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파티는 끝나고.
2007년 하반기, 프라이드 FC, 즉 프라이드는 UFC에 인수가 된 것도 그렇지만, 바로 이어서 나왔던 뉴스는 “K-1의 모기업인 FEG가 프라이드의 일부 제작인력을 흡수하여 기존 Hero’s를 개편한다 “ 는 ”구조조정안“의 진행이었습니다. 문제는, 프라이드가 ”2000 시즌부터 2006 시즌까지 “ 일본 MMA 풀을 너무 많이 잡아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버렸는데, 이로 인해, 2010년대에 와서는, 한국, 그리고 중국에 추월을 당하는 상황에 와버리게 됩니다. 아마도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K-1이 MMA 디비전인 K-1 Hero’s를 만든 것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한 사정이 존재합니다. 솔직히 디비전 창설 발표가 있던 2004년만 해도 “프라이드의 인기에 편승해서” MMA 디비전을 만든 것 아니냐는 의견이 강했지만, 프라이드 사태가 터진 후로 보면, FEG 마저도 굉장히 복잡한 속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제일 먼저는 “입식 격투기 경기”의 특성상 양상이 너무 “패턴이 분명한” 경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최홍만이 K-1에 들어온 후에야” 조금 이 메타가 바뀌었다라고 평가하는 일본 평론가들이 있었을 만큼, 대체로 2003 시즌까지의 K-1의 경우, 극진가라테 출신 선수들의 근접 펀치 연타로 3 다운 뺏기 (K-1 룰에서는 3 다운 시 바로 경기가 우세승으로 끝나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지는 무에타이 선수들의 하단 레그킥 노리기 전법이 너무 많이 나왔고 (이것의 경우 무에타이 선수들이 빰, 즉 넥클린치 자세 이후에 넘어뜨리는 그래플링성 동작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컸습니다.) 초창기의 “다양한 선수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격투기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마저 데려와서 “대충 킥복싱 정도만 가르쳐서” 경기에 올리는 이른바 “예능매치”마저 나왔던 것이 이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와중에 아케보노가 전향을 해서 좋은 활약이라도 해주면 몰라도, 정작 그 아케보노마저도 “K-1에서는 허우적대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일본 격투기 팬들을 “어이 상실” 상태로 몰아넣은 것도 컸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FEG 측에서도 결국 “입식 격투만으로는 결국엔 흥행을 제대로 이어간다는 보장이 없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2002년에 있었던 프라이드와의 공동 이벤트인 “다이너마이트 2002” 그리고 제한적으로 MMA 룰로 경기를 시행했던 “K-1 다이너마이트 2003”은 그런 것을 “시험해 보기 위한” 이벤트였던 것이고, FEG의 예측은 들어맞으면서 본격적으로 2004년, K-1은 아예 “MMA 룰로 하는 경기”인 Hero’s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쪽으로 영입된 선수도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유도 선수 출신의 “아키야마 요시히로“ (추성훈) 그리고 프로레슬러 출신의 “시바타 카츠요리” 였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보통 “프로레슬러 출신“의 시바타 카츠요리에게 좀 더 높은 평가를 해줬던 것이 사실입니다. 