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HSonG Jun 20. 2024

2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복싱”의 시대

프로복싱이라는 것이 시작되다.

2번의 세계대전 중에서 "어떤 것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이 큰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다소 다양한 의견이 있기 마련입니다. 보통 "2차 세계대전은 핵폭탄이 개발된 전쟁이니 그게 더 영향이 큰 게 아닐까?"라는 의견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보통 1차 세계대전이 "인류학적"으로는 영향이 더 커다란 의견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이유는 "유럽"이고, 유럽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아직도 복잡한 키워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유대인"입니다.


벌거벗은 세계사 중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부분

유대인의 박해역사를 보통 "홀로코스트"만 아는 분들도 있지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까진 아니어도 "홀대"의 역사는 로마시대의 기독교 공인 후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바뀝니다. 여태까지 초기 기독교 (즉 가톨릭-개신교-정교로 분파되지 않은 시기)는 유대교에게 "이단자들" 소리 들으면서 공격을 받은 마당이었는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상황이 역전됩니다. 유대교과 유대인들을 "신을 죽이려 했던 자들" (기독교 교리 상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했기 때문에)로 몰아서 역으로 박해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로마가 과거 다신교에서 기독교로 국교를 바꿨다 해도 "신성모독"을 중죄로 보는 것은 여전했고, 결국 이 대놓고 "신성모독을 한 것들"과는 상종을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필 당시 팔레스틴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지역) 은 로마 식민지였으므로, 결국 이들이 박해를 당하고 흩어지는 "디아스포라"가 과거 고대 이스라엘 이후 "또" 벌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갔던 곳이 지중해 일대, 그리고 거기서 알프스를 넘고 지중해 해협을 따라가서 프랑스와 영국 등의 당시로는 "변방"이었던 유럽으로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제국" 기준에서 변방인 거까진 좋았는데, 후에 동로마/서로마로 쪼개지고, 동로마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박살이 나서 흡수되어 "오스만 제국"이 되는 상황이 되고 나니... 어느새 유럽의 중심은 "영국과 프랑스" 즉 "브리튼-노르만 왕조" 계열과 "프랑크 왕국" 계열의 영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생존" 이 제1순위가 되어버리니 그들은 결국 "돈"을 중시하고, "상업"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게, 십자군전쟁과 르네상스 시기까지도 모조리 다 통과해서... 18세기와 19세기까지 와버렸습니다.


YTN 뉴스 - 드레퓌스 사건 간단 정리

그러던 중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급전개 되는데,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군인을 스파이 혐의로 잡았는데, 먼저는 "스파이는 따로 있었으며" 그리고 군법재판에서 드레퓌스를 "유대인 혈통"이라면서 종신형을 선고해 버리면서 프랑스가 뒤집혀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거에 에밀 졸라가 대놓고 프랑스 정부를 비판한 사건이 있었죠. 문제는 진범이 따로 밝혀졌는 대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종신형"을 받은 것을 재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에밀 졸라는 군법재판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정부에서 그에게 혐의를 씌우자 영국으로 망명. 그리고 후에 1906년 드레퓌스는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이 되긴 했는데... 그 사이에 이른바 "드레퓌스 파"라는 것이 생기고 이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종신형이라면 차라리 유대인들의 나라를 세우는 게 더 낫겠다!"라는 말로 인해 생겨버린 것이...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상황의 단초 아닌 단초가 된 "시오니즘"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꽤 컸습니다. 그나마 그들에게 "관대할 줄" 알았던 프랑스 마저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쪽은 이미 개신교가 생긴 이후 더더욱 유대인들에게 혹독했습니다. 개신교의 초기 정신인 "Sola Scriptura" 즉, 말씀 강조 정신은 신약을 포괄하는 건데, 유대인들은 토라, 즉 모세 5경을 강조하거나 구약만을 강조한 나머지 가톨릭보다도 당시 "강성"이었던 신교인 들에게 대놓고 찍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진 이후, 유대인들은 자진해서 영국으로 가거나, 아니면 미국으로 가버리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은 그래도 "돈"이 있거나, 이미 하나 건너 친척이 이미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지로 가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하는 것은 산업혁명의 시기. 회사를 차리거나, 공장을 굴리거나, 혹은 다른 영국의 귀족들을 후원해 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베어너클 프라이즈 파이팅 대회에 돈을 대주거나" 였죠. 게다가 1900년대 초. 이 시기는 1867년 퀸즈베리 후작이 만든 "퀸즈베리 룰"이 이미 프라이즈 파이팅 경기에도 퍼질 대로 퍼져서, 사실상 우리가 아는 "복싱 경기" 형태로도 룰이 굳어진 후였습니다. 게다가 이미 올림픽 복싱은 1908년에 정식종목이 된 후였습니다.


