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KO 그룹의 주축, WWE-UFC는 이미 연이 있었다.
자 그러면 이쯤에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은 미국인 UFC의 상황입니다. 이미 미국 의회로부터 “폭력적이다”라는 이유로 제대로 “찍혀버린” UFC는 굉장한 고난의 시기를 보냅니다. 어쩌면 초기 UFC의 설립자들이 이때를 잘 넘기지 못했다면 “UFC는 이미 없어졌을 것이다”라고 했을 만큼, UFC는 문자 그대로 위기의 상황을 맞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2001 시즌, 웬 복서 지망생 출신의 사업가가 나타나게 됩니다.
존 매케인이 1998년경 상업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UFC의 위기는 더욱 커졌습니다. 왜냐면, 미국의 방송 체계 때문이었는데, 지상파는 FCC(연방방송통신위원회)의 관할에 있었지만 케이블 방송과 위성방송은 연방상업위원회 관할에 있었기 때문에, 심의의 권한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대신 방송 심의에 있어서 케이블 방송은 지상파보다 다소 유연했습니다. (MTV가 프린스와 마돈나의 “FCC 방송 심의 제재를 받은 곡”을 틀어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MTV는 케이블 방송국이었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존 매케인이 상업의원회 의장을 맡았던 시기는 빌 클린턴 말기, 소위 르윈스키 스캔들로 미국민주당의 지지세가 꺾여버렸고, 그로 인해 이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이기면서 일부 연방위원회를 공화당이 빼앗아버린 시기였는데, 이때 공화당은 (지금도 그렇지만) 소위 “청교도적 보수주의”가 심한 때라 (소위 네오콘이라는 보수세력이 등장한 것은 레이건 정부였던 1980년대였지만, 이들이 강성한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어느 정도의 “보수적인 룰”을 가진 프로복싱에 비하면 “대놓고 막싸움”에 가까웠던 종합격투기를 곱게 볼 리는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존 매케인은 이때 케이블 방송국에 “UFC 방송을 재송출 하지 말라” 는 압박을 하게 되면서 PPV에 이어 케이블 재송출 수익마저 급감하자마자, 2000년 말, UFC는 재정난에 빠지게 되고 결국 회사를 매각하기로 합니다.
참고로 이때 생계가 어려워진 선수들은 “돈을 벌기 위해” 프로레슬링 판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켄 섐락이 그랬습니다. 켄 섐락은 아예 WWE (당시 WWF)로 가버렸고, 아주 잠깐이지만 댄 새번도 WWE에서 활동을 합니다. 돈 프라이는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일종의 “악역 프로레슬러“ 아르바이트를 뛰기도 했죠. (물론 돈 프라이는 그래도 일본 활동 중에 프라이드 측의 눈에 띄어 프라이드 FC로 이적해서 활동합니다.)
참고로 이때 묘한 일화가 “WWE가 UFC를 인수할 뻔한” 일이 이때 있긴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WWE의 오너였던 빈스 맥마흔 주니어는 오히려 “미식축구”에 더 관심이 있어서 UFC를 인수하는 게 어떻냐는 주변의 조언을 “깔끔하게 거절” 하고, 미식축구 리그인 XFL을 만드는 것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TKO 인수 이전 WWE의 “역사상 최악의 오판”이라 불리는 선택이었고, 이로 인해 WWE는 상당한 양의 돈을 까먹게 됩니다. (왠지 최근 게임계에 일어난 소니의 “콩코드 사태” 가 생각나면 기분 탓일까요.)
결국 2001 시즌 중순까지 이 인수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정말 이대로면 “UFC는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데이나 화이트라는 사업가가 UFC를 인수하겠다”라는 연락을 해오게 됩니다. 데이나 화이트, 이 사람은 대학교를 2번 중퇴하고 (2곳을 입학했다가 연속으로 자퇴를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배운 복싱이나 에어로빅을 이용해서 라스베이거스 지역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살던 사업가였는데, 이 사람이 사업을 확장하던 중에 당시 UFC 선수들이던 티토 오티즈, 척 리델과 안면이 트여, 이 사람들의 매니저 및 훈련장 제공을 해주다가, 아예 이쪽으로 판을 벌릴까?라는 방향을 이미 잡은 상태였죠.
