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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HSonG Jun 06. 2024

격투의 신대륙, 그것은 아메리카 (주짓수, 발리투도)

유럽이 이러는 사이, 대서양 건너는 어땠을까?

원래 초안에서 이름이 바뀐 기획이 있습니다. 원래는 “브라질과 멕시코의 투기종목” 이야기를 다뤄야 할까 싶었다가, 쓰다 보니 “흠, 뭔가 미국 이야기를 안 한 거 같은데? “ 싶어서 제목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투기종목의 이야기를 하려고 생각하니, 이 부분은 결국 ”유럽의 투기종목의 역사“를 다소 따라가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바꾸기로 한 것은 낙장불입. 결국 이렇게 된 거 ”유럽에서 시작된 투기종목은 왜 아메리카로 전파되었는가 “ 로 결론이 났습니다.(…)


브라질과 멕시코,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의 투기종목의 종류는 꽤 간단합니다. 미국과 캐나다는 보통 복싱과 레슬링을, 그리고 멕시코는 복싱과 레슬링을 (프로레슬링인 루차 리브레는 조금 궤가 다르긴 하지만 전래 과정은 비슷합니다.) 그리고 브라질은 유도와 그것에서 파생된 주짓수, 그리고 카포에라와 소위 MMA의 근대적 시조라 보는 “발리 투도” 로 구분합니다. 다만, 이것들이 전래된 과정은 많이 복잡합니다. 그나마 조금 간단한 게 미국과 캐나다이긴 하지만, 이것도 미국과 캐나다가 소소하게 다른 구석이 발생합니다.


먼저 미국은 역시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 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영국은 미국의 신대륙 개척기와 청교도 박해로, 그리고 아일랜드는 이른바 “감자 대기근” 으로 불리는 최악의 대기근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 신대륙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영국의 복싱과 레슬링, 그리고 서커스 문화(와 결투문화...) 나 프라이즈 파이팅, 그리고 아일랜드식의 “아이리쉬 베어너클” 등의 것들이 많이 옮겨오면서 “미국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 이전과 2차 대전 이전에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소위 독재나 파시즘, 나치의 폭정 같은 것들을 피해서) 이주해온 사람들까지 합해져서 유럽의 투기종목들이나 그런 문화들이 “이식”이 되기 시작하고, 냉전기에는 공산주의 독재를 피해서 온 러시아나 동유럽계 망명자들, 밀항자들이 더해져서 러시아나 슬라브계의 문화도 섞여 들어오지요.


캐나다 올림픽 레슬링 2 연속 메달리스트인 캐럴 윈


캐나다는 조금 다릅니다. 캐나다는 아예 “영국 식민지” 로 출발을 했기 때문에, 미국과는 다르게 다른 것이 섞이거나 하진 않았고, 순전히 “영국“의 것들이 그대로 아메리카로 이식된 상황인데, 조금 변수가 있다면 역시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퀘벡과 몬트리올입니다. 이쪽 한정으로 복싱과 레슬링이 아닌 ”펜싱과 사바테“가 추가된 형태로 투기종목들이 있었고, 이쪽도 후에 아시아 쪽 이주자들이 생기면서 여기에 유도와 가라테, 그리고 태권도나 쿵후가 들어오는 형태로 발전을 합니다. 특히 프랑스 쪽에서 시작된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의 영향으로 퀘벡과 몬트리올은 타 지역이 자유형 레슬링을 할 때 이쪽은 그레코로만이 좀 더 강세를 보였다는 것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죠. (올림픽 레슬링도 그레코로만 레슬링이 1896년 1회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 자유형 레슬링은 1904년 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 정식종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미의 투기종목의 역사는 아무래도 “현대 올림픽의 시작” 그리고 이어서 “프로복싱” 이 시작하고, 1913년 경 미국과 캐나다의 각 대학들이 레슬링을 교내 체육과정에 넣고 시작된 전미대학체육연맹 경기, 즉 NCAA 레슬링 컬리지 리그가 시작된 시기부터가 “본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방계에는 “프로레슬링”의 역사도 빼놓을 수도 없지만, 프로레슬링이 역사는… 기대해 주십시오. 이건 따로 다루려 합니다.

