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드 FC는 어떤 흔적들을 남겼는가?
프라이드는 1997년에 만들어져서, 2007년 파산 후 Zuffa, 즉 UFC.inc의 전신인 회사에 인수되기까지 무려 10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빛”도 있었지만, “그림자”도 같이 남겼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프라이드 FC가 너무 공격적인 프로모션에 집착한 나머지, 일본 MMA계에 다소 긴 암흑기를 남겼다“ 는 것입니다. 2024 시즌 현재 일본의 MMA 단체는 판크라스, DEEP, RIZIN이 있고, 슈토도 있긴 하나 슈토는 현재 ONE이나 DEEP 등의 단체 등과 엮여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현재 북미 MMA의 양대 메이저 리그인 UFC나 PFL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는 한국인 선수보다 더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한국의 MMA가 굉장히 질적성장을 잘 해온 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초기 ”실전형 프로레슬링“ 에서 ”이종격투기“의 시대를 거쳐서 ”종합격투기의 시대“ 까지를 모두 열었던 곳임을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은 이 칼럼을 쓰는 저도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한번 프라이드 FC의 90년대 후반, 그리고 그 주변 MMA 단체들의 이야기를 한번 해야 이야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아쉬운 이야기지만 이 속에는 ”야쿠자“에 관련된 이야기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저번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쿠라바 카즈시는 “그레이시 헌터” 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레이시 헌터를 프라이드가 만들어지고 바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준비 기간도 마련해야 했지만, 그거와 별개로 그레이시 도장에서도 “누구를 내보낼 것인가”로 다소 고민을 했던 것과, 프라이드는 단체 특성이 “원데이 슈퍼파이트“를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물론 이후 프라이드 GP나 부시도 등의 디비전 체계가 만들어지며 자연스럽게 토너먼트도 도입은 합니다.) 토너먼트에 익숙했던 그레이시 도장에게는 ”한 번의 경기로 모든 판단이 서는 것“ 을 그리 미더워하진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타카다 노부히코는 사쿠라바에게 몇 개의 매치를 치르게 했는데, 그중에서 드디어 “그레이시 가문을 잡을 수 있다”라고 확신하게 된 경기가 바로 프라이드 03에서 있었던 카를로스 뉴턴 전과, 프라이드 05에서 있었던 비토 벨포트 전이었습니다. 카를로스 뉴턴은 UFC 웰터급 체급이 신설된 후 2대 챔피언에 올랐던 인물이고, 비토 벨포트 역시 UFC 12 헤비급 토너먼트 우승자이자 “랜디 커투어의 라이벌”이었는데 그 두 명이 사쿠라바에게 패배합니다. 특히 카를로스 뉴턴전은 변명의 여지가 없던 2라운드 니바 서브미션 승이었고, 프라이드 04에서는 판크라스에서 켄 섐락의 동생 프랭크 섐락을 상대로 무승부를 거둔 알란 고에스를 상대로 풀라운드 무승부, 그리고 비토 벨포트에게는 5분 2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면서 “드디어 그레이시 가문을 상대로 경기가 가능할 것이란” 희망회로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프라이드 수뇌부는 1999년 11월에 진행할 프라이드 08에서 “호일러 그레이시 : 사쿠라바 카즈시” 매치를 부킹 합니다. 이미 호일러 그레이시도 90년대 후반에 생긴 그래플러들의 대회인 아부다비 컴뱃 클럽 레슬링 (ADCC) 수상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상황은 달라집니다.