추성훈의 경우 당시, 한국 유도계의 ”용인대 중심 운영“ 과 ”순혈 주의“라는 이상한 논리로 인해 추성훈을 반쯤 쫓아낸 꼴이었으나 정작 일본 현지에서는 ”자이니치“ 즉 재일 한국인이라는 것이 일본 사람들에겐 반감의 요소가 되었던 것이 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신일본과 NOAH 등에서 활동할 때 시바타는 타격기와 그래플링을 적당하게 섞어 쓰는 ”네오 U-계“(UWF 스타일의 개량형) 스타일을 내세웠기 때문에 더더욱 일본 현지 팬들의 기대를 키운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뚜껑이 열리니 벌어진 결과는… “추성훈의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이미 유도 쪽으로는 확실했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참고로 당시 추성훈의 스파링을 도와줬던 윤동식 선수의 회고로는 “추성훈이 쉽게 이길 수 있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었을 정도로, 프로레슬링 쪽에서 보여준 시바타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빈틈은 너무 많았고, 그 부분을 추성훈은 워낙 쉽게 공략을 했던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면서 시바타 카츠요리의 “커리어”가 다소 많이 꼬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좀 승수라도 많이 쌓으면 모르겠는데, 그러기엔 이후에 너무 많은 패배를 쌓았고, 결국 시바타는 다시 프로레슬링 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MMA 관련 경기 기록을 보다 보면 (특히 셔독 등의) 정말 “이해할 수 없는 “ 매치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미스터리 한 것“ 이 바로 ”K-1 다이너마이트 USA” 에서 있었던 김민수 : 브록레스너 경기와 “2007 DREAM 야렌노카 오미소카” 에서 있었던 효도르 : 최홍만 경기였습니다. 그중에서 생각해 보면 골 때리는 것이 바로 “김민수 : 브록레스너”였습니다. 원래 이 경기는 “최홍만:브록레스너” 가 될 뻔했다가, 최홍만의 프리메디컬 테스트 실패로 인해 결국 스파링 파트너를 해주던 김민수가 대신 나가게 된 경기였는데, 정작 그 경기를 다시 보면 “브록 레스너가 이미 그때 UFC 챔피언이 될 낌새는 보였다” 란 느낌이 보였던 경기였습니다.
문제는 당시 브록 레스너도 “격투기 실력 자체는 엉망”이었던 것이긴 했습니다. 2002-2003 시즌, WWE와의 연봉협상이 안 맞으면서 WWE를 떠난 후에, 일부러 다른 스포츠를 하면서 “방황“ 을 하다가 안토니오 이노키에게 ”그냥 프로레슬링에 격투기 정도만 해도 충분할 거 같은데 왜 용을 쓰냐 “ 란 소리에 이후 이노키의 IGF에 머물면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을 했는데, 문제는 이때가 ”이노키가 신일본에서 축출을 당할 때“ 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신일본을 인수한 유크스는 비자 문제나 개인적 이유로 일본 쇼매치에 출장을 잘 안 했던 브록 레스너에 질려버려 ”브록 레스너의 IWGP 벨트는 박탈한다 “라는 입장이었고 결국 이노키가 일종의 ”떼를 쓰면서 “ 한동안 신일본의 IWGP 챔피언은 “2명의 챔피언” 이 동시에 존재한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후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부시로드 산하가 된 후에 오마주 각본으로 이런 2명의 챔피언 각본을 여러 번 써먹긴 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이노키가 데려온 사람은 “역시 WWE와의 연봉 협상 문제로” 일부러 저니맨 생활을 하게 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커트 앵글이었고(…) 결국 이 브록 레스너를 2007년에 다시 데려와서 “브록 레스너:커트 앵글의 IGF IWGP 챔피언쉽”을 얼렁뚱땅 하면서 일단 커트 앵글에게 벨트를 넘겼지만, 굉장히 추진 과정에 문제가 많았고, 그나마 이건 이노키가 완전 축출 된 후에 유크스가 그래도 머리를 잘 써서 “커트 앵글 : 타나하시 히로시 통합 챔피언전” 으로 각본을 끝내면서 벨트 정리는 그럭저럭 성공합니다.
