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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HSonG Jun 13. 2024

제국주의 그리고 아시아의 “격투가”들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그 사이에 휘말린 아시아의 격투가들

드디어 시대는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니, 그것은 “1910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에는 “한국”도 포함이 되겠지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뀐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일본에게 병합을 당한 해”가 1910년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한국만 겪은 폭풍은 아니었습니다. 중국도 청나라 시절 1840년과 1860년까지 무려 2번에 걸친 아편전쟁으로 인해 청나라는 문자 그대로 “껍데기만 남은” 곳이 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화단 사건” 이 일어났는데, 이때 의화단이 내세운 “부청멸양”은 열강들의 심기를 크게 건드려버렸습니다. 사실상 청나라 왕조에 끝장을 고해버린 일이 되었죠.

지식해적단 채널에서 정리한 1-2차 아편전쟁


태국, 정확히는 시암 왕국마저, 라마 1세의 치세가 끝나고 나서 그나마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쬐에에끔” 나았다 뿐이지, 라마 4세에 와서는 영국과 일본이라는 거대한 “외세”를 정면으로 상대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나버린 것이죠. 그나마 라마 5세 때 와서 “대나무 외교”라는 태국의 역사에 남을 외교 작전으로 “그나마 2번의 세계대전기에서 피해를 제일 덜 입은” 동남아시아 국가가 되긴 했지만, 문제는 태국 빼고 나머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 2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반쯤 문자 그대로의 “생지옥”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대나무 외교라는 것이 결국 시암왕국의 영토나 정복지 중에서 “외곽지”를 열강들에게 떼어주는 방법이었는데… 이게 말이 좋아서 “할양”이지, 결국 아프리카식 식민지 땅따먹기 싸움의 초미니 버전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그 라마 5세가 “1910년에 승하” 했다는 게 태국도 큰 문제였죠.


국립외교원 채널에서 정리한 태국의 "대나무 외교" 정책


한반도는 일본이 점령했고, 중국도 그 청나라 왕조가 “숱한 농민봉기” 가 일어날 정도로 최악이었고 (신해혁명은 바로 그다음 해 1911년 터집니다.) 태국도 그나마 나라를 “독립국”으로 지켜냈다던 선왕 라마 5세가 승하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4년 후 저 먼 유럽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총성으로 “전쟁”은 시작되었고, 전쟁은 유럽에서만 시작되는 줄 알았더니, 얼마 안 되어서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또 얼마 안 되어서 일본이 “중국 대륙의 독일 조차지를 내놓아라”라는 이유로 칭다오 공습을 하면서,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연이어서 참전하면서 전선은 아시아와 중동까지 커져버립니다. 그리고 1차 대전이 1918년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1942년이 오기 전까지 “불안한 평화”가 이어집니다.


JTBC <차이나는 클래스> 에서 재편집한 1차-2차 세계대전 정리


그 사이에, 휘말린 것들은 역시 아시아의 “격투가” 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이 제일 크게 휘말렸습니다. 이미 2번의 아편전쟁 패배로 인해서 “조차지”라는 것이 생겨버렸고, 조차지들은 “치외법권” 즉 청나라의 제도와 법이 적용되지 않던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의화단 사건 당시 생긴 의화단은 백련교 계열의 권법가들이었던 “의화문” 에서 나왔는데, 이들은 청대에서도 “대놓고 무술 수련이 금지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있었다가 의화단 사건 때에 와서야 양지에서 무기와 권법을 들고 날뛰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의화단 사건이 일종의 “반기독교, 반 서양 제국주의” 운동으로 바뀌면서 서양의 공사관과 기독교 선교지인 성당과 교회등을 습격하게 되어 (이것은 서태후가 갑자기 반 외세를 내세우며 의화단을 갑자기 지원하기로 한 게 연유였습니다.) 당시 조차지에다가도 의화단이 공격을 하는 것을 못 참은 서양 열강등이 일종의 “서양 연합군”을 만들고, 이 서양 연합군이 베이징과 톈진 공습작전으로 의화단을 진압한 이후, 그 조차지에서의 ”무술 수련“마저 금지당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식해적단 채널에서 정리한 화교 네트워크의 역사