사쿠라바 카즈시가 호일러를 오히려 주도권에서 압도하며 1라운드를 끝냈고, 바로 2라운드 역시 그래플링에서 압박 후 기무라 락을 성공시킨 사쿠라바. 호일러의 팔은 대놓고 꺾였지만 호일러는 탭아웃을 치지 않았고, 팔이 아예 제대로 꺾인 것을 확인한 심판이 레퍼리 스탑을 하면서 경기 종료. 그렇게 사쿠라바는 “그레이시 헌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2000 시즌, 프라이드 측은 “프라이드 GP 무차별급 토너먼트”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때의 일본 쪽의 상황을 살짝 이야기하면, 판크라스는 그나마 “믿을맨” 소리를 듣던 스즈키 미노루 마저도 헤르니아 부상 등을 이유로 장기 결장, 그리고 노쇠화를 겪으면서 선수로서는 은퇴가 가까워져 왔었고 (그 사이에 MMA룰에 가까워진 “판크라치온 룰” 이 도입되면서 세대교체도 강제로 일어납니다.) 슈토는 그나마 건실하게 운영은 되고 있었고, 엔센 이노우에 등의 에이스 선수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선수들을 K-1에 빼앗기고 있었으며, 링스는 “여러 번의 룰 개정”을 거친 끝에 1999 시즌부터 링스 룰 (개량 UWF룰)로 치르던 메가배틀 토너먼트에서 이른바 “KOK 룰” 로 치르는 “킹 오브 킹스” 토너먼트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마저도 UFC나 프라이드의 룰에 비하면 (NHB룰에서 반칙 사항을 몇 개 추가한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제약 사항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이럴 거면 프라이드로 간다!라는 선수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링스는 재정 문제가 삐걱거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라이드 입장에선 이 2000 시즌 때는 아주 선수들을 타 단체에서 “제대로 빼오게” 됩니다. 프라이드 최고의 전성기가 바로 이때였는데, 바로 무제한급 토너먼트 1차전인 사쿠라바 카즈시 : 가이 메츠거도 명경기였는데, 이때 사쿠라바가 또 이기면서 팬들 사이에서는 “이대로면 호이스 그레이시의 1차전 승패여부에 따라 사쿠라바:호이스의 대진이 성사될 것” 이란 전망이 나돌았고, 바로 이후 호이스 그레이시도 1차전을 이기면서, “사쿠라바 카즈시 : 호이스 그레이시”라는 전설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원래 당시 무차별급 GP 룰의 경우, 15분 단판라운드로 진행했는데, 이 룰은 ”브라질 선수들에게 상당히 유리한 룰“이었고, 호이스의 1차전 상대는 타카다 노부히코였기 때문에 호이스 입장에선 다소 쉬운(?) 상대였으나 그래도 타카다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와중에도 15분을 판정으로 버티는 경기를 했고, 사쿠라바는 가이 메츠거 전을 TKO로 이기면서, 다소 여유가 있었던 상황에서, 오히려 사쿠라바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기자회견에서 합니다.
“호이스 그레이시와 시간 무제한으로 경기하고 싶습니다.
2일을 하던 3일을 하던 자신 있습니다. “
시간 무제한, 그러니까… 완전히 클래식한 ‘브라질 식 발리투도’ 끝장 승부로 경기를 하겠다는 의미였고, 이대로면 행여 사쿠라바가 이긴다 해도 체력이나 부상 문제 등으로 4강전이 가능한 지가 미지수인 상태로 놓이는 경기였습니다. 그래도 이 제안에 그레이시 도장은 “받아들인다”라고 하면서 특별히 이 경기만은 “시간 무제한 경기” 로 치러집니다. 그래도 일단 “1라운드 15분 룰” 은 지켜야 했으므로 당시 경기는 15분을 경기하고 승부가 안 나면 1분의 휴식시간을 준 후 다시 15분을 하고, 이것을 “이길 때까지 반복” 하는 무한 연장전의 방식으로 진행했던 것이죠.