문제는 “돈이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당시 WWE가 UFC의 제안을 거절했던 이유도 빈스 맥마흔 주니어가 바란 방향성도 달랐던 것도 있었지만, UFC를 인수할 때 당시 이 UFC 회사엔 다소 부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부채를 갚아서 인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채가 좀 많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즉 “인수액”이 안 맞았다는 건데, 데이나 화이트도 이걸 감당하긴 애매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데이나 화이트는 다시 인맥을 끌어모으기 시작합니다. 어릴 때부터 친했고, 카지노 재벌 가문이었던 로렌조 퍼티다에게 연락을 하게 됩니다. 로렌조 퍼티다 입장에서도 좀 기회였던 게 지난번에 말했다시피 “프로복싱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퍼티다 가문도 프로복싱 프로모터 일을 했었기 때문에 로렌조도 잠깐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에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의 아레나에서 프로복싱이나 공연 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을 때우기” 위해서 MMA가 그래도 괜찮은 아이템인 것은 맞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데이나 화이트의 동업 제안을 받고, 그의 동생도 끌어들여서 돈을 합친 뒤, UFC를 삽니다. 그리고 이 회사를 “ZUFFA”로 짓게 됩니다.
데이나 화이트는 UFC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합니다. 일단 당시 상황은 공화당이 대선까지 이겨서 이른바 “부시 행정부” 시기였고, 이 시기는 더더욱 공화당이 입지가 강했기 때문에 케이블로 재진출을 시도하는 것은 다소 애매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데이나 화이트는 라스베이거스의 “백인 집안” 출신이었고, 네바다주는 역사적으로 “스윙 스테이트”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대전 같은 곳이라서, 정치 성향이 반반이었는데, 데이나 화이트와 그의 집안이 공화당 쪽이었던 것이 다소 “위기 타개”의 포인트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UFC의 위기 해결의 방법이 될 순 없었습니다. 공화당에 계속 아부를 하는 것도 만약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에게 정권이 넘어가면 답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을 제대로 겪었던 것이 바로 WWE 긴 합니다.)
그래서 아예 “근본적인 개혁”을 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는 MMA의 “폭력성을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02 시즌부터 UFC는 굉장히 많은 “금지 조항”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프로복싱의 체급 체계를 가져오되, MMA에 맞게 일부 수정을 하면서 이 시기부터 드디어 UFC의 경기들은 무제한급 경기는 줄고, 대부분 “체급별 경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우리가 보통 MMA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듣는 용어인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의 규정을 기준으로 한다” 는 바로 이때 생긴 것입니다. UFC의 인수사인 ZUFFA의 근거지가 네바다 라스베이거스이다 보니 MMA에 관련한 체육규정을 처음 만든 곳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프라이드를 ZUFFA, 즉 현재의 UFC.inc에서 인수하면서 아예 일본 단체들에게 “우리 쪽으로 넘어오려면 우리 쪽의 규정에 최대한 맞춰야 한다!”라고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정례화가 된 것이죠. 단 일본 단체들은 다 이 규정을 처음에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특히 제일 논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역시 “4점 공격” 즉 모든 손과 발이 캔버스 매트에 닿은 상황. 혹은 모든 손과 발이 떨어져 누워있는 상황에서의 사커킥과 니킥, 스톰핑이 당시 UFC 규정에서는 “완전 금지“ 였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대부분의 일본 단체들은 이것이 경기의 재미도 및 다양한 공격루트 선택지를 이유로 ”완전 허용“이었습니다. 즉, 이 부분이 의견 접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는 3점까지는 니킥, 사커킥은 허용, 스톰핑은 ”머리 아래까지는 2점과 3점 상황에서 허용“인 다소 느슨한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단 규정을 만들고 나서 UFC는 PPV부터 다시 흥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라스베이거스는 아레나나 호텔 그랜드볼룸이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부터 먼저 PPV를 하긴 하는데, 다행히도 이때는 인터넷이 막 생길 때라서 인터넷 중계 (보통 AOL에서 하던 PPV 서비스 등으로)로 중계를 시작했고, 인터넷 PPV가 어려우면 PPV 현장 경기 후에 경기 DVD를 파는 방식으로 영업을 전개합니다. 