그래서 그나마 친척들이 하던 일을 돕거나 그렇지 않으면 역시 스트리트 파이트 등으로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보통 그런 곳들은 ”약방“ 내지 ”찻집“ 혹은 ”요릿집“이었습니다. 후에 이들 중 일부가 해외로 나가서도 비슷한 업종을 하게 되니 이것이 ”화교 네트워크“의 시초였던 것입니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 정책으로 인해서 마을에서 하던 ”씨름과 택견“은 법으로 아예 ”금지“ 되면서 씨름꾼들과 택견꾼들은 문자 그대로 ”한량“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중의 일부는 우리가 그 보던 ”야인시대“ 의 내용 대로 전국 각지에 생기던 갱단, 즉 ”마적 떼“나 ”깡패 무리“에 들어가서 생을 연명하고는 했지요. 그나마 이 한량들이나 권법가들이 그나마 상황이 나았냐 하면, 아닙니다. 당시는 ”권총이 퍼질 대로 퍼진 “ 시대였기 때문에 무슨 낭만적인 격투나 결투를 기대하면 안 되었습니다. 권법가들이나 동네 싸움꾼을 제압하는 데는 ”권총 한방“ 이면 충분했고, 결국 그러면서 아시아에서 무술은 ”도태 아닌 도태“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나마 생존을 하겠다고 그중 일부가 ”다른 대륙으로 가고 나서야 “ 상황은 오히려 나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만 벌어졌지요.




그나마 태국이 상황이 제일 나았던 것은 그나마 중국과 한반도와는 다르게 “식민 지배”를 덜 받았다는 점에서 기인합니다. 그나마 무에타이는 역사가 고대 시암왕국 때부터 있었고 (물론 이 기원에는 설이 분분합니다. 인도의 전통무술 중 하나였던 무스띠 유다(मुष्टियुद्ध)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전래되어서 무에타이가 되었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지만, 이거 외에도 다양한 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태국군의 제식 무술“ 로 쓰고는 있었습니다.(이때는 현대 무에타이에는 없다시피 한 소위 '옛 동작'을 "람무 아이"이라고 불렀으며 택견의 "옛법" 기술과 거의 같은 상대의 급소를 치거나 팔꿈치, 발 등으로 상대를 죽일 수도 있을 급의 공격들을 담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장병기 등의 무기를 다루는 방식이 "크라비 크라봉"이었습니다. 이 두 개를 합친 체계를 "무아이보란"이라고 불렀습니다.) 하필이면 오스만 제국의 참전에 맞춰서 인도가 ”영국을 돕겠다 “고 참전을 하면서 이거에 태국도 일부 병력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참전을 하고, 그러면서 당시 태국군이 근접 백병전에서 고전 무에타이 방식, 즉 "람무 아이"를 사용하여(물론 크라비 크라봉, 그러니까... 총검술 내지 근처에 집히는 막대기나 야전삽을 이용한 전투도 참호전에서 하긴 했습니다.) 전투를 하는 것을 본 타 국 사람들이 ”야 우리도 그거 가르쳐줘 “라고 하여, 무에타이가 드디어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 “수출” 이 됩니다. 그리고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복싱 경기 등을 접했던 태국의 사람들이 “그냥 우리도 서양 복싱처럼 무에타이 경기를 할까?”라고 하여 다소 살상을 일으키는 (무아이보란으로 분류되는) 기술들을 제한하고, 경기 규정을 다듬어 우리가 아는 “타이 복싱” 스타일의 무에타이 경기가 시작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의 택견처럼 “큰 마을 마당” 내지 넓은 공터에서 대련을 했기 때문에 “링이라는 제한된 공간” 에서 하는 무에 타이 대련은 신선한 무언가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주로 했던 경기장인 라차담넌이 "무에타이의 성지"가 되었죠.)