그렇게 하여 경기 시간은 무려 6라운드, 도합 90분의 경기를 하는데, 이때 사쿠라바는 드디어 “그레이시 가문을 공략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바로 캐치레슬링 식 그래플링을 하면서 타격과 스톰핑을 섞는 방법이었습니다. 참고로 당시 프라이드 룰에서는 스톰핑이 후두부를 가격하지 않으면 반칙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쿠라바는 당시 호이스가 가드포지션에서 사쿠라바가 들어오려고 하면 바로 흉부 스톰핑으로 들어가서 오히려 바로 호이스의 위에서 마운트 후 파운딩이 가능한 상황으로 들어갔고, 파운딩은 파운딩대로 하면서 호이스의 팔이 빠져나오면 기무라로 얽으려 하면서 호이스의 진을 많이 빼놓습니다. 또한 켄 섐락이 공략하지 못했던 부분인 “하체를 공략” 하는 데 성공합니다. 캐치레슬링의 “자유도”를 이용한 전법이었죠. 주짓수와 유도는 대체로 하체보다는 “상체를 많이 노리도록” 되어있고, 그렇기 때문에 하체는 당시 주짓수 기준으로 약간의 “빈틈”이었는데, 그 빈틈을 공략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6라운드 종료 시점에서 당시 세컨드로 있었던 엘리오 그레이시 옹이 수건을 던지면서 경기는 끝이 났고, “사쿠라바 카즈시가 호이스 그레이시를 이겼다”라는 뉴스 하나는 일본의 스포츠뉴스를 도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2001 시즌 이후 프라이드 FC는 문자 그대로 "프라이드 에라"라는 말을 만들어 냅니다. 그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안토니오 이노키가, 대놓고 2000년 연말에 자신의 이름을 건 격투기 단체인 "이노키 게놈 페더레이션"(IGF) 그리고 "이노키 봄바예"라는 격투 이벤트를 개최했을 정도였죠. 물론 첫해는 "프로레슬링 행사" 정도로만 치렀지만, 공교롭게도 이때 프라이드에서 뛰고 있던 사쿠라바 카즈시와 켄도 카신이 "스페셜 드림매치"를 이노키 봄바예에서 가졌을 정도로 어느 정도는 "MMA 원매치"도 섞어서 치렀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 이노키 봄바예는 아예 "팀 K-1 VS 팀 이노키"로 치러져서 "K-1 올스타와 안토니오 이노키가 뽑은 올스타 간 드림매치"로 편성됩니다. 그러나 이때 그만... 신일본 대표로 나갔던 나가타 유지는 미르코 크로캅에게 헤드킥 명중으로 패배, 야스다 타다오는 제롬 르 밴너를 상대로 겨우겨우 신승을 하면서 (문제는 이경기의 판정 자체가 다소 석연치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이노키즘"에 걸맞지 않게 체면을 많이 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아예 "종합격투기" 룰로 진행했던 "이노키 봄바예 2002"에서는... 신일본 대표로 나갔던 야스다 타다오도 KO패, 당시 이노키 도장의 막내였던 나카무라 신스케도 MMA 경기에서 다니엘 그레이시를 상대로 암바로 서브미션 패배, 당시 신일본 IWGP 챔피언까지 먹으면서 이노키의 강한 푸시까지 받았던 후지타 카즈유키 마저도 미르코 크로캅에게 3라운드 풀라운드까지 뛰긴 했으나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3:0 판정패를 당하면서 대놓고 "이노키즘"이 붕괴당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프라이드나 링스 등에서 뛰었던 선수들은 해외 선수들에게 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선수들과는 다르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주도권을 잡긴 했던" 상황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노키가 내세웠던 "프로레슬링은 실전에서도 이길 수 있다"라는 말은 다소 허황된 무언가로 판명된 순간이었죠.
그리고 그와 함께 링스 마저도 "재정난"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면서 주관 방송사였던 케이블 방송사인 WOWOW 방송에서 2001 시즌 말 기습적으로 "일방적 계약 파기"를 하기에 이릅니다. 이게 링스 입장에선 다소 억울했던 것이, 원래 WOWOW 방송국과는 "2002 시즌까지 중계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방송국 측이 도리어 파기를 선언하면서 위약금을 요구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확히는 링스의 재정난의 정도가 방송국에 위약금 청구 소송을 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던 것이었고, 결국 마에다 아키라는 2002년 1월 링스를 "자진 해산" 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링스 출신의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프라이드 이적" 이 결정되었고, 이때 드디어 바로 그들, 에밀아난엔코 효도르와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히카르도 아로나가 프라이드로 오게 됩니다. (이전에는 이 셋은 Rings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2 시즌에는 아예 "K-1과 함께 합동 이벤트" 도 치르게 되니 그것이 바로 "다이너마이트 2002" 였습니다. (물론 이후 2003 시즌부터는 서로 분리되어 K-1 다이너마이트 / PRIDE 남제라는 연말 이벤트로 치러집니다.)