그렇다 보니, 보통 미국과 캐나다의 투기종목의 역사는 “현대 올림픽의 역사”를 다소 따라가는 형태를 보입니다. 러시아도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합 러시아 (소련)가 세워진 기점에서는 여기도 현대 올림픽과 그 역사를 같이 합니다. 그렇다 보니 미국과 캐나다 쪽 체육계는 유독 1896년을 “특별하게” 보는 이유기도 합니다.


MMA 선수로 알려진 벤 아스크렌도 NCAA 최고 선수상인 올 아메리칸 수상자 유명했습니다.
 프로레슬러로 유명한 커트 앵글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했습니다. 레슬링 역사상 명경기인 1996 애틀랜타올림픽 결승전


이제 남미로 가 보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집니다. 먼저 멕시코. 이곳은 “스페인의 영향권”이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아주 살짝은 “프랑스의 영향권”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정복을 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의 결과로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을 차지했고, 이러면서 “프랑스식 제도나 법률, 문화”가 식민지인 멕시코에도 그대로 전달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1821년 비센테 게레로와 이투르비데의 독립전쟁으로 인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한건 좋았는데, 이후 1848년의 미국-멕시코 전쟁의 패배로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미국에 내어 주면서 “ 결국 멕시코 연방은 베니토 후아레스의 “레포르마” 정책이라는 개혁정책을 씁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운명을 갈라버린 미국-멕시코 전쟁 (https://youtu.be/z7_kBCoHO4c)


문제는, 이때 “대지주와 가톨릭 교회에게 무지막지한 세금”을 때리면서 민심의 이반도 불렀는데, 하필이면 로마 가톨릭이 “당시 프랑스와 연관이 컸기” 때문에 프랑스의 성질을 건드린 게 큰 문제가 됩니다. 이때 베니토 정부는 프랑스 정부가 요구한 “외채의 상환”을 거부하면서 (에스파냐 왕가였던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 왕가였기도 했기 때문이 컸습니다.) 프랑스는 영국과 에스파냐와 연합을 맺어 1861년 멕시코를 침공하는 “프랑스-멕시코 전쟁”을 일으켰고, 일단 여기서 프랑스가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베니토 후아레스는 잠시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서 버티며 투쟁을 하는 동안, 프랑스는 합스부르크가 의 막시밀리앙을 “프랑스령 멕시코제국”의 황제로 추대를 하게 됩니다. 그게 이후 미국의 중재 (먼로주의 중재)로 1865년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의 철수”를 명령하기 전까지 (물론 막시밀리앙은 그러고도 멕시코 본토에서 1867년까지 베니토와 맞서 싸우다가 패배 후 사망합니다.) 4년간의 시간 동안 프랑스의 “사바테와 복싱, 그리고 레슬링”이 멕시코로 들어오게 됩니다. 


코로나19 사태 중 기네스북 도전으로 열렸던 복싱 관련 행사에 참여했던 오스카 델 라 호야, 호야는 올림픽과 프로복싱 모두를 재패했습니다.