1929년 방콕에서 있었던 무에타이 경기 영상 (AP통신 영상 아카이브)




그리고 중국은 바로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청나라 왕조”가 무너지고 그 위에 군벌들과 민족주의자들만이 남게 됩니다. 바로 “중화민국”의 시작이 되는데, 이때 즈음에 같이 생긴 것이 있습니다. “정무체육회”입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이 바로 ”곽원갑“ 으로, 이 사람은 청나라 말기, 가업으로 무술을 하던 집안이었던 곽은제의 아들이었는데, 몸이 약했던 원갑에게는 무술을 가르치지 않다가, 원갑이 23살이 되던 해 자신의 형이 동네 다른 유파의 싸움에서 패한 것에 대한 리벤지로 한 결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아버지가 그에게 본격적인 무술을 가르쳤고, 그가 독립한 후에는 톈진의 어느 약국에서 수위 일을 같이 했습니다. (당시엔 군벌들이나 도적떼가 귀한 약재를 털어가는 일이 많았던 탓이지요.)


다행히 곽원갑은 그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퍼블릭 도메인)


그러던 그가 1901년에 어느 러시안 레슬러가 중국인을 비하한 건으로 (동아병부, 즉 아시아의 병든 것들 소리를 한 게 문제였습니다.) 난리가 나자 곽원갑이 도전장을 냈고, 그 결투는 이깁니다. 물론 후대에 이 건이 과장되었다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있지만, 그 후로도 그는 상해에서도 몇 번의 격투 경기 (아마도 조차지 등에서 한 프라이즈 파이트였을 것입니다. 상해는 당시 대부분 영국 조차지였기 때문이죠.)를 벌였고 그중 알려진 경기는 “오브리언”이라는 복서와의 이야기였는데, 오브리언은 "일반 복싱 룰로"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응한 곽원갑이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모든 기술을 써서” 경기를 하는 것. 이것을 중국 말로 "뢰태"(擂台)라는 것으로 제안을 했고, 이 제안을 들은 오브리언이 결국 포기를 하면서 싸움은 성사되지 않은 채 끝났는데, 이 사건을 바탕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가 “무인 곽원갑” 이긴 합니다. 


그러고 나서 곽원갑은 당시 권법가들이나 무술가들의 추천, 그중에서 농경손이라는 사람의 권유로 일종의 “체육학교”를 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910년 6월에 세워졌던 “정무체육회”였습니다. 정할 정(精) 무예 무(武) 자가 들어간 이름답게 “무술로 중국인들의 몸과 정신을 정하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고, 당시 유학 중이었던 중국인들의 지원 (특히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간 중국인들)과 현지 중국인들의 지원도 있게 되면서 정무 체육회는 만들어지자마자 얼마 안 되어 빠르게 성장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곽원갑이 갑자기 그 해 9월, 병으로 급사합니다. 문제는 당시 곽원갑이 주치의가 (지인으로부터 하나 건너서 알게 된 일본 유도협회 출신의) “일본에서 온 일본인 의사” 였다는 건데, 주치의에게 약을 받고 나서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을 건드려 버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당시 곽원갑이 어떤 약을 처방받았는지는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직도 중국 사람들은 곽원갑이 “독살” 되었다고 보고 있고, 실제로 후에 곽원갑의 유골에서 “비소”가 나온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독살설이 제기는 되었지만, 문제는 당시 중방-중의에도 “극소량의 비소”는 약으로 처방을 하긴 했다는 기록이 있었던 것, 그리고 당시 그 곽원갑의 주치의는 일본인 “양의” 였다는 점에서 비소는 큰 원인이 아니었을 거라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서 1911년 신해혁명의 분위기에서 정무체육회는 일종의 “민족주의” 의 색채가 강해집니다. 곽원갑이 석연치 않게 죽었던 것도 문제지만, 신해혁명을 하면서 내세운 것이 “반 외세”였던 것도 포인트였습니다. 옛 청나라 왕조가 철도부설권과 광물채굴권을 외국에게 팔아재끼는 조건으로 열강들의 압박을 피하려 했고 여기서 특히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게 러일전쟁 승리 후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했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같은 아시아라 한들 “탈아입구”를 내세우며 우리는 열강의 한 부류라고 하는 일본은 중국인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고, 정무체육회를 포함한 민족주의자들의 제1 타깃은 미국인도, 영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됩니다. 