그리고 K-1은 2005 시즌까지 (K-1 다이너마이트에서 스페셜로 치르는 경우를 빼면) MMA 룰로 치르는 HERO's 경기를 한 적이 없었으므로, 입식에서 좀 더 "넓은 물"을 원했던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프라이드로 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입식 선수로 뛰고 있었던 미르코 크로캅과 사타케 마사아키가 프라이드로 가게 되고, 그리고 UFC에서 몇 경기를 치렀던 이 선수가 프라이드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바로, 반달레이 실바였죠. 물론 반달레이 실바는.... UFC에서는 그저 그랬던 선수였습니다. 비토 벨포트에게 졌고, UFC 25에서 티토 오티즈와의 경기에서도 판정패했죠. 그나마 내세울 것은 IVC(International Vale Tudo Championship)에서는 UFC에서 뛴 적이 있던 유진 잭슨을 이기면서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은 거기서 따긴 했다는 점과, 빅카드가 아닌 선수들을 상대로는 승리를 따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2001년 3월 프라이드 13에서 치러졌던 반달레이 실바 : 사쿠라바 카즈시는 처음엔 "사쿠라바가 이길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근거도 합당했는데, 당시 반달레이 실바가 프라이드에서 가졌던 경기가 가이 메츠거전-길버트 아이블전-댄 핸더슨 전 3경기였는데, 가이 메츠거전은 메츠거를 상대로 1 다운을 성공시키고도 바로 다음 라운드에서 버팅 파울을 범해서 이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겨우 KO를 시켜서 신승을 한 상황이었고, 길버트 아이블전은 로우블로 파울이 1라운드 시작부터 일어나서 무효, 댄 핸더슨 전마저도 프라이드 12까지는 금지였던 "4점 포지션 공격"을 해버리면서 그래도 이기긴 했지만 "자꾸 반칙을 한다"라는 논란에 서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프라이드 12 대회 때 이후 4점 포지션 공격은 반달레이 실바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다소 논란스러운 판정을 남겨서, 결국 프라이드 13부터 "4점 포지션 공격" 즉, 하늘을 보고 누운 상태/거북이 자세로 엎드린 상태 (팔, 다리의 4개의 부분이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의 니킥과 스톰핑이 허용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프라이드 13에서 뚜껑을 열어보니... 반달레이 실바는 이미 UFC나 IVC, 이전 프라이드 경기에서도 인정을 받았던 타격 압박으로 사쿠라바를 압도하더니, 이후 그라운드 싸움에서는 달라진 룰을 이용, 4점으로 수구리는 사쿠라바에게 오히려 파운딩과 니킥을 선사했고, 이대로 경기는 레퍼리 스탑으로 실바의 승리. 이렇게 사쿠라바 카즈시의 무적의 행보는 바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 프라이드에는 굉장히 많은 격변이 있었는데, 판크라스에서 뛰고 있던 (후에 K-1의 "끝판왕"으로 불리게 되는) 새미 슐트가 2000 시즌 후반 프라이드로 와서 경기를 하게 되고, 미르코 크로캅도 프라이드에서 빠르게 종합격투기 룰에 적응하면서 승수를 쌓았으며, 링스에서 이미 인정을 받았던 효도르와 노게이라도 승수를 쌓으면서 실바의 입지에 위협이 오게 됩니다. 그나마 실바는 일본인 선수들을 상대로는 연승을 하고 있었고, "프라이드 미들급 초대 타이틀전" 이 걸렸던 사쿠라바 카즈시의 리벤지 매치에서도 이기면서 "일본 선수 상대로 전승+프라이드 첫 미들급 챔피언"을 달성하지만, 이미 다른 외국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는 이상 실바도 결국엔 "해외 선수들끼리 방어전에서 붙어서" 실력을 검증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죠.
