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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HSonG Jun 27. 2024

이노키 VS 알리, “이종 격투” 의 시대

시대를 지나 벌어지는 “세계의 충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옥음방송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일본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참혹한 미래” 뿐이었습니다. 당장 GHQ 체제하에서 “세계 질서에 맞추어서 일본이 강제 개편” 되어야 했던 것도 그것이지만 “패전국” 으로써 뒤집어써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점령지를 잃어야 했고, 그중 일부는 “적산” 으로 처리되어 각국에 몰수되거나, 그게 아니면 미국이나 영국의 자본으로 인수되거나, 소련에게 몰수되어 “국유화”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전쟁 직후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와 “미국”이 일종의 “동상이몽”을 꾸면서 독일과 같이 땅이 쪼개지는 것은 오히려 그 옆 한반도가 당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운이 좋은” 상황을 맞았지만 딱 그것뿐. 그 외에 일본은 “올림픽과 월드컵 출전이 제한당하는” 상황을 독일, 이탈리아와 같이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서” 해외로 떠나야 했던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탄광사업을 운영하다가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그 탄광이 모조리 “적산”으로 분류되었고, 그렇게 하여 도산해 버린 것에 대한 충격으로 가장이 1948년 급하게 사망해 버리면서 그 무너진 가세를 살리기 위해 가족이 브라질로 이주를 합니다. 그리고 그 집안엔 1943년생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이노키 칸지”였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난 흑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흑백갈등이 남아있긴 했지만,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가세가 그럭저럭 중산층까지 올라간 집안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캐시어스 클레이 주니어”였습니다.




일단 이 두 어린이들의 시간은 조금 뒤로 젖혀두고 전쟁 직후의 상황은 미국이 그래도 “일본 사람들의 민심도 달래면서” GHQ 점령 하의 일본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것은 “신적 강하”로, 덴노의 “국가신토의 신의 지위“가 없어진 그냥 ”인간의 지위“ 로 내려가는 대신, 전쟁의 책임은 그 밑의 ”관료 대신들 “ 그러니까 수상 아래에게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일본 사람들에게 수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도 그 위의 덴노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덴노를 냅다 제거하고 민주정을 세워버리면, 일본 사람들의 반발이 클 것이라 우려했고, 이미 그 조짐이 보이자, 소련이 그것을 노려 일본 내에도 소위 ”공산당“ 을 이미 만든 상태였던 고로 (그게 지금의 일본공산당이 됩니다.) 그리하여 덴노는 ”인간으로 지위가 내려가는 “ 대신 그 밑 기시 노부스케와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각료와 군 수뇌부만 ”A~B급 전범“ 으로 처리하여서 처벌하는 절충안으로 전후처리를 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큰 불만은 잠재우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원자폭탄“을 썼다는 것, 그리고 어쨌든 이것도 ”맥아더 사령관이 일종의 막부처럼 군림“한 형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GHQ 체제를 ”일본 최후의 막부 체제“라고도 하기도 합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죠. 맥아더의 UN군과, 주일미군, 즉 USFJ가 다스리는 막부나 다름없던 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일본 내에서는 자기네들 안에서 반성을 하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조선인이 이간질을 해서 그랬다느니, 미국의 스파이 짓을 했다느니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미국과 협력해 이른바 “한반도 진공작전” 과 OSS를 도운 스파이 작전을 하긴 했습니다.)  과거 류큐인들이 오히려 비협조적으로 굴었다느니 (오키나와 전투 때 이른바 “류큐주의자”라고 하는 일본 정부에 비 협조적인 사람들이 있긴 했습니다.) 등의 이유로 인종차별을 멈추지는 않은 상황이었고, 그 사이에 스모계에서 다른 이유로 (특히 일탈행위를 해서) 찍혀있던 “리키도잔”이 이것에 일종에 반발하여 대놓고 일본 스모협회에 “스모 선수를 은퇴하겠다”라고 하며 스모선수를 관둬버립니다. 문제는 이 은퇴의 방식이 너무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방식, 그러니까 집에 있던 식칼로 냅다 상투(촌마게)를 잘라버린 지라… 스모협회에서 리키도잔에게 정식적인 은퇴 절차를 치를 수 없는 소위 “웃픈” 상황이 벌어져 리키도잔은 이른바 “퇴출 처리” 형식의 은퇴 처리가 되었고, 그리하여 제대로 된 은퇴 축하금도 받지 못해 방황하던 찰나, 바에서 만난 어느 사내인 “해롤드 사카타”라는 사람을 통해 프로레슬링이란 것을 접해 “프로레슬러” 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는 당시 전후 패배감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에 맞춘 이른바 “국뽕 각본” 즉 “일본인 리키도잔이 귀축영미의 사내들을 상대로 싸워 이긴다”라는 심플한 각본 하나로 일약 대스타가 되어 있었죠. (그리고 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리키도잔 본인도 일본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면서 이걸 더 확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리키도잔이 브라질에 투어를 가게 됩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지난번 아메리카 이야기를 할 때 브라질에 잔뜩 간 이민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리키도잔은 브라질에 이주한 일본인들에게도 이미 알려진 스타였고, 그런 그가 브라질에서 NWA 투어 쇼매치를 치른다는 것을 보러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는 그 “이노키 칸지” 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동안 이노키는 브라질 현지에서 힘든 농장 일을 하면서 투포환 운동을 했고, 그래서 ”투포환 선수“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일본의 대스타 리키도잔이 온다는 소식에.. 한번 “리키도잔의 밑에서 프로레슬링이라는 것을 배워볼까”라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그런 그는 리키도잔의 경기를 보고 난 후 리키도잔을 직접 찾아가서 “프로레슬링을 배워보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리키도잔은… 그런 그에게 “도쿄로 오라”라는 말을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그는 다시 도쿄로 돌아온 “귀국자녀”가 됩니다.