영화 <정무문>의 명장면, 이소룡의 도장 깨기 장면


이런 부분을 바탕으로 각색해서 나온 영화가 바로 이소룡이 출연했던 “정무문”이었고요. 그리고 이 정무체육회 설립을 돕고 아예 “상무정신”이라는 서예 친필 휘호까지 만들어 줬던 것이 바로 손중산, 즉 쑨원이었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곽원갑을 지원했던 황페이훙, 우리에게는 황비홍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합니다. (퍼블릭 도메인)


그러나 중국은 1937년 7월, 루거우차우(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제국이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침략을 가하기 전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텀이 있었기 때문인지, 정무체육회는 곽원갑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인재를 배출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 정무체육회를 이어받은 직계 제자들이 류전성 (유진생), 천궁저 (진공철), 자오옌화 (조연화)였고, 곽원갑이 정무체육회를 만들 때 그에게 지원을 해주었던 곳 중 하나가 광둥 성 불산에 있던 “보지림의관”(寶芝林醫館) 이라는 중의원 겸 무술도장이었는데, 그곳을 만든 사람이 바로 그 황비홍이었으며, 그 황비홍과 같이 불산에서 활동했던 이 중 진화순이 있었고, 그 진화순의 사제인 오중소 그리고 그 밑에 마지막으로 제자로 들인 것이 바로 엽계문, 바로 후에 “엽문”으로 불린 사람이 그 인재 중 한 명이었죠. (황비홍이 홍가권, 진화순이 영춘권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영춘권의 "일대종사"로 불린 엽문 노사




그리고 한반도. 여기는 아예 대놓고 “일본에게 병합을 당한 후”에 제일 크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택견꾼들은 아예 “택견이 일본에 대한 반발심리“를 일으킬 수 있다 하여 금지. (그리하여 택견은 일종의 ”음지에서 하는 놀이“ 화 되기 시작합니다.) 씨름도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소 시합을 크게 여는 것이 제한이 되는 가운데서 일본 스모계가 ”씨름꾼들 “을 데려가서 스모 리키시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특히 사이토 마코토 총독 때 가장 심했던 것이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아예 스모 경기를 한반도 쪽에서 하려 하는 것과 함께, 일본 내에서 “아이들을 돈을 주고 입양이 가능하게” 되면서 조선인이나 중국인 남자아이들을 “스모 유학” 내지 “유도 유학” 혹은 “가라테 유학“ 등을 이유로 가난한 집에 돈을 주고 데려가는 일종의 ”변종 인신매매“ 가 벌어지는데, 이때 일본으로 가게 되는 사람이 바로 ”김신락“이었고, 이 사람은 모모타 가문에 양자로 간 후에 스모계에 입문, 우리가 아는 ”리키도잔“ 이 됩니다. 


역도산이 스모를 그만두기 직전에 한 경기가 찍힌 영상 아카이브


또한 일제의 수탈이나 가난을 피해서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도 있었고, 유학이나 공부를 이유로 일본에 가서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일본에 와서 야마니시 항공기술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을 배우려고 유학을 간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오오야마 마쓰다쓰” 즉 최영의였죠.