그렇게 하여 2002년 4월 28일 프라이드 20에서 드디어 실바와 크로캅의 경기가 부킹이 되는데, 이 경기는 "판정을 하지 않고 3라운드 경기까지 KO, 서브미션이 나오지 않으면 무승부"로 처리되는 특별룰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이 경기에서 "실바의 약점" 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스탠딩 타격, 이미 입식 룰에서는 달인이었던 미르코 크로캅은 스트라이커 싸움에서는 실바를 압도했고, 결국 안 되겠다 싶은 실바는 그래플링 싸움으로 작전을 바꾸고 나서야 겨우 크로캅에게 내준 주도권을 "반반싸움"까지 끌고 가는 데 성공합니다. (만약 판정까지 갔을 경우 실바가 겨우 이겼을 수도 있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어느 쪽도 KO나 서브미션을 내지 못해서 무승부 처리가 되었고 실바는 이때 갈비뼈 쪽 부상을 입게 되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실바도 약점이 있긴 할 거다"라는 평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실바가 토너먼트 체급으로 선택한 미들급에서는 여전히 실바가 강했고, 이후 다시 리벤지를 신청한 사쿠라바 카즈시에게 3차전도 완승, 그리고 그다음 해 프라이드 GP 2003 미들급 토너먼트에선 유도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요시다 히데히코를 상대로 완승, 그리고 바로 2003년 미들급 GP 토너먼트 결승에서는 퀸튼 잭슨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기는 합니다. 다만 이때 요시다전과 퀸튼 전에서 먼저 테이크다운을 허용했다는 점이 실바에겐 다소 꺼림칙한 부분으로 남았던 것이란 점입니다.
헤비급의 경우엔 효도르가 "60억 분의 1의 사나이"라는 이름으로 챔피언을 얻기 전까지 문자 그래도 "춘추전국"의 시대라는 말이 맞았습니다. 2000년 당시 (바로 사쿠라바:호이스의 명경기가 있던 그 토너먼트입니다.) 결승에서 이고르 보브찬친을 이기면서 무차별급 우승을 했던 마크 콜먼이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에게 패배하면서 바로 강자의 지위가 노게이라에게 넘어갔고, 그 노게이라는 후에 헤비급 챔피언 초대 결정전에서 히스 헤링을 이기면서 초대 챔피언에 올랐지만, 2002년 다이너마이트에서 밥 샙에게 정말 "질 뻔"했다가 겨우 2R 서브미션 역전승을 했고, 새미 슐트전 승리 이후 링스에서 이미 패배를 당한 적이 있던 댄 핸더슨과의 방어전에서 승리를 한 것까진 좋았는데, 2003년 3월 프라이드 25에서 또 다른 라이벌인 효도르에게 패배하면서 챔피언 타이틀이 효도르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프라이드는 더더욱 "선수 영입"에 박차를 가합니다. K-1에서 뛰고 있던 마크 헌트, 그리고 판크라스에서 에이스 선수로 불렸던 콘도 유키가 프라이드로 이적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프라이드의 일본 MMA 재패"로 보일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 와서 보면 "굉장히 무리한 투자"였던 것이기도 합니다.
보통, MMA 대회를 개최한다고 하면 "많은 자금" 이 필요합니다. 최근 정찬성 관장이 ZFN을 열게 되면서 털어놓은 고충 중 하나가 "스폰서 구하기가 참 힘들었어요"라고 할 정도로 MMA라는 종목은 경기 운영 비용과 선수들에게 지급되어야 하는 파이트머니, 그리고 방송사 중계권료, 메디컬 상황 발생 시 지급해야 하는 보험금 등의 회계처리 사항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그런데, 그나마 정찬성 관장의 경우, 그래도 UFC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TKO 그룹의 간접 지원, 즉 UFC 파이트패스 입점 리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이 부분을 어느 정도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라이드는... 이런 시스템이 미비했습니다. 그나마 명목상으로는 Dream Stage Entertainment라는 회사의(이하 DSE) 법인이 있었지만, 이 법인의 회계가 아주 투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프라이드가 도산 발표를 하고 난 후인 2007년과 2008년에 걸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제공한 존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안토니오 이노키"였습니다.