사실상 오래전 그레이시 가문이 하던 초기 UFC의 영업방식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데, 여기서 “다소 세련된” 연출 방식을 도입하기로 합니다. 이전에는 보통 그냥 선수들이 도전장만 던지고 말거나 토너먼트제 경기면 “토너먼트에 임하는 각오 인터뷰” 정도만 때우고 바로 경기로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사전 계체식”을 기자회견 방식으로 하기 시작했고, 선수들의 “개인사가 담긴 프로모션” 이 만들어지게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당시 ZUFFA는 이런 연출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초기 인원들 중에 영화계 인사들이 있었지만 2002년과 2003년 당시는 그런 사람들은 이미 회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또 데이나 화이트의 인맥이 발동되기 시작합니다. 데이나 화이트와 그 집안이 공화당 쪽 사람인데, 재밌게도 공화당 고액지지자 후원회 안에는 WWE의 당시 오너인 “빈스 맥마흔 주니어” 가 있었던 것이고, 데이나 화이트는 바로 빈스에게 연락하여서 “프로모션에 대한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라고 하여 업무 제휴를 잠깐 맺게 됩니다. 당시 WWE는 프로레슬러들의 프로모션 영상이나 그런 연출을 다소 잘 만드는 편이었고, 이런 부분을 “진짜 싸움을 하는” 종합격투기 선수들에게 들여오면 조금 더 선수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팬층이 자연스럽게 더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이유였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런 것들을 하면서 “비용이 꽤 많이 소모되었다는 것”입니다. 450억 달러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이게 전 업체의 부채를 처리하고, PPV 개최를 위해 돈을 “크게 붓자”라고 데이나 화이트가 밀어붙이면서 이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때 잠시 “파이트머니로 줄 돈” 까지 끌어썼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잠깐 파이트머니를 못줄 상황이 되자 아예 로렌조 퍼티다가 “사비를 털어서” 파이트머니를 줄 정도였고 (어째 초기 ROAD FC와 비슷합니다. 이때도 정문홍 대표가 사비를 털어서 파이트머니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로렌조 퍼티다가 참다못해 “야! UFC 그냥 딴 데 팔면 안 되냐!!!” 하고 2004 시즌 즈음 재매각을 잠깐 시도했는데 문제는 이때 퍼티다 형제가 “600억 달러”를 인수대금으로 불렀고… 당시 UFC의 상황을 본 다른 회사들은 “이 정도는 너무 비싸다” 하면서 거절을 하면서 결국 퍼티다 형제도 포기합니다. 물론 데이나 화이트도 “PPV만 잘 굴러가면 갚을 수 있어!!” 하면서 계속 설득을 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데이나 화이트의 “쥐어 짜내는 노력”은 그래도 결실을 맺습니다. 바로 이 어려운 시기에 “황금의 세대” 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랜디 커투어-티토 오티즈-척 리델-조쉬 바넷이라는 4인방의 시대가 옵니다. 이들은 다른 상대로도 엄청난 경기를 보여줬지만 이들의 진가는 “서로 붙을 때” 명경기가 나왔고, 대표적으로 조쉬 바넷 : 랜디 커투어 / 척 리델 : 랜디 커투어 / 티토 오티즈 : 척 리델의 경기는 일종의 “라이벌 매치” 로 붙여지면서 UFC는 사람들의 입소문 속에 부활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2004 시즌 당시 신생 케이블 채널인 SPIKE 채널에서 드디어 “UFC를 케이블 중계하겠다”라고 하면서 UFC는 케이블 방송으로도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때 UFC는 “이 황금 세대에만 머무를 순 없다”라는 판단을 합니다. 어쩌면 UFC의 침체기를 그래도 “목격하긴 했던” 데이나 화이트 입장에서도 정확한 판단이었는데, 보통 MMA 선수들은 복싱 선수들보다 더 격하게 움직여야 하고, (아무래도 킥 기술과 그래플링/안티그래플링 기술을 하려면 전신을 다 써야 하니까요) 그나마 규정을 정비해서 뇌진탕이나 골절, 인대 부상을 다소 줄이긴 했다 해도, 보통 전신을 다 쓰면 복싱보다도 부상에 취약한 구조는 여전했기 때문에 이른바 “에이징 커브” 가 복싱 선수들보다는 짧다는 점을 간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신인들이 계속 유입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더더욱 강조합니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신인 선수들을 뽑고, 띄워줄 것이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런 마당에서 UFC는 또 WWE를 참고로 합니다. 당시 WWE는 신인 프로레슬러들을 뽑는 오디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터프 이너프>를 제작해서 직접 신인 프로레슬러를 뽑고 했는데, 하필이면 UFC도 어차피 SPIKE 채널에서 중계 중이겠다... 해서 SPIKE 채널과 함께 "신인 선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터프 이너프는 "WWE내의 여러 명의 제작자, 트레이닝 코치들이 멘토 역할을 한다"는 것을 참고한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2명의 멘토를 놓고, 그 멘토들을 중심으로 하는 팀에서 생활하고, 훈련하며, 자체 토너먼트 경기를 진행하여 각 팀에서 딱 1명씩 2명 만을 남겨서 UFC 진출자를 뽑는" 방식으로 신인 선발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니 그것이 바로 "The Ultimate Fighter"입니다.