멕시코의 복싱 현재 최강자인 카넬로 알바레스

재밌는 것은, 이때 레슬링은 프랑스보다도 프랑스의 연합군으로 들어온 영국의 영향이 더 컸다는 사실입니다. 멕시코에서는 프로레슬링을 “루차 리브레” (Lucha libre)라고 하고, 올림픽 레슬링을 “카차카스깐” (Cachacascán)이라고 하는데, 전자는 “자유로운 싸움”이라는 스페인어가 직역이 된 것인데, 후자는 뭔가 어감이 레슬링 하고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비슷한 단어를 생각하면 어원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Catch as Catch Can” 네, 영국에서 하던 캐치레슬링의 처음 이름이자, 이후 캐치 레슬링의 룰을 말하는 단어에서 온 겁니다. 그리고 또 여기서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은 ”그레꼬로망“이라고 그냥 부르기도 합니다. 역시 이건 프랑스의 영향입니다. 즉 여기서 멕시코 사람들이 프로레슬링을 왜 ”자유로운 싸움“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자유형 (카차카스깐)과 그레코로만 룰 (그레꼬로망)도 아닌 자유롭게 방방 뛰고, 가끔 도구로 반칙도 하고, 링 밖에서도 카운트아웃으로 부르는 시간 내에서는 자유로운 장외전이 가능한 레슬링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에 이것을 ”자유로운 싸움“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또한 유럽의 영향으로 복싱도 같이 들어오면서 레슬링만큼이나 복싱도 성장하게 되고, 그리하여서 북중미 한정으로 “올림픽 복싱과 레슬링의 강국”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멕시코였던 것이 바로 이런 연유가 있었습니다.


보통 팬아메리칸 선수권 경기 기준으로 레슬링 결승전은 "미국:미국" 내지 "미국:멕시코"의 결승으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2022년 팬아메리칸 선수권 레슬링 결승전)


이제 거기서 조금 아래인 브라질은 거기서 또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쪽은 스페인 옆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미 1500년대에 포르투갈이 신대륙 개척을 할 때 브라질이 개척되면서 멕시코와는 다르게 전쟁 같은 분란을 겪진 않았습니다. 대신 “내환”을 좀 겪긴 했는데 1789년 “데하마 법”이라는 세금징수 칙령이 나오고, 그것에 반발하여 미나스제라이스 지역에서 1792년까지 일어난 “미나스제라이스 반란” 과, 1808년 포르투갈-프랑스 전쟁에서 포르투 왕가가 나폴레옹에게 패배하면서 포르투갈 지역을 뺏기고 왕가가 브라질까지 잠시 도망쳤던 1817년까지, 아예 “포르투갈의 제2수도” 같은 시기가 되면서 아예 “남미의 포르투갈” 이 되어 버립니다.

재밌는 것은 이 시기 포르투갈이 개척한 곳들입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나라인지라 세계 각국에 개척지를 “식민지”로 삼았는데, 여기엔 아시아가 있었고 그게 지금 인도의 고아 지역(Goa) 그리고 중국의 마카오(Macao), 말루쿠 제도 (현재 인도네시아)가 있었고, 1560년대에 발견은 했지만 식민지로는 삼지 못하고 대신 상호무역을 했던 곳이 바로 류큐 왕국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와 “일본 나가사키 항구”였습니다. 일본은 “데지마”라는 인공섬까지 만들어가며 포르투갈 상인들을 위한 공관을 만들어줄 정도였고, 포르투갈은 일본에 “조총과 빵, 그리고 크리스트교(가톨릭)” 를 전파해 주었죠. (그리고 이 빵에서 갈려서 나온 게 튀김요리, 즉 '덴뿌라'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종교 관련 문제로 일본은 포르투갈을 밀어내었고, 대신 네덜란드와 잠깐 수교했다가 19세기에 다시 수교를 재개하고 그랬던 상황입니다. 이러면서 몇몇 일본인들은 이미 “야마토국 밖의 땅”으로 나간 상황이었던 것이죠.


지식해적단 채널에서 정리한 브라질의 역사, 솔직히... 정말 복잡합니다 이 나라의 역사는. (https://youtu.be/X8RY_YVmaEw)