지식해적단 채널에서 정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역사

그런데 여기에 더 기름이 끼얹어진 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던 것입니다. 1516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거한 오스만 제국이 하필이면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편"을 들어버렸고, 1918년 1차 대전에 독일-오스만-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패전해 버리면서, 오스만도 "패전국의 책임"을 뒤집어써버리는데, 이때 영국은 지중해와 중동으로 확장을 하고 싶어 했고, 결국 1920년 세브르 협상의 결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대영제국에게 내어주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때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영국과 팔레스타인으로 나눠 살기 시작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영국이라는 한 동네에서 모여 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1920년대 와서는 이미 유대인들은 충분히 영국과 북미대륙에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북미대륙은... 청교도인들과 "충돌만 안 하면"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었고, 오히려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도 미국에 살면서 화룡점정을 찍습니다. 


참고로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서커스단을 등지로 열던 "프라이즈 파이트"가 있던 시기가 이때, 즉 1900년부터 1920년까지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서커스단"에만 의존을 할 수 없었던 것도 있고, 아마추어 복싱 즉 올림픽 복싱으로는 선수의 "명성"과 선수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컸습니다. 왜냐면, NCAA 대학선수는 대학교를 졸업하면 더 이상 할 수가 없었고, 올림픽 국가대표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국가대표가 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 큰 땅덩이의 미국과 영국에서 국가대표가 상비군으로 나와도 손으로 꼽을 정도니까요.) 결국 미국에서 이미 자잘하게 프라이즈 파이트 경기를 개최하거나, 후원했던 사람들이 먼저 이런 체제에 들고일어납니다.


"야, 일단 유럽은 전쟁 막 끝나서 혼란스러우니까, 우리 미국만이라도 전문적인 복싱 협회를 만들자!"


1910년 ~ 1920년대 초기 미국 프로복싱 시기의 영상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는 "누가 주체가 될 것인가"였습니다. 이미 이런 프라이즈파이트 경기는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많이 치러졌습니다. (실제로 미국 개척의 역사가 동쪽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이동했으니 당연한 것이긴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동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라면서 먼저 총대를 멘 것이 뉴욕의 사람들, 정확히는 "뉴욕 주 체육위원회" 였는데, 이때 뉴욕 주 체육위원회의 "챔피언" 내지 "챔피언 도전자" 즉 컨텐더 규정은 다소 말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흑백갈등, 즉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특히 당시의 강자 중 한 명이었던 "잭 존슨"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선수들이 "나 쟤랑 경기 안 해!"를 대놓고 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거기다가 뉴욕은 "Yankees"의 어원이 된 네덜란드계 이민자들과... 유대계 백인들이 너무 많았던 지라 잭 존슨의 챔피언 권위를 대놓고 "부정"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뉴욕 주 체육위원회에 반기를 든 13개 주 + 뉴욕 내에서도 뉴욕 주 체육위원회와 생각이 같지 않은 초기의 프로모터들이 들고일어나서 "National Boxing Assocition"이라는 단체를 1921년에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게 된 것이 "NBA 챔피언"이었는데, 여태까지 각 지역 별로 있던 챔피언을 하나로 묶은 첫 번째 "통합 챔피언"이었습니다. 물론 뉴욕 주 체육위원회는 이걸 인정하지 않아서 따로 "복싱 챔피언 인 아메리카" 내지 "헤비웨이트 챔피언" 이란 이름을 내세웠고, 그래서 한동안은 이 챔피언들이 따로 한 지역에서 존재했던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게 됩니다.