아무튼 브록 레스너가 MMA를 시작했던 2007 시즌으로 돌아와서, 이때 FEG 측은 브록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긴 했습니다. 실제로 브록 레스너는 “NCAA 디비전 1 우승 및 올아메리칸 선정“이라는 올림픽 레슬링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분명 뭔가 스트라이커만 보강이 되면, 충분히 괜찮은 카드로 보였고, 이미 최홍만은 2005 시즌 와 2006 시즌, 특히 2006 시즌 당시 ”비스트“ 밥 샙은 이기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 최홍만과 MMA룰로 하게 되면 “ 엄청난 경기가 나올 것으로 보고 최홍만과의 경기를 부킹 했긴 합니다. 그러나… 최홍만에게 프리메디컬 이슈가 발생할 것이라곤 FEG측도 예상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이게 뇌하수체 관련 문제였기 때문에 최홍만에겐 언젠간 해야 했던 수술이긴 했습니다.) 결국 비슷한 시기에 프라이드 등에서 활동 중이었던 김민수에게 매치 오퍼는 옮겨 갔고, ”그래도 김민수도 괜찮은 선수는 맞았으므로 “ 매치는 성사가 됩니다. 이쪽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유도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매치업 자체의 급은 맞았던 것이었죠.
그러나 일단 경기는 1라운드 KO로 브록 레스너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제일 큰 문제는 경기를 앞두고 김민수 선수가 오래전에 가지고 있던 안와 부상이 재발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럭저럭 안와 쪽에 의료용 고정핀을 하고 경기를 치렀지만 테이크다운 후 브록의 파운딩 상황 중에 그 부위로 또 타격을 입으면서 잘못하면 “실명 위기” 까지 올 뻔했던 상황이어서 결국 빠르게 탭아웃을 칠 수밖에 없었긴 하나, 그와는 별개로 “브록 레스너의 힘이 꽤 세긴 했다” 는 김민수 선수의 회고로 봐선, 아마도 정상적인 컨디션에서 경기를 했어도 브록이 유리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프라이드가 야쿠자와 얽힌 스캔들로 인해 단체 자체가 “매각” 이 되어버렸지만 제작 스태프 중에는 Zuffa (현 UFC.inc)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결국 이들은 FEG에 들어가는 것을 택합니다. 그리고 프라이드가 없던 “빈자리”를 K-1 HERO’s 가 메꾸려 하는데, 문제는 이 앞의 ”K-1”이 너무 이미지가 강해서, MMA 부문의 “브랜드 분리”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FEG는 리브랜딩을 해야 했고, 어차피 프라이드의 제작진들이 들어오는 이상 프라이드의 철자인 5글자에 브랜드를 맞추자는 결론에 도달,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DREAM”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본가라고 할 수 있는 “K-1의 상태”가 안 좋아집니다. MMA를 포기하고 입식 경기로 종목을 바꾼 새미 슐트는 너무 압도적으로 헤비급 GP를 연속 재패한 건 좋았는데, 그러면서 경기가 “재미가 없어지는” 문제가 발생했고, 그리고 이미 이 시기 충분히 UFC는 성숙기에 접어들어 굳이 K-1으로 전향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갑자기 K-1의 주관방송사였던 후지 TV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정지도”를 받게 되는데, 이게 후에 K-1이 망한 후 밝혀진 회고로는 정도회관의 이시이 카즈요시가 “탈세”를 저질렀고, 이 탈세를 막는 과정에서 “야쿠자 자본이 흘러 들어간 것” 이 도쿄 경시청에 포착이 되어서 후지 TV가 행정 지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K-1이 2005 시즌부터 소위 “예능성 매치” 가 많아진 것도 대충 이 재정난을 막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는데, 결국 얼마 안 지나 프라이드가 망해버렸고, 일본의 사회 특성상 “고용 안정”을 그래도 시키긴 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FEG가 무리하게 프라이드에서 퇴사한 인원들을 끌어안은 것이 결국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2008 시즌 말과 2009 시즌 중반 즈음 몇몇 선수들을 통해 “K-1이 파이트머니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라면서 소송을 한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후 FEG도 회사 경영난을 인정하여, K-1과 DREAM 모두 2010 시즌 이후 큰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지 않다가 결국 K-1은 해외 킥복싱단체였던 Glory에 지적재산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산을 매각했고, DREAM은 2012년 “단체 해산“ 을 발표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후 일본 경시청이나 검찰은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드러난 것은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일단 야쿠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개입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고, 수사 당국도 알고는 있었지만, MMA, 즉 종합격투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신시장” 이어서 아예 야쿠자들이 “전략적으로” 접근한 것이 알려집니다. 보통 이쪽은 단체 운영에 개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거와 연계한 “스포츠 도박” 도 지하에서 은밀히 진행을 했고, 역시 파칭코장에서도 종합격투기 경기 결과를 놓고 도박을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도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NHK 등에서 하는 쇼기 경기 내지 바둑 경기” 에도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긴 합니다.)
