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5년이지만 짧고도 강렬했던.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래서 글을 좀 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글감이 갑자기 떠오르면 그날 다 해치우는 게 낫겠다 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냥 오늘 해치우려 합니다. 다음 주 내지 다다음주는 개인적으로 컨디션 회복차 아마 개인사무실 개업하고 처음으로 "휴가"를 좀 갔다 오려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 내지 다다음주 목요일은 글이 안 올라온다 해도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확실히 좀 무리를 몇 주 하긴 해서 아직도 몸이 말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해 볼 이야기는 아무래도 "스피릿 MC" 이야기입니다. 아마 2005년 즈음에 XTM (TVN스포츠의 전신 격인...) 등에서 경기를 중계하거나 해서 그걸 알음알음 보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은 됩니다. 저도 그때 스피릿 MC 경기를 봤던 입장에서는 당시 활약했던 선수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게 참 쏠쏠하긴 하겠다... 하는 생각인데, 한번 잠깐 해보려 합니다.
스피릿 MC가 생기기 이전에는 한국은 아무래도 "입식격투기"가 보통 표준 아닌 표준이었습니다. 프로복싱의 열기가 90년대 중기에 IMF와 함께 파사삭 식어버린 것도 그 탓이지만, 프로복싱이 오래전부터 주창했던 "헝그리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소위 "후진 양성"이 미진했던 문제도 그 이유를 같이 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K-1 같은 입식격투기 대회나 킥복싱 같은 것들이 알려지면서 국내 킥복서들의 씬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됩니다.
솔직히, 킥복싱의 경우 70년대 경에 한국에도 전래가 되기는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한국 킥복싱의 선구자라 하는 구판홍 선생이 이걸 들여온 뒤에 실험적으로 한번 개량한 "킹투기"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러나 (일본 원류의) 킥복싱이던, 개량한 킹투기이던 이것들을 사람들은 그냥 "개량 권투" 정도로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렇다 보니 소수의 사람들이 그냥 자잘하게 수련했던 무술 중 하나 정도로만 있었다가, 90년대에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우던 분들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무에타이 도장과 킥복싱 도장이 혼재하는 형태로 성행했고, 그러면서 이제 본격적인 킥복싱 씬의 형성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제 K-1의 한국 중계, 그리고 이와 함께 생긴 자잘한 "격투기 단체" 들이긴 했는데, 제일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 것은 역시 "G-5"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가수 이상민 씨가 야심 차게 코엑스에 개장했던 "김미파이브"에서 치러지는 격투기 리그가 바로 "G-5" 였는데, 아쉽게도 무리한 투자로 "대차게 망해버린" 김미파이브에 비해 G-5에서 뛰었던 선수들 중 일부는 K-1 내지 K-1 Max 등에 진출해서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도 있긴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만 한 것은 아니긴 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것이 "스피릿 MC"긴 합니다. 보통 G-5가 빨랐냐, 스피릿 MC가 빨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둘 다 2003년 경에 출범하긴 했었고 그 외에도 다른 자잘한 대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빠르게 선수들의 "풀이 단단하게" 형성되었던 것은 이 두 곳이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보통 한국 MMA 쪽의 역사를 가를 때 큰 2개의 줄기로 가르는 것은 역시 "최홍만"과 "추성훈"일 겁니다. 좀 복잡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홍만이 처음으로 K-1에 진출했을 때가 2005년이었고, 그래도 그 이전에 씨름계의 스타로 불리던 때가 2002년이었으며, 추성훈이 K-1에서 당시 신설한 MMA 디비전이었던 Hero's에서 바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때도 200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최무배 관장이 선수 시절을 보냈던 때가 2004년 프라이드에서 부시도가 막 만들어질 때였고 그 사이에 윤동식, 김민수로 대표되는 "유도선수 출신" 선수들이 프라이드에 나갔던 소위 "1세대"의 시대였던 때가 이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걸쳤던 것이 스피릿 MC 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나왔던 선수 풀이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는데, 한국 킥복싱-무에타이의 "대부"라 불리는 이면주 관장과 일본 판크라스에서 뛰고 왔던 혼혈 선수 데니스 강, 그리고 "토종 최강자"로 불렸던 이은수 선수까지 보통 지금은 "후진 양성" 중이시거나 하는 "MMA 1대 관장님들" 이 바로 이때 나오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임재석, 남의철, 권아솔, 이광희 등의 "신세대" 들이 활약을 했으며, 스피릿 MC 차원에서도 CJ E&M과 협업하면서 "이 이후 세대"를 길러내 보자는 방향으로 UFC의 "디 얼티밋 파이터"를 벤치마크하여 "도전! 슈퍼코리안!" 대회를 만들어서 재야의 인재들을 길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발굴된 선수가 현재 UFC에서 뛰고 있는 강경호 선수기도 합니다.)
거기에 설상가상의 사건이 같이 터집니다. 2005 시즌 당시 G-5 경기에서 "경기 도중 사망 사고"가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래도 김미파이브 측이 "앰뷸런스 등의 닥터도 준비를 해 놓았다"라고는 했지만 경기 후 갑자기 선수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상황에서 조처가 미흡했다는 지적 및, 사전 프리 메디컬 테스팅이 없이 경기를 한 것 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사건과 이후에 김미파이브 사업 자체에 무리한 투자에 의한 문제가 드러나 김미파이브가 대놓고 "망해버렸고" 그 사이의 파이를 스피릿 MC가 거의 반쯤 독식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상민 씨가 대놓고 빚쟁이가 되어버린 그 짠내 나는 여정의 시작이었죠.)
하지만 스피릿 MC도 결국엔 2008년 스피릿 MC 18 대회를 끝으로 "메인대회 무기한 중단"을 선언했고 2010년에 "아마추어 디비전" 경기를 끝으로 아마추어 대회도 열지 않으면서 "갑자기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공식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운영사였던 엔트리안 컴퍼니의 "재정난" 이 이유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18 대회 이후에 XTM과의 중계 계약이 갑자기 엎어졌으며, 그로 인해 19회 대회는 "일부석 무료입장"이라는 초강수를 둘 정도였지만, 결국 19회 대회는 "운영사 사정으로 인한 무기한 연기" 발표가 되고 나서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한국 MMA는 아주 "잠시의 암흑기"가 오게 됩니다. 프라이드마저도 지난 편에서 언급한 "야쿠자와의 커넥션" 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결국 단체 자체가 없어졌고, 그나마 갈 수 있던 곳은 K-1 Hero's 그리고 이곳이 개편이 되어 생긴 Dream이었는데, 이미 프라이드 시기를 거치면서 나름 "두꺼워진" 일본의 선수풀 격차를 이겨내기가 힘들었고, 아주 소수의 선수들만이 그나마 일본 리그들, Dream이나, Deep, SRC(센고쿠), 판크라스 등에서 살아남다가 후에 결국 ROAD FC가 생기고 나서야 돌아오거나, 아예 UFC나 ONE 등의 더 큰 리그로 가버리는 시대로 되었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