잭 뎀프시의 경기 영상 ( https://youtu.be/5ESMxhPb1Iw )

어쨌든 그래도 어엿한 "프로복싱 협회" 도 생겼고, 이 협회의 "통합 챔피언" 도 생겼으니 첫 챔피언을 세우는 경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나타난 스타가 바로 "잭 뎀프시"였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복싱 룰 로서는 다소 금지된 후두부 타격 (이른바 래빗 펀치)를 좀 많이 교묘하게 썼다는 평이 있지만 아무래도 당시에는 잘 쓰지 않던 좌우 훅이라던가 위빙과 풋워크를 씀으로써 상대를 "어쨌든 확실하게 때려눕히는" 스타일이 있었고, 이 뎀프시의 훅이 워낙 강력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미 1920년대에 당시 돈으로만 100만 달러를 파이트머니로 챙기는 스타가 됩니다. 그리고 조지스 카펜티어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서 "첫 NBA 복싱 통합 챔피언" 이 됩니다. (프랑스 출신이라 조르주스 카르팡티에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로이터 브리티시 파테 아카이브 - 조지스 카펜티어 (조지 카르팡티에)와 그와 같이 복싱 훈련을 하는 사람들


그런데 같이 봐야 하는 이 조지스 카펜티어도 "1차 대전의 참전 영웅"이었다는 점입니다. 공군 파일럿으로 복무했는데, 프랑스 출신으로 유럽에서 전쟁 전에도 프랑스와 유럽 등지의 프라이즈 파이트 경기에서 다수 이긴 전적이 있던 초기 프로복서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1908년 복싱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었었죠.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이러면서 "복싱"이라는 스포츠 자체는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처음에는 1년, 2년 하고 말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참호전"의 등장과 신무기, 그리고 "독가스"라는 존재의 등장으로 전쟁이 무려 3년을 넘기게 되자, 당시 프랑스에 있던 복싱하던 청년들, 영국에서 복싱하던 청년들, 그리고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에서 복싱하던 청년들이 너나없이 전쟁터로 왔고, 1917년 미국마저도 "1차 대전 파병"을 하게 되면서 미국에서 복싱하던 청년들도 오자, 결국 쉬는 시간에 하는 것이 전쟁터에서도 나무판자와 밧줄로 링 만들어놓고 권투를 하는 것이었고, 이게 또 묘사가 되어버린 것이 1929년에 나온 1차 대전기를 다뤘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 였죠.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도 리메이크되었습니다. 물론 많이 리메이크는 되었죠.


그런데 또 1차 대전 후 이런 상황에 불을 댕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패전국인 "독일"이었습니다. 그냥 독일도 아니고 "나치 독일"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요. 그리고 이것을 아예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고 그와 세트로 "유대인의 열등함"을 같이 내세우는 행사를 하게 되는 데... 그게 바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었습니다. 물론 독일이 올림픽 개최지가 된 건 1930년 바이마르 공화국 때였지만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나치당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냥 올림픽" 이 되는 듯 한 행사는 대놓고 변질이 된 것이었죠. 또한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놓고 "유대인 차별"과 박해를 한 것이 오히려 빌미를 만드는데, 그것은 독일 내에 있던 유대인들이 대놓고 "미국이나 영국으로 망명"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그것도 가능한 사람에 한해서였고 여러 이유로 독일 땅에 남았던 유대인들의 운명은.... 참혹한 것이었죠.


레니 리펜슈탈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복싱 기록영상 (https://youtu.be/lbNCpcqenOg)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1936년 올림픽 복싱의 기록을 보면, 정작 나치 독일이 "전체급 석권"을 하는 데 실패합니다. 뭔가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로 내세우기엔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 "남미 사람들" 에게서 금메달이 나오지 않나, 오히려 1차 세계대전 후로 각을 세우던 프랑스에게도 금메달을 허용하지 않나 나치의 선전과 선동을 위한 올림픽이라기엔 뭔가 짜게 식은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죠.


