고 이후 연말 왕중왕전 개념인 “얼티밋 얼티밋 토너먼트” (TUU)에서는 댄 새번과 올렉 탁타로프가 나란히 결승에 올랐고, 이 경기는 댄 새번이 이겼죠. (당시 켄 섐락은 판크라스 경기 참가를 이유로 TUU는 불참합니다.)
UFC 08은 다시 켄 섐락이 슈퍼파이트 디비전에 참여했지만 07 토너먼트 우승자였던 마르코 후아스는 슈퍼파이트 도전을 하지 않으므로써 이전에 호이스 그레이시와 토너먼트에 붙었던 적이 있었던 키모 레오폴도가 켄 섐락에 대신 도전을 하게 되었고, 이때 슈퍼파이트 디비전은 켄 섐락이 “4분 만에 서브미션으로” 이기면서 켄 섐락은 “슈퍼파이트 2회 승리”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게 되지요. 그리고 UFC 09부터는 드디어 “토너먼트를 미국에서는 하지 않으면서” 켄 섐락의 슈퍼파이트는 원매치가 아닌 “상시 경기 메인이벤트“로 바뀝니다. 이때의 사실상 마지막 슈퍼파이트 경기도 ”댄 새번 : 켄 섐락“이었고, 이때는 처음으로 “판정 승패 결정” 이 도입되었는데, 2:1 스플릿으로 댄 새번이 이기면서 켄 섐락의 3회 슈퍼파이트 승리는 끊깁니다. (이후 슈퍼파이트는 진행하다가 말다가를 반복하다가 사실상 현재 UFC BMF 챔피언으로 개편되었습니다.)
하지만 UFC 09 이후,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국 정가에서 “이런 폭력적인 스포츠를 왜 하는 거냐”라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것의 방송규제를 주도한 사람이 후에 미국 대선 후보까지 갔던 존 매케인이었고, 이때는 이 규제가 먹혀서 UFC는 미국 내에서는 10부터 다시 토너먼트제로 돌아가되, 한동안 축소 운영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UFC는 “미국 밖으로” 나가는 시도를 하려 했는데, 이때 켄 섐락이 “일본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다”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드디어 1997년, UFC는 15회 대회 직후 일본에서 드디어 번외 토너먼트인 “UFC 재팬 토너먼트”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또 생긴 변화는 드디어 UFC는 “공식적인 금지기술” 이 확정되고 “헤비급의 별도 체급“과 무제한급이 따로 나뉘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 세대교체가 이뤄지게 됩니다. 이른바 ”돈 프라이와 탱크 애봇, 랜디 커투어와 비토 벨포트의 시대“로 대표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일본에서 펼쳐진 재팬 토너먼트, 참가자는 바로 “UWF 인터내셔널” 도장에서 참가한 안조 요지와 사쿠라바 카즈시 2명, 그리고 탱크 애봇과 마커스 실베이라 4명이었습니다. (보결선수로는 트레이 탤리그먼이 얼터네이트 매치 승리로 결정) 그렇게 하여 벌어진 첫 경기. 탱크 애봇과 안조 요지의 경기. 당시 UWF-i의 수장 타카다 노부히코는 처음에는 “이 경기”에 뭔가를 걸었습니다. 안조는 이미 그레이시 가문과 붙어본 적이 있고, 비록 처참하게 지긴 졌지만 그래도 “아메리카의 선수들과 붙어본 이상 탱크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탱크 애봇은 당시 우승을 아깝게 몇 번 놓친 적은 있었지만 TUU 1995 당시 댄 새번을 상대로 이긴 적이 있었던 “무관의 제왕”이었기 때문에… 안조 요지는 “굉장히 쉽게” 이겨버립니다. 그나마 안조 요지가 얻은 소득은 탱크 애봇에게 부상을 입히긴 한 정도뿐이었고, 경기 후 메디컬 체크에서 “탱크 애봇이 결승을 치를 수 없다”라는 판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사쿠라바 카즈시와 마커스 실베이라의 경기,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사쿠라바 카즈시는 테이크다운 후 암바를 하면서 1분 57초 만에 마커스를 이기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실수로 암바를 “파울”로 처리해 버려서 경기를 “무효처리“ 해버리는 판정 문제로 처음엔 ”탱크 애봇:트레이 탤리그먼“ 으로 결정되나 했지만, 탱크 애봇이 부상으로 결승 경기 불가, 트레이 탤리그먼도 얼터네이트 매치 당시 10분의 경기를 치르고 탈진해 버려서 경기 불가로 인해… 결승전은 ”사쿠라바 카즈시 : 마커스 실베이라의 재경기“ 로 결정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전설의 경기가 나오게 되지요.