상황은 2003 시즌으로 돌아갑니다. 2003 시즌부터는 프라이드도 "남제"라는 연말 그랜드파이널 행사를 치르기로 하면서 이노키 봄바예에는 선수를 보내지 않게 됩니다. K-1의 경우는 "입식 룰이 아닌 MMA 룰로 치르는 경우만" 조건부로 이노키 봄바예로 출전을 허용하고 있었고 그 외에는 무조건 K-1 다이너마이트 2003에만 출전을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서 안토니오 이노키가 그래도 이름값으로 제대로 2002년까지 이벤트를 할 수 있었던 이노키 봄바예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안토니오 이노키에 대해서 다시 설명해 드리자면... 이 사람,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오오키 킨타로, 즉 김일의 라이벌로 뛰었던 무적의 선역, 투혼의 파이터" 였지만 링 밖에서는 "안하무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빌런으로 악명이 높았고, 중년에 바로 이 이노키 봄바예 2003의 개최를 놓고 결국 정치인 생활로 한동안 봉인(?) 되었던 빌런 본성이 발휘되고 맙니다. 바로 이노키는, 냅다 "에밀아난엔코 효도르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때렸고, 처음엔 효도르의 매니저 측이 "DSE 측과의 약속을 깰 순 없고, 현재 효도르는 개리 굿리지전 경기 후 메디컬체크에서 손 부상으로 인한 장기 결장이 확인되어 재활 중이다" 며 거절한 것까진 좋았는데....
"이노키 봄바예 2003에 출전만 해주면 DSE에서 부르는 돈의 몇 배는 더 줄 수 있다"라는 폭탄 딜 (혹은 이면 계약)로 에밀아난엔코 효도르를 IGF(당시 이노키가 UFO라는 격투기 단체의 후신으로 만든 곳입니다.) 로 빼내오는 데 성공합니다. 이노키는 아예 작정하고, UFO를 만들었을 때 활동했던 오가와 나오야도 다시 데려오려 했고, 당시는 중소단체에서 뛰었던 리치 프랭클린과 료토 마치다도 이 시기에 데려와서 "그럭저럭 IGF도 프라이드에 견주는 단체"로 만드려고 했었습니다. 시기도 적절은 해 보였습니다. 판크라스는 프라이드에 선수를 자꾸 뺏기지, 링스는 이미 2002 시즌에 없어졌지, 슈토도 그나마 에이스나 다름없던 엔센 이노우에를 프라이드로 뺏기고 나서 시들시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쨌든 프라이드에서 선수만 빼오면" 그래도 2위 단체를 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노키 봄바예 2003을 앞둔 11월 말,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확하게는 대놓고 프라이드에서 "요시다 히데히코"를 영입하려다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노키 봄바예는 2003 시즌엔 닛테레(니혼 TV)에서 중계 예정이었고, 프라이드 남제 2003은 후지 TV에서 중계예정이었습니다. 문제는 니혼텔레비전과 후지테레비는 도쿄권역 방송국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라이벌 관계" 였는데, 그래도 서로의 선을 넘지는 않는 선에서 영업을 해왔습니다. 문제는 이노키가 아예 니혼텔레비전 측에 "요시다 히데히코에 미르코 크로캅까지 빼올 수 있다" 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니혼텔레비전에서는 그냥 "에밀아난엔코 효도르 : 나가타 유지의 코메인이벤트 / 후지타 카즈유키 : 이맘 메이필드의 프로레슬링VS프로복싱 메인이벤트" 정도만 적당히 할 줄 알았는데, 대놓고 "타 방송사 출연이 예정된 선수를 빼오겠다"는 이노키의 황당한 제안에 "이건 처음 약속과 다르지 않냐"라는 이유로 거절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요시다 히데히코의 소속 에이전시와 후지 TV 그리고 DSE도 동시에 알아버렸다는 것이고, 결국 이 소식을 같이 들은 미르코 크로캅의 매니저 측은 아예 대놓고 이노키 봄바예와 IGF 측에 "우리는 참가 안 한다"라는 소식을 전하며 불참합니다. 일은 커졌고, 결국 이노키는 플랜 B로 판크라스 측에 연락하여, 판크라스 헤비급 방어전인 조쉬 바넷:새미 슐트의 경기를 긴급편성해야 했죠.