다시 미국으로. 캐시어스는 흑인이긴 했지만 오히려… 소위 ”깡다구“라는 게 있어서였을까,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애들을 대놓고 ”힘으로 “ 박살 내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그 당시 영화를 하나 보겠다고 동네 극장에 자전거를 세워뒀는데… 그만 그 자전거를 도둑을 맞고 맙니다. 문제는 그래서 캐시어스가 경찰에 “도둑을 잡아주세요! “라고 분실신고를 했지만… 아… ”흑인 어린이“의 분실 신고를 시큰둥하게 여겨 대충 “알았어 알았어, 자전거 찾아줄게”라고 시큰둥하게 넘기는 경찰. 그런 시큰둥함을 참지 못한 캐시어스는 한마디를 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 도둑을 찾게 되면 제가 그냥 혼내줄 거예요!!!”


이 12살 어린이의 화난 모습이 귀여웠던 건지, 그걸 듣고 있던 어느 경찰이 그런 캐시어스에게 “흠, 그러려면 복싱이란 것을 해야 할 거야”라고 합니다. “복싱”이라는 단어를 들은 캐시어스, 뭔가 눈이 번쩍 뜨인 그는 바로 가족들을 설득해 동네 복싱 짐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필 그 당시 영화 “록키”의 모델이라고 하는 전설의 복서 “록키 마르시아노”의 경기가 라디오로 중계되고 있었고, 그것을 보거나 들은 것도 영향이 있었다 합니다.) 그래도 재능은 있던 것인지. 그는 6년 만에 “미국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에 선발이 되어 “18살의 나이로”  1960년 로마 올림픽에 가게 됩니다. 이거에 대해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가 중학생이던 시절, 그의 반에 있던 백인 선생이 “복싱을 한다고? 너 같은 깜둥이가 성공을 할리가 없어”라고 핀잔을 주었다 합니다. 지금이라면 인종차별 건으로 미국 전역에 난리가 났을 텐데, SNS가 없었던 것이 그 선생에겐 다행이었겠습니다. 아무튼 그 발언은 오히려 캐시어스를 자극시켰고, 오히려 전미 아마추어 “180승”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달성하며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이기게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실력은 올림픽으로 이어져, 그는 “18살의 나이에 복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프로로 전향, 라이트헤비급이던 것을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리게 됩니다.


1960년 로마올림픽 우승 당시의 캐시어스 클레이 (무하마드 알리) (출처-IOC 사진 아카이브)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 것은 좋았는데, 미국 내에서는 다소 입장이 복잡했습니다. 이유는 이놈의 캐시어스가 “흑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프로복싱 쪽에서는 흑인이 챔피언 내지 챔피언 컨텐더라는 것으로 백인 선수들이 경기를 거부하는 등의 홍역을 이미 치렀는데, 일단 올림픽은 이게 덜했다는 점이고 (일단 베를린 올림픽 때 대놓고 유대인 차별을 했던 것에 대한 반성 차원이 컸습니다.) 그래서 캐시어스가 메달을 따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흑백갈등의 기폭제 아닌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런 캐시어스에겐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써의 결격사유가 없다!!!라고 변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먼저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리고 맬컴 엑스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개신교 쪽으로의 흑인 민권운동을, 그리고 맬컴 엑스는 이슬람 쪽으로의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었는데, 마틴 루터 킹이 “온건파”에 속했고, 맬컴 엑스가 “강경파”에 속했는데, 공교롭게도 마틴 루터 킹이 그 유명한 ”I Have a Dream” 연설을 한 것이 1963년이고, 맬컴 엑스가 그가 이끌던 강경파 이슬람 흑인운동 조직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 (NOI) 이 가장 최대규모의 인원을 찍었던 것도 1963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캐시어스 클레이는… 강경파였던 지라. 직접 맬컴 엑스를 찾아가서 NOI에 가입을 합니다. 문제는 이 “캐시어스 클레이” 가 약간 개신교 쪽 이름이었던 지라, 이슬람으로 같이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하마드 알리” 였던 것이지요.