1936년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 목록 (Boxing at the 1936 Summer Olympics - Wikipedia)

거기다가 레슬링은 더더욱 체면을 구겼습니다. 레슬링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모두 다 나치 독일에서 따낸 금메달이 "없었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최고 성적은 자유형 2위/그레코로만형 2위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복싱보다 더 복합적인 동작이 많은 레슬링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니 나치당 입장에서도 "게르만의 우수성"을 이야기하기에 복잡한 것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올림픽의 클라이맥스라는 마라톤마저도 "웬 일본제국 점령지의 한반도 사람"에게 금메달을 뺏겼으니 더더욱 짜게 식은 것이었죠.


1936년 올림픽 레슬링 메달리스트들 목록 (Wrestling at the 1936 Summer Olympics - Wikipedia)


1936년 올림픽 마라톤의 주인공은 독일인도 아닌 저 먼 "경성"이란 곳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에서 보면 오히려 복싱에서 약진을 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1920년부터 프로복싱 협회가 세워지고 올림픽 복싱이건 프로복싱이건 체계화가 잡혀버린 미국은 거기서 16년 후에 복싱에서 최고 성적 2위 (잭 윌슨, 밴텀급), 레슬링에서는 1위 (프랭크 루이스) 1개와 2위 3개를 해 내버리게 됩니다. 또한 그레코로만은 핀란드와 스웨덴이 금메달을 4개씩 하면서, 이쯤 되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 이라기엔 "미국인과 북유럽인들의 우수성" 이 더 적합해 보이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이게 다소 히틀러의 심기를 뒤틀리게 했는지(?) 결국 올림픽이 끝나고 2년 후 "안슐루스" 즉 오스트리아 병합과 폴란드 침공을 시작하면서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게 됩니다. 전쟁이 없었을 당시 개최국은 일본제국 치하 도쿄 내지 헬싱키였지만 이미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재자가 자기 선전을 실컷 하는 걸 본 타 국의 입장에서 또 독재 체제의 일본제국이냐라는 의견에 헬싱키로 내정이 되지만... 올림픽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무려 1945년 8월까지요.


벌거벗은 세계사 - 독일 편 중 아우슈비츠 부분

그리고 그 사이에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문제는 이것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미 이주를 해 있던 "영국과 미국"내의 민심을 들끓게 했고... 결국 영국과 미국은 대놓고 "나치당을 축출한다"라는 결론을 내버리죠. (물론 러시아, 즉 소련은 조금 다른 이유이긴 했습니다. 독-소간 불가침 조약을 깨고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 빌미였죠.) 그리고 이 분노는 그대로 1945년 3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승리와 프랑스 레지스탕스 등의 활약,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연합군이 베를린에 입성을 하면서 나치 독일은 히틀러와 함께 무너집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아카이브 - 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 시가전 부분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희생을 치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1940년 올림픽에 나갔어야 하는 미국과 영국 각지의 청년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존재"들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는 복싱이나 레슬링을 했던 청년들도 있었고, 기타 다른 종목들을 하던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은 없었겠지만, 어쩌면 "메달리스트"로 만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산화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로 잡혔다 돌아온 루이스 잠펠리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언브로큰>. 루이스 잠펠리니는 이미 베를린 올림픽에도 출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P.S 이 시기에 언급을 해야 하는 재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21년 당시, 뉴욕에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라는 공연장 겸 체육관 (아레나)가 있었고, 이곳을 거점으로 프라이즈파이팅 복싱 경기를 주최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제스 맥마흔"이었고, 이 사람은 초기 전미 복싱협회가 세워질 때 주축 발기인으로 나섰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로데릭 "제스" 제임스 맥마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느껴지면 여러분이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해안경비대로 근무했었으며 그가 전쟁이 끝나고 와서 아버지의 복싱 프로모터 일을 도왔는데, 그가 바로 "빈센트 맥마흔"이었고, 그가 우리가 아는 그 빈스 맥마흔 시니어가 됩니다.


제스의 아들인 빈스 맥마흔 시니어, 그는 프로레슬링 쪽의 전설적인 회사를 세웁니다. (https://youtu.be/Zek2jm3IPzo)
이전 08화 제국주의 그리고 아시아의 “격투가”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