그리고 12월 초, IGF의 직원들은 갑자기 "야쿠자"들의 협박을 받게 됩니다. 바로 "에밀아난엔코 효도르를 왜 IGF로 데려온 거냐"라는 이유였는데, 안토니오 이노키는 이때 직감을 하게 됩니다. "프라이드가 엄청난 자금력의 동원이 가능했던 이유"를 말이죠. 물론 효도르는 12월 31일 이노키 봄바예 2003에서 나가타 유지와 경기를 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그러고도 위의 여러 문제로 인해, 이노키 봄바예 2003의 시청률은 K-1 다이너마이트 2003에서 "스모 요코즈나 출신인 아케보노를 KO시킨" 대활약을 해버린 밥 샙에 밀려 "시청률 꼴찌"를 해버렸고.... 니혼텔레비전은 결국 IGF 측에 연초에 했던 "이노키 봄바예 3년 중계 계약"을 파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2004 시즌 효도르는 다시 프라이드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는 이 사건과 다른 비리 사건에 얽히면서... 결국 자신이 세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도 축출되며,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게임회사인 유크스에 인수당하는 운명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야쿠자의 개입은 "프라이드의 운명" 까지도 결정해 버린 사건이 됩니다. 물론 2004 시즌과 2005 시즌은 그럭저럭 순항했고, 경량급을 위한 체급인 "부시도" 도 이때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UFC와 프라이드의 "상호 불가침"과도 같았던 해외투어를 "프라이드 측이 먼저 추진"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그 사이에 "60억 분의 1의 사나이" 라던 에밀아난엔코 효도르의 연승마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의 남제, 히카르도 아로나와 반달레이 실바의 명경기가 펼쳐졌고, 거기서 드디어 히카르도 아로나가 실바의 미들급 챔피언을 탈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2006 시즌 도중, 이노키 봄바예 개최를 주도했던 회사였던 "K-컨피던스" (이 회사가 이노키와 함께 IGF를 만들었던 업체입니다.)의 대표였던 카와마타 대표가 주간 겐다이지 기자에게 충격 폭로를 해버립니다. 이때는 2006년 5월이었습니다.
"2003년 12월 당시 DSE의 모리시타 나오토의 사망, 효도르 계약 관련 사건에는 DSE 경영진인 모모세 히로미치가 관여해 있고, 모모세는 야쿠자와 결탁하였다. 그리고 이 결탁은 PRIDE의 자금줄이 되어주었다!"
위에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바로 이노키 봄바예 2003 개최를 앞둔 며칠 전, 1997년 프라이드 01 대회의 개최를 이끌어냈던 DSE의 모리시타 나오토가 갑자기 도쿄 힐튼호텔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 되었는데, 이때는 사인이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 "의문사"로 처리되었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야쿠자"의 개입으로 밝혀진다면, 이것은 심각한 사안이었던 것이죠.
처음에는 DSE 측에서는 카와마타 대표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며 "이것은 허위사실이다!"라고 했으나.... 2000년대 초중반은 당시 야쿠자를 "근절" 하겠다는 이유로 1991년에 내놓은 "지정폭력단대처법"을 일본 국회(중의원-참의원 모두 해당)에서 조금 강화시켜 놓았던 상황인데, 이것을 일단 도쿄 경시청과 일본 검찰은 "조사"를 해봐야겠다 하여 조사를 개시하였고 이 DSE와 야쿠자 조직 간의 결탁은 2006년 가을까지의 조사 결과....
결국 2006 시즌 남제를 앞두고 타카다 노부히코마저 "우리는 모모세 히로미치에게 속았습니다!"라고 하면서 기자회견까지 해봤지만... 프라이드에 대한 신뢰도는 수직하락했고, 아니나 다를까, 2006 남제에서는 그 에밀아난엔코 효도르 마저도, "K-1 출신의" 마크 헌트에게 패배하면서 60억 분의 1의 사나이의 시대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2007 시즌, 프라이드 FC는 "매각 절차 개시"를 발표하고, UFC에 인수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