맬컴 엑스와 알리 (출처 - NPR 뉴스 아카이브)


그런 그에게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먼저 첫 번째는 1965년, 자신의 멘토와도 같던 (물론 이후 맬컴과 알리가 흑인운동 노선 관련으로 살짝 틀어지긴 했지만) 맬컴 엑스가 1965년 암살을 당했고, 그 후 1967년 베트남전 징집 거부로 인해 “챔피언을 무려 3년 5개월간 박탈” 당했던 것이지요. 참고로 이때는 오히려 개신교 쪽인 마틴 루터 킹 마저도 알리를 옹호할 정도였는데, 문제는 그 마틴 루터 킹 마저 그다음 해인 1968년, 암살을 당하면서… 알리의 “평화주의자” 활동은 약간 빛을 바란 상태가 됩니다. 흑인들이 맬컴 엑스를 잃은 것도 모자라 마틴 루터 킹마저 잃자, 더 이상 “온건하고 평화로운” 저항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껴 강경파들이 득세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류에 따라 알리의 빈자리를 채운 강자들이 나타났으니 그들이 바로 “조 프레이저” 와 “조지 포먼”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리의 항변이 정당하다는 흑인들의 탄원과 (놀랍게도 이것을 탄원한 사람 중엔 그와 나중에 붙었던 조 프레이저도 있었습니다!) 알리가 법정에서 직접 자신의 무죄를 항변한 끝에 법원에서는 그를 무죄로 풀어주어 그는 1971년 선수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이 이노키 칸지는 어땠을까요? 이때 이노키는 리키도잔으로부터 닉네임을 받습니다. “귀국자녀”라고 하기엔 당시에 “저 또 외국물 먹은 놈이구만” 이란 식으로 야유를 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리키도잔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이른바 “국뽕 각본”을 계속 밀곤 했는데, 아무래도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인” 기믹을 넣는 게 낫겠다 생각한 그는 이노키에게 “일본계 브라질인”이라는 설정의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닉네임을 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브라질 생활로 인해 일본어가 다소 어눌했고 (어릴 때 브라질로 이주한 것이 크게 작용했죠.) 키가 컸다는 점이 컸습니다. (191cm였습니다.) 물론… 비슷한 시기 같이 들어온 동료들도 키가 컸던고로… 이노키의 키가 그렇게 크다는 점이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일본 내 선수들과의 프로레슬링 쇼매치에서는 이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비슷하게 들어온 역도산 도장의 제자들이… 하필이면 2m가 넘는 거구이고, 야구선수를 하다 왔던 “바바 쇼헤이”, 그리고 한국에서 온 “김일”이라는 청년이었고, 연배도 비슷해서, 이 셋은 바로 친해집니다. (물론 리키도잔의 다소 과격한 훈련과 구타와 폭언이 기본인 훈육방식으로 인해 셋 다 스승에게 사이좋게 맞으면서 동병상련이 되었다는 블랙유머도 있습니다.)


초기 역도산 도장 인원들, 앞줄은 역시 이노키, 바바, 김일이 있었습니다.(출처 - https://x.com/allan_cheapshot/status/732214065708343)

그렇게 하여 이노키와 바바, 김일이 셋 다 사이좋게 활동한 것은 좋았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1963년 12월, 역도산이 사망을 하게 됩니다. 역도산이 클럽 화장실에서 어느 한 야쿠자와 시비가 붙었고, 그는 간단하게 제압했다 생각한 찰나, 그 야쿠자가 칼을 써버려서 역도산을 찔렀고, 병원으로 이송되고 며칠 후, 역도산은 복막염과 그 합병증으로 사망합니다. 물론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싶은데… 역도산이 사후에 제대로 된 후계자를 세워놓지 않고 가버린 것이 화근이 되어,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는 내분이 일어납니다. 그 사이에 김일은 한국으로 갔고, 그 사이에 내분은 격화, 이노키는 그 사이에 반기를 들었다가 쫓겨나 저니맨 생활을 하고,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는 바바 중심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이 단체가 지금의 “전일본 프로레슬링”이 됩니다. 물론 이 사이에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건 아주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하도록 하죠.