경기 시작 후 3분 44초 후, 사쿠라바는 다시 테이크다운 후 암바 전략을 들고 나왔고, 이것으로 마커스 실베이라를 이번에는 제대로 암바를 걸면서 승리. 그의 커리어 첫 챔피언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승리 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기면서 일본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에 열광하게 됩니다.
이미 일본의 경우, “격투기 단체들이 출범한 이래” 일본인들의 자리가 의외로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판크라스는 이미 첫 번째 무제한 토너먼트 때 켄 섐락이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하면서 판크라스의 무제한급은 초대 챔피언부터 미국인이 먹었고, 슈토도 1994년과 1995년, VTJ 토너먼트에서 힉슨 그레이시가 이미 연속 우승으로 그레이시가문 천하가 일본에서도 이어졌으며, 링스마저도 첫 무제한 토너먼트였던 “링스 메가배틀 토너먼트 1992” 에서 이미 크리스 돌먼이 초대 우승자가 되면서 일본의 자존심이 충분히 박살 날 대로 박살 난 상황이었는데, 사쿠라바 카즈시가 오히려 “미국의 그 UFC 토너먼트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희망” 이 되었던 것이지요. 사쿠라바는 당시 토너먼트 제도에서 치러진 UFC에서는 “유일한 아시아인 토너먼트 우승자”였고, 그것은 일본인들에게는 자랑할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자존심”을 얻은 UWF-i 도장과 타카다 노부히코. 사쿠라바 카즈시라는 가능성을 발견한 시점부터 멈출 것은 없었습니다. 타카다는 바로 “도쿄돔에서 1997년 10월 11일“ 격투기 대회를 열겠다고 밝힙니다. 프라이드 FC 01의 시작이었죠.
물론 사쿠라바가 첫 번째 대회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상회복이라던가 기타 이유로 인해서 02부터 출전을 했고, 첫 번째 대회 때는 “타카다 노부히코가 그레이시 가문에게 도전한다. 바로 힉슨 그레이시!”라는 테마로 치러졌기 때문에 “타카다 노부히코 : 힉슨 그레이시”가 메인이벤트였습니다.
코메인이벤트는 당시 UFC 슈퍼파이트 디비전 경기를 치렀던 댄 새번과 키모 레오폴도가 “프라이드에서 다시 슈퍼파이트”라는 테마로 했고, 이때는 UFC 슈퍼파이트 디비전과 동일한 30분 제한시간 경기였는데, 여기서 키모와 새번 모두 다 승부를 내지 못해 무승부가 됩니다. 그리고 메인이벤트는… 참 싱겁게 힉슨 그레이시가 4분 47초 만에 이깁니다. 말이 4분 47초짜리 경기였지, 압도적인 힉슨의 일방적 경기였고, 이걸 버틴 타카다가 용했던 것이지요.
일단 프라이드 01에서 드러난 것은 “여전히 그레이시 가문은 셌다”라는 것이었고, 결국 이러면서 일본 팬들의 호기심은 “사쿠라바가 그레이시를 이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미 켄 섐락은 이후 스즈키 미노루가 어찌어찌 이기면서 넘어서는 데 성공은 했는데 그레이시 가문은 여전히 난공불락이었기 때문에, 뭔가 “넘사벽”을 넘는 기분이었다는 게 맞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서 냄새를 맡은 것은 “안토니오 이노키”였습니다. 이미 당시 신일본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출신인 오가와 나오야를 영입했고, 오가와가 유도 메달리스트라는 점을 이용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도 챔피언을 주면서 (물론 이때 도쿄돔에서 했던 오가와 나오야:하시모토 신야의 쇼매치는 다소 논란이 있긴 했습니다. 이노키의 스크루잡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로 오가와가 대놓고 시멘트 매치를 일으켰던 경기였습니다.) 실전 격투 경기에 출전시키기로 합니다. 이때 이노키가 사이드 프로젝트로 “UFO” 즉 ”Universal Fighting-Arts Organization”이라는 격투기 단체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단체는 1998년에 출범, 이후 2007년 Inoki Genome Federation, 즉 IGF라는 이름의 종합격투기+프로레슬링 프로모션 단체가 되어 2019년까지 운영됩니다.)