오오야마 마쓰다쓰, 그리고 최영의에 대해 다룬 KBS 다큐

그러나 그 외의 한반도의 무술가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아무래도 제일 큰 것은 민족말살 정책을 벌인 일본이 제일 근본적인 문제였기도 합니다. 즉 태국처럼 "주권이 그래도 살아있던" 상황도 아니었고, 중국처럼 "약간의 평화가 남아있던" 시기도 없었기 때문이었던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택견이나 씨름을 하는 것으로는 "먹고살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기 때문이 맞습니다. 그리고 택견판이나 씨름 시합을 막으면서 내놓은 일본의 논리는 "마당에서 택견이나 씨름을 하다가 조선인들이 갑자기 많이 보이면 일본 제국에 반기를 드는 집회를 할 수 있다"라는 황당한 논리였습니다. 또한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이 되면서 일본이 "조선인 징병"을 하면서 사내라는 사내는 몽땅 전쟁터로 보낸 것도 컸습니다. 물론 송덕기 선생처럼 그래도 택견과 국궁을 익힌 채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서 후대에 이것을 전수한 예외의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보통 송덕기 선생을 "택견" 보존만을 업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는 해방 후 황학정 재건과 국궁 보급에도 힘을 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중에서 그래도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인원들 중에서 "가라테"를 배운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먼저는 이원국으로 그는 1926년 일본 츄오대학으로 유학을 간 대학생이었는데, 그가 당시 쇼토칸 가라테를 만든 후나고시 기친에 대해 듣고 그에게서 가라테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후나고시 기친은 당시 오키나와 즉 옛 류큐 왕국 출신 사람으로 당시 오키나와 지역의 고류무술이었던 "오키나와 테"에서 영향을 받아서 현대식 가라테를 만들었고, 이후 류큐가 일본에게 병합이 되면서 일본 본토에서 "쇼토칸 도조"를 만들어서 후학을 양성 중이었습니다. 이원국이 쇼토칸 도장에 간 해가 1929년이었고, 그는 일본에서 1939년까지 가라테를 수련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다른 유학생이 오는데, 그게 1936년 쇼토칸에 들어왔던 노병직이었고, 이전에 코오우류(강우류) 도장에 있다가 쇼토칸 가라테를 배우겠다며 도장을 들락날락거린 최영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 이원국은 1944년 경성으로 돌아와 경성 서대문 영신학당에 "청도관 당수도장"을 열어 가라테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물론 하필 시기가 시기라 일본 제국에서 여러 번 방해를 하긴 하지만 다행히 일본이 1945년 원자폭탄 2방을 맞으면서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고, 비슷하게 1944년 노병직도 한반도로 돌아와 개성에서 "공수도장"을 잠시 열다가 역시 전쟁으로 멈춰지고 해방 후인 1946년 도장을 다시 정비하여 "송무관"이라고 짓게 됩니다. 재밌게도 쇼토칸, 즉 송도관(松涛館)의 한자 철자를 한자씩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과 중국을 포함해 해외로 흩어져 있던 한국 사람들이 돌아오고, 해방 직후에 "황기"라는 사람이 용산 쪽에 있던 교통국 건물 안에 "운수부 당수도장"을 만들어 당시 미군정 교통국 운수부 사람들에게 운동 목적의 무술을 가르쳤고, 이후 여기는 이름을 "무덕관"이라고 바꿉니다. 바로 그다음 해 1946년 만주와 일본을 오갔던 윤병인이라는 사람이 YMCA 활동을 하면서 지금 종로 2가 YMCA 회관에서 자신이 만주에서 배웠던 권법 (오래전 기록에는 주안파라고 써져 있지만 중국어 발음상 취안파, 즉 켄포와 함께 권법을 부르는 중국식 표기로 보아 권법이 맞습니다.)을 가르치기 위해 "YMCA 권법부"라는 것을 만들게 되는데, 여기서 후에 지인인 전상섭이 "조선연무관"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이곳은 한국전쟁 중에 이름을 "지도관"이라고 바꾸게 됩니다.


국기원 공인 사범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이 단락이 중요합니다. 이게 일단 "공식적인" 태권도의 초기 역사가 됩니다.(...)


오래전 무카스에서 취재했던 박철희 태권도 원로의 초기 5대관 회고

그리고 이 광풍에 "일본마저"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일단 1차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 들어서면서 소위 "사무라이 계급"이 한 번에 몰락해 버리면서 사무라이들 사이에 있던 다양한 "검술"들이 실전이 됩니다. 그 이전에는 각 지역의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이 일종의 가업처럼 내려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검술들이 다양하게 있었지만, 이제  "덴노의 시대"가 되면서 더 이상 사무라이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며, 이후 1876년 바로 "군인과 경찰만이 칼을 쓸 수 있는" 폐도령이 실시되면서 그들이 그냥 보유하고 있던 "고류 검술"을 그냥 다 "폐전" 시켜버리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이쇼 덴노 때와서는, 일본 사람들도 호신용 권총을 쓰기 시작하면서 칼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 버린 것이지요.