그렇게 하여 이노키는 일종의 “저니맨” 이 되는데, 이대로 몰락할 수는 없다 생각한 이노키는, 아예 “캐치레슬링”을 배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때의 상황을 다시 설명하면, 당시 프로레슬링은 지금과는 다르게 수틀리면 이른바 “시멘트”라고 하여 실전 싸움 상황 등의 돌발상황이 자주 나오는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일본의 프로레슬러들은 다소 “무도가 출신” 들이 채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체로 스모와 가라테 출신이 많았고, 그다음은 유도 선수 출신이었는데, 이때는 유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도 아니었던 것에 더해, 일본이 전범국 처분으로 인한 올림픽 출전 금지가 걸리면서 유도가들이 다소 가난해진 상황이 많았고, 그로 인해, 유도가 중 대가라 불렸던 기무라 마사히코 마저도 ”프로레슬링으로 먹고사는” 처참한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역도산, 즉 리키도잔과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 “쇼와의 간류지마” 사건으로 알려진 폭력사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캐치 레슬링”을 한다는 것은 올림픽 레슬링 보다 더 기술의 가짓수가 많고, 실전에서도 활용이 가능하다란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무언가였으므로, 그는 캐치 레슬링을 배울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카를 “곳치” 이스카즈라는 벨기에 선수에게 사사를 받는데, 그는 초기 캐치 레슬링을 수련했던 사람 중 한 명이자, 벨기에 국가대표로 1948년 올림픽 자유형 레슬링에도 출전했던 선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칼 고치“ 라고도 불린 카를 이스카즈

그런 카를 곳치의 밑에서 캐치 레슬링을 포함한 자유형 레슬링을 배운 이노키는 이제 단순히 “쇼맨” 프로레슬러가 아니었습니다. 리키도잔의 밑에서 스모의 타격기나 다른 동료들의 가라테의 타격기, 그리고 곳치에게 배운 그래플링 기술로 인해, 그는 이제 엄연한 ”그래플러“ 가 되었고, 그런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레슬링이야 말로 스포츠의 왕이다! “라는 모토로 1972년 3월, 일본의 몇몇 저니맨 프로레슬러들을 모아 도쿄에 ”이노키 도장“ 을 세우고, 프로레슬링 단체를 만드니, 그게 바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이었죠.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지난 2022년 “개양 5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신일본도 홍보를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올릴만한 아이디어를 찾다가 생각해 낸 것은 “무하마드 알리”가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해가 1976년이었고, 그에 맞춰서 안토니오 이노키는 “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프로복서 챔피언 출신인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하겠다. 정면승부로!”라는 공식발표를 내버립니다.


물론 썸네일은 “사기극” 처럼 써졌지만 사기극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출처 - SBS에서 정리한 이노키-알리 경기)

문제는, 당시 이 매치를 하기로 한 알리의 프로모터 측과, 신일본 측도 “복싱과 레슬링의 경기는 좋다 이거야… 그런데… 룰은 어떻게 짜야함?”이라는 난제에 부딪힙니다. 여기서 드디어 “일본 프로모터들과 미국 프로모터들의 시각차이” 가 드러났는데, 일본 쪽 (신일본) 입장은 “우리는 과거 1960년대 오오야마 마쓰다쓰의 전례에 따라 그냥 제약 없이 풀컨택트 경기로 하는 게 맞지 않느냐” 란 입장이었고, 미국 쪽 복싱 프로모터 입장은 “복서는 킥을 쓸 수 없으니 불리하다. 그러니 허리 아래 타격이나 킥을 쓰면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알리 본인도 “레슬러는 잡아 던지기가 가능한데, 복싱이 불리한 거 아닌가?”라는 입장이었죠. 그 와중에 조율 회의 겸 상호 스파링 공개를 하던 도중 이노키가 “엔즈이기리” 즉 킥공격을 “상대 머리 쪽에 바로” 쓴다는 점을 보고 알리는 “나 못해! 아니 저리 날라 찬다고?”라는 입장으로 강경하게 들어가면서 무산 위기가 됩니다. 결국 그래서 프로모터들끼리 “매치는 무산시킬 수 없으니” 어떻게든 머리를 쓴다고 조율 끝에 내놓은 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노키:알리의 경기 룰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 알리는 양측이 일어선 상태에서의 허리 아래 타격을 금지한다
- 알리에게 그래플링은 허용하나, (테이크다운 후 쓰러진 이노키에게) 파운딩은 금지한다.
- 이노키는 로프 터치와 (클린치를 포함한) 그래플링이 금지된다.
- 이노키는 양측이 일어선 상태에서의 허리 위 타격을 금지한다.