하지만, 보통 많은 격투기 팬들이 “그레이시 가문의 난공불락”을 이야기할 때 놓친 빈틈이 있었습니다. 루타 리브레입니다. 보통 그레이시 가문과 그를 위시한 “브라질리언 주짓수”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브라질의 “발리 투도”를 이루고 있는 양대 산맥이 “주짓수와 루타 리브레” 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루타 리브레는 그 사이에 이상하게 조용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나타난 것은 바로 ”마르코 후아스“ 였습니다.
마르코 후아스는 이미 80년대 브라질 현지의 발리 투도 경기에 나가서 그레이시 가문의 인원들과도 몇 번 붙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80년대 말 ~ 90년대 초까지의 브라질 발리 투도에서는 서로 얽고 얽는 서브미션 공방식 메타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주짓수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후아스는 오히려 이후 “호이스 그레이시와 켄 섐락의 경기” 에서 뭔가를 깨달은 듯 “새로운 메타”를 만들기로 하고, 이것을 바로 UFC 07 토너먼트에서 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서브미션을 주로 하되, 타격을 섞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때는 이것을 MMA라 부르지 않고 소위 “올라운드 파이팅” 내지 “프리스타일 파이팅”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이게 아예 “프리스타일 파이팅”이라는 스타일로 굳어집니다. 솔직히 브라질에서 “루타 리브레”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유로운 싸움”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에 이게 바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그냥 “프리스타일 파이팅”으로 직역된 것이긴 해서 브라질 사람들은 “루타 리브레 도 노르테“ (Luta Libre do Norte)라고도 하는 ”북미식 루타 리브레“ 가 이때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후아스의 새로운 메타는 드디어 “종합 격투기” 즉 “Mixed” 의 시작을 알린 뉴메타 전법이었고, 마르코 후아스는 바로 이 뉴메타를 프라이드 02에서도 그대로 써먹으면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프라이드 02의 코메인이벤트였던 이 경기 (1998년 3월 15일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후아스는 개리 굿리지를 상대로 타격과 그래플링을 섞는 다소 “희한한” 방식을 보여주는데, 굿리지가 타격가였기 때문에 (이미 K-1에서 입식경기를 몇 번 치른 상황이었습니다.) 굿리지마저도 “후아스가 그냥 담백한 타격전으로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죠. 이게 당시 스트라이커들에게나 그래플러들에게나 일종의 “이지선다”를 강요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아스는 경기 후반, 바로 그래플링으로 방향을 틀면서 굿리지의 생각을 꼬이게 만듭니다. 이 경기는 오히려 메인이벤트였던 호일러 그레이시 : 사노 나오키보다도 더 명경기로 취급받게 됩니다. 오히려 이 경기는 전전 경기였던 사쿠라바 카즈시가 버논 화이트전을 승리하고 나서 “그레이시 가문과 붙겠다” 는 말이 오히려 더 포인트였으니까요.
이런 후아스의 “Mixed” 한 격투 방식은 후대 MMA 팬들에게 재평가되는 상황에 이릅니다. 참고로 이때는 입식 룰이라 제한이 컸던 K-1을 논외로 쳐도 UFC와 프라이드 그리고 브라질 WVC(월드 발리투도 챔피언쉽) 이나 일본 쪽 3개 단체(판크라스, 링스, 슈토) 모두 선수들이 ”고유의 무술“ 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는 무언가가 없었습니다. 그 힉슨 그레이시와 호이스 그레이시 마저도 펀치나 킥을 ”정교하게 “ 쓰는 것이 아닌 그냥 최대한 상대를 얽어서 테이크다운시키는 차원의 ”셋업기 “ 정도로 내지르는 용도로 썼기 때문에 이때는 정말로 ”이종격투기“라는 말이 맞을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프라이드 02에서 후아스가 보여준 이 ”올라운더 메타“ 는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잡탕”이었는데 좋게 말하면 “MMA라는 것의 시작”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변화무쌍했고, 이것을 보고 있던 사쿠라바 카즈시는 큰 힌트를 찾은 셈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