다시 브라질로 와서, 이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것이 1822년, 포르투갈 본토에서 남겨놓았던 포르투 왕가의 페드루 4세가 본토에 “이제 독립하겠음”이라 하여 “브라질 왕국“ 이 세워져 페드루 1세로 즉위했고, 이후 페드루 2세와 이자베우 공주까지 1888년까지 왕국이 존속이 되는데, 이 사이 있던 “파라과이 전쟁” 에서 벌인 학살로 인해 (물론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전쟁의 주도 세력이긴 했지만 군사력은 브라질이 강한 편이었고) 파라과이 인구 3분의 1이 죽은 것, 그리고 여기에 “흑인과 메스티소 노예들”을 군대에 넣은 것이 문제가 되어 “군주제와 노예제를 폐지하자!”라고 국내에서 들고일어났고, 바로 1889년 데오두루 다 폰세카의 세력이 브라질 왕국에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후에 브라질 구 공화국 즉 ”브라질 1 공화국“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힘을 빌린 것이 바로 유럽 국가들, 즉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었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때 들인 흑인 노예들이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맹수를 상대로 싸우던 소위 “막싸움 기술” 과 아프리카 민족 특유의 “리듬감”을 섞은 일종의 “무술”을 연마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의 기술이 처음에는 “무술 수련을 금지” 당했기 때문에 음악에 섞어서 수련을 하다가, 이게 노예제가 없어진 후에 어느 정도 체계화 되면서 나온 것이 바로 “카포에라”라는 것입니다.


유네스코 카포에이라 서클 (전통식 카포에라) 설명 영상


브라질 1 공화국은 왜 바로 공화정이 되자마자 유럽국가와 미국, 그리고 일본에게 힘을 빌린 것일까요? 이유는 “노예제를 없앤 것” 때문이었습니다. 노예제가 있었을 때는 노동력이 곧 “노예의 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브라질의 주 작물은 역시 “커피나무“ 였는데, 이거는 기르는 데 일손이 정말 많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정작 1888년 노예제를 없애고 보니, 농장에 일할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짜낸 방법이 “외국에서 이민자를 받자!” 였는데, 일단 커피는 1900년대 초만 해도 “아주 귀한 작물”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을 하면 다소 높은 돈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것을 빌미로 세계 각지에서 “이민자를 받았던” 마당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민자들 사이엔 재밌게도 “지구 반대편 일본” 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 중에서는 유도의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에게 “유도를 배운” 사람들과 그 이전에 “고류 유술” 즉 쥬주츠를 배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유도는 가노 지고로의 강도관의 유술, 즉 코도칸 쥬주츠가 후에 코도칸 주도 가 되어서 지금의 유도 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사람이 브라질에 오게 됩니다.


By Unknown author - [1] [2] [3],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100


마에다 미츠요, 그도 역시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에게 유도를 배운 수제자였고, 그는 이미 1900년대 초에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소위 “도장 깨기”라는 것을 하는 기행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가 1908년에는 스페인에서 있을 때였는데, 이곳에서 레슬링을 하는 사람들이나 일종의 “스트리트 파이트”를 하는 사람들과 실전 격투를 벌이곤 했는데, 이때 그가 불리할 때는 “코마루!” (몰렸다!)라고 외치는 버릇이 있었고, 실제로 그는 도쿄전문학교 (지금의 와세다대학)을 다닌 엘리트 수재였는데도 불구하고, 운동인 유도가 재밌다는 이유로 대학마저 때려치우고 가노 지고로의 또 다른 수제자인 토미타 츠네지로와 같이 미국에 갔다가, 이후 스페인으로 가고 하면서 가진 돈을 많이 날려버려 생활고가 있던 마당이었던 터라, 굳이 안 싸울 때에도 “코마루…” 라면서 소위 “몰려버린” 처지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녀, 스페인에서 그를 따라 유도를 배운 사람들이 마에다에게 “콘데 코마루“ (코마루 백작님)이라고 별명을 붙여주다가, ”코마루라는 이름은 좀 이상하다 “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다시 그를 ”콘데 코마“라고 불러주게 되었죠.