이와쿠라 사절단


2차적으로는 일본이 "일본 제국"으로 바뀌면서 "서양의 문물"을 배워오겠다고 한 것이 컸습니다. 그리 하여 일본제국이 임명한 특명전권대신 이와쿠라 토모미를 중심으로 한 "이와쿠라 사절단" 이 만들어져서 이들이 서양, 즉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다녀온 후에 그 영향으로 "복싱과 레슬링을" 일본에 들여왔습니다. 기존의 일본의 고류 무술등의 복잡한 동작이나 "칼을 든 상대" 에게 맞춰진 듯한 동작과는 오히려 방향이 먼 "직관적이고 직선적인" 동작을 가진 복싱과 레슬링은 당시 일본의 높으신 분들에게는 "근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들여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가노 지고로는 "고류 유술"이 이대로 없어지는 것은 좀 아니라고 느꼈는지, 자신이 배웠던 고류 유술을 개량하여 유도를 만든  1882년 "강도관 유도 도장"이라는 도장을 만들었고, 그 직전에 "마지막 사무라이들의 반란"이라 하는 "세이난 전쟁"이 1877년에 벌어졌는데, 이때 이들의 진검과 단검 등을 사용한 교전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어했던 일본 정부는 반란 진압 후 "궁술과 격검을 학교에서도 가르칠 필요성"을 깨달아 궁술과 죽도격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것이 지금도 일본 애니메이션에도 자주 나오는 "궁도부" 그리고 "격검부"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 중 격검은 후에 일본의 전통무술을 총괄하는 단체인 "대일본무덕회"가 생기고, 그곳에서 전국의 격검 교육 방식을 통합하고 정리한 "무덕회류검술형" 이 제정되는데 이것이 "검도의 시초"가 됩니다.


그리고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 후에 이것들을 다시 한반도에도 정착을 시키려 하는데, 이 중 "박승필" 이란 사람이 유도와 복싱을 보고 이걸 한국에서 가르칠 곳이 있어야겠다 하여 만든 곳이 바로 "조선 유각권구락부"였고, 이후 선교사였던 질레트가 1916년 한반도에 복싱 글러브를 가지고 들어오니 이게 한국의 유도와 복싱의 시작이 됩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2차 대전 다큐 중 진주만 공습 부분


그러나 이 것 마저도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후에는 "과거의 흔적" 이 되어버리죠. 그나마 일본에서 "복싱과 레슬링을 배운 인재" 들은 (이것도 거의 대학교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일본의 초기 복싱과 레슬링 수련자들은 나름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죄다 전쟁터로 보내서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2차 대전 다큐 중 가미카제 부분


그나마 이 전쟁을 면했던 것은 덴노마저도 신성하게 여겼던 "스모 리키시" 들이었고, 이들은 전쟁 때도 징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모는 일본의 무술이기 이전의 "종교적인 의식" 즉 국가신토의 존립을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때, 그리고 이후 다이쇼 덴노 때 여러 이유로 해외로 이주했던 일본인들 (미국과 캐나다, 영국, 그리고 유럽과 남아메리카 등지로 갔던) 정도였습니다. 그중에서는 가노 지고로의 제자들도 있었고, 일본 내 다른 고류 유술이나 쇼토칸 가라데 수련자들도 있었습니다. 


가라테와 유도가 일본 밖으로 수출되는 순간이었죠.


그러면 이런 혼란의 시기가 있던 아시아와 달리 유럽과 아메리카는 어땠을까요? 복싱은 이때 충분히 유럽과 아메리카에 보급되었고, 드디어 "프로복싱"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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