문제는 야쿠자만 이런 게 아니라, 폭주족 출신의 “신흥폭력단체” 였던 ‘한구레’ 마저 이쪽에 개입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쪽은 마에다 아키라가 Rings 도산 후 만들었던 지역단체였던 ZST, 그리고 Rings-Outsider에서 이런 개입이 알려졌는데, 그로 인해 마에다 아키라는 예상보다 일찍 단체 운영을 접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Rings-Outsider가 더더욱 그랬는데, 마에다 아키라가 ”지역의 비행 청소년들 및 격투기에 소질은 있지만 여러 이유로 히키코모리로 사는 고립 청년들을 격투기로 세상으로 끄집어내자 “라는 다소 ”의도는 좋았다 “ 성의 단체였지만 한구레들이 이 경기에 도박을 한다거나 특정 선수 풀을 일부러 형성시키는 형태로 시스템을 망쳐버린 상태였고, 또한 이후 그럭저럭 성적이 좋았던 선수들이 다른 단체에 가서는 체계적으로 수련한 선수들 대비 기본기가 많이 딸려서 패배를 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이 실험을 ”실패“로 보고 운영을 접게 됩니다. 그나마 그래도 그중에서 제일 대성한 선수들은 현재 RIZIN에서 활동 중인 아사쿠라 미쿠루, 아사쿠라 카이 형제로 그나마 이 형제들은 비행청소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동네에서 운동으로 MMA 하던 형제들”에 가까워서 그나마 대성했다는 점 정도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아사쿠라 미쿠루 선수는 한국의 ROAD FC에서도 잠깐 뛴 적이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면서 “격투기 체육관” 들이 연쇄로 폐관을 해버린 것이 컸습니다. 프라이드에 이어 DREAM까지 없어지니 한꺼번에 “일본 양대 메이저 MMA 대회가 없어져 버렸고” 그거보다 더 문제는 “MMA에 대한 나빠진 이미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 선수풀이 아주 확 줄어버렸고, 당시 기준으로 중소규모 단체였던 DEEP, SRC, 판크라스마저도 제대로 선수 풀이 굴러가지 않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국 이 여파로 2011년 SRC(센고쿠)가 도산해 버리면서 일본의 MMA 씬은 문자 그대로 “죽어버렸고” 일본 선수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UFC 진출을 도전하지만… 이미 사쿠라바 같은 “그레이시 헌터”가 나오기엔 북미의 MMA 메타는 이미 크게 발전해 버려서 일본 선수들이 어떻게 해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립니다.
더 큰 문제는 오히려 이 시기 (2010년 경) 한국은 MMA 리그인 ROAD FC가 생겨버린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로드가 (비록 여러 문제가 있긴 했을지언정) 오히려 미국의 MMA 메타를 일찍이 받아들인 선수들이 많았고, 그러면서 남의철 선수가 “UFC로 진출하는” 다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한국은 MMA 시장이 성장하던 때여서 일부러 “해외 선수들을 데려와서 매치를 하는” 일이 있었고, 스피릿 MC 시절까지만 해도 “국내 한정” 대회 소리를 듣던 한국 MMA는 오히려 이 시기 “질적 성장”을 시작했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조는 후에 생긴 TFC, AFC에서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