문제는, 이게 자세히 잘 보면… 알리는 “복싱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노키는 “레슬링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게 싸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급의 룰이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알리는 누운 이노키에게 파운딩이 불가능했고, 이노키는 알리에게 위로 찹을 한다거나, 킥을 한다는 것, 혹은 클린치 자세로 안고 매달리는 것도 안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노키는 “안 하는 것보다는 손발이 묶인 심정이긴 하지만, 암튼 해보겠다 “라고 하여 매치는 그렇게 성사가 됩니다.


어쨌든 그리하여, 이 세기의 경기는 성사됩니다 (출처-AP통신 뉴스 아카이브)

그러나 애초에 이렇게 정상적인 룰로 경기가 가능할 리는 없었고, 어쨌든 이노키는 “타격을 하는 방법”을 작전으로 써보기 시작합니다. 일단 알리 기준으로 허리 아래는 손을 뻗을 수 없지만, 자신은 알리를 허리 위로 칠 수 없으니 방법은 “슬라이딩을 해서 킥을 차는” 방법밖엔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누운 상태를 유지해서 알리가 그냥 들어올 때 굴러서 얽는 방법을 쓰기로 합니다. 알리는 그래도 이노키가 허리 위쪽으로 살짝 수그려서 태클로 오면 치면 된다라는 생각보다 심플한 작전 플랜만 있었고, 아무튼 알리는 그냥 최대한 이노키를 “다운시킨다”라는 작전만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1976년 6월 26일의 일본무도관(부도칸)…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그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당시 경기 일부 영상 (출처 - 신일본프로레슬링 공식유튜브)


뭐 결론만 말하자면 “졸전” 그 자체였습니다. 이노키가 슬라이딩으로 다리 쪽을 차는 것을 알리는 카운터 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노키도 위에서 알리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일단 킥이 명중한 후에는 앉아서 룰의 이점을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게 뭐 3라운드 내지는 5라운드 룰이면 모르겠는데… 당시 프로복싱의 “3분 15라운드“ 로 진행된 것이 문제였고… 15라운드 내내 이 장면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뭐 “아예 안 싸운 것” 은 아니었습니다. 알리는 이때 이노키의 킥을 다리로 막고 정강이 쪽이 제대로 부어버림과 함께 골절을 당했고, 이노키도 역시 계속된 킥으로 인해 발에 골절을 입긴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이 경기는 “논쟁” 그 자체가 됩니다. 도대체 서로가 어떻게 작전을 짰길래, 이렇게 지루한 공방만 벌인 것인가…라는 것으로요. 물론 룰의 문제가 제일 컸지만 당시에는 룰이 어떻고는 제대로 말을 안 해주다 보니 그냥 서로 신경전만 벌이다 끝났구나.. 하고 말았다는 것이 문제였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에 이노키가 이 경기에서만 끝낸 게 아니라 몇 번의 실전경기를 더 치르면서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은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그중에 몇몇 경기는 원래는 프로레슬링 식 각본 경기 즉 “워크 매치” 로 하려 했는데, 중간에 돌발상황으로 실전으로 바뀐 경우도 있었는데, 어쨌든 그 상황에서는 정말 “실전 격투 상황”이었으니까요.


이젠 다들 “이노키의 테마곡”으로 아는 “이노키 봄바예”

또한 알리는 또 하나의 선물을 줬는데, 자신의 테마곡이라 할 수 있었던 “알리 봄바예”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똑같이 쓰는 것은 아니고, 이노키의 목소리가 좀 들어가고, “이노키 봄바예!”라는 응원구호가 따로 들어가긴 했지만, 아무튼 이 곡은 이노키에게 “붉은 머플러”와 함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아무튼 알리와 경기를 했던 사람”이라는 것으로 유명세를 얻어 일본의 스포츠 스타가 되게 되죠.


뭐 아무튼 “아예 안하는 것”보단 나았긴 합니다.


물론 그러면서 이노키에게 약간의 “헛바람” 이 들어간 것이 문제였긴 합니다. “프로레슬링이 강하다”라는 프로레슬링 실전주의론, 즉 “이노키즘” 이 이때부터 태동을 해버린 것인데, 이게 깨지기까지는 나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게 문제긴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니 다음에 이어서 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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