그렇게 하여 진행한 첫 번째 TUF는 역시 전통의 라이벌 "척 리델과 랜디 커투어"가 멘토를 맡아서 팀 리델 : 팀 커투어로 진행합니다. 이때는 미들급 / 라이트헤비급으로 해서 각 체급별 4명씩 도합 한 팀당 8명으로 했습니다. (전체 참가자는 16명) 이때는 각 팀 내 토너먼트로 TUF 파이널 진출자를 뽑았습니다. (최근 시즌처럼 무작위 토너먼트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팀 리델에서는 디에고 산체스(라이트헤비)와 포레스트 그리핀(미들급) / 팀 커투어에서는 스테판 보너(미들급)와 케니 플로리안 (라이트헤비) 이 파이널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스테판 보너 : 포레스트 그리핀의 경기에서 명경기가 나오면서 TUF는 바로 첫 시즌부터 "대박"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원래는 "우승자 1명만 UFC와 계약" 한다라는 방침을 데이나 화이트는 바꿔서 "준우승자들에게도 UFC 경기 출전 기회를 준다"로 바꿉니다. UFC는 "전속 계약" 개념이 일반적인 격투기 단체들과는 다릅니다. 보통 전속계약이 "한 텀의 계약"으로 되어있고, 그 텀은 TUF 우승 시 6경기 출전을 보장하고 거기서 일정 승률 아래로 떨어질 시 재계약 없이 퇴출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준우승자에게도 상금을 차등하거나, 전속계약 경기 수를 우승자보다 적게 주는 방식으로 하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UFC 측에서나 선수들에게나 서로 "윈-윈"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점점 시즌이 길어지면서 UFC가 점점 "MMA계의 메이저 리그" 화가 되어가면서 "UFC에서 한 경기는 뛰어봤다"라는 말은 "세계 최고 리그에서 경기를 해봤다"라는 일종의 이력서가 되었기 때문에 TUF 1이 끝난 직후에는 계속 TUF의 출전 신청자는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TUF 만으로는 선수의 수급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라는 내부 판단으로 선수 선발의 창구는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방식이 바뀌어 "전체 무작위 토너먼트" 로 바뀌면서 드디어 "팀 조기 전멸"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는 전멸당한 팀의 코치가 "상대 팀에게서 선수를 꿔올 수" 있는 방식으로 탈락자 혹은 상대 팀 내에서 코치와 불화가 있는 선수를 데려와서 대신 훈련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런 패자 부활 혹은 드래프트 방식으로 인해 변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2024 시즌 현재 기준으로 아시아에서는 아시아 쪽 격투기 단체 상위 랭커들을 토너먼트로 모아서 우승자 1명을 UFC로 보내는 "Road to UFC(RTU)"가 진행되었고, 남미에서는 별도의 TUF:Brazil 시리즈와 TUF:LA(라틴아메리카) 시리즈가 제작되었으며, 유럽과 북미는 원매치 방식으로 경기 후에 데이나 화이트 및 UFC 내부 평가를 거쳐서 드래프트 선발을 하는 "데이나 화이트 컨텐더 시리즈"(DWCS) 등의 선발 방식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일본과 다르게 UFC는 "고인 물은 썩는다"를 막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하게 되었고, 2007 시즌을 기점으로 드디어 적자 상태를 청산하고 흑자전환을 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스포츠 리그는 자생력을 가져야 오래 지속될 수 있다"라는 명제가 먹혔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2007 시즌 PRIDE가 결국 신인 발굴이 없이 돈으로 선수를 영입하기만 하는 방식으로 머물렀다가 야쿠자와 얽힌 스캔들로 무너진 것과는 정 반대의 행보를 보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