초기 마에다의 도장 제자들 (By The original uploader was Loudenvier at English Wikipedia. )


스페인에서 스트리트 파이트를 하다가 유도 도장을 차려 유도를 가르친 건 좋은데, 도장을 꾸려나가는 것은 어려워졌고, 결국 그는 “돈을 벌기 위해” 1915년 브라질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브라질에다가도 “콘데 코마 주주쓰 도조”라는 것을 여는데, 원래 그는 “코도칸 쥬주츠 도조”라고 도장 이름을 짓고 싶었지만… 스승인 가노 지고로가 당시 “타 유파와 시합하다 걸리면 우리 강도관에서는 파문이야!”라고 강경한 기조로 나갔기 때문에, “강도관 유도 내지 강도관 유술”이라는 이름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거 때문에 파문당한 제자들이 여러 이유로 이미 미국과 브라질 등에 와 있었고요.) 결국 마에다는 그냥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사람들도 유도나 유술을 “주주쓰”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에 착안해 그냥 “주주쓰” 도장을 차렸고, 이게 “주짓수” 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1915년을 기점으로 우리가 아는 주짓수가 생기게 되는데, 재밌는 건 이후에 한 개의 무술이 더 생깁니다. 이미 오래전에 유럽에서 “캐치 레슬링”을 수련했던 사람들이 브라질에 와서 살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역시 여러 이유로 “고류 유술”을 수련했거나, 타 유파의 시합을 이유로 강도관에서 쫓겨난 파문 유술가들도 브라질에 와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유클리데스 하템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필이면 캐치 레슬링과 고류 유술 즉 “주주쓰”를 배웠고, 이걸 합친 방식의 무술을 후에 만들게 되니 이것이 “루타 리브레”였습니다. 그리고 마에다의 도장에는 “카를로스 그레이시”라는 브라질 사람이 제자로 들어왔고, 그리고 그 카를로스에게는 동생 “엘리오 그레이시”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들의 아버지였던 가스타우 그레이시가 마에다가 도장을 세울 때 그 지역 지주로써 마에다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이어서, 마에다가 일종의 “보은” 의 형태로 그의 자녀들에게 “유도“를 가르쳐준 것인데, 이때 소위 ”강도관 유도” 는 손과 발 타격 공격이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은 이걸 대신 도복 깃 잡기, 도복이나 팔 잡고 발 채기 정도만 남겨지고 다 없어졌습니다.) 일종의 올라운딩 무술이었고, 여기서 카를로스와 엘리오가 소질이 크게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후에 마에다의 방식을 약간 개량해서 강자들과 시합을 하게 되니 그것이 “브라질리언 주짓수” 즉 BJJ의 시작이 되지요.


BJJ가 세계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엘리오 그레이시 VS 기무라 마사히코 (https://youtu.be/gErppdxesiw)


그리고 시대는 1920년대, 브라질에도 일종의 “서커스”가 있었고, 이 서커스에서는 “무술 대회”라는 것도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술대회에는 “뭐든지 가능하다”라는 모토를 내세웠는데, 그게 복싱을 하는 복서이던, 레슬링을 하는 레슬러이던, 카포에라를 하는 사람이건, 혹은 쥬주쓰를 배운 사람이건, 가라테나 사바테, 쿵후 등을 배운 사람이건 상관이 없이 “어느 한 사람이 시합이 불가능할 때까지 싸워서 이기면 끝”인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뭐든지 가능하다”라는 것의 포르투갈 어인 “Vale Tudo”였고, 바로 이게 현대 MMA의 시초라 하는 ”발리 투도“ 였지요.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그레이시 가문과 유클리데스 하템은 이 발리 투도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초기 발리 투도의 역사 (https://youtu.be/NI8gkySDu1Y)


그렇게 하여 최초의 라이벌리라 할 수 있는 “하템식 쥬주쓰” 와 “그레이시 쥬주쓰”의 라이벌리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주짓수는 벌써부터 “기와 노기” 개념이 잡혀버렸다는 것입니다. 하템은 유술을 배웠기도 하지만 캐치레슬링도 배웠기 때문에, 애초에 “도복을 안 입고도 싸우는 방식”에 익숙했고, 그레이시는 마에다에게 직접 사사를 한지라 “도복을 입고 싸우는 방식“에 익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템은 이걸 그냥 도복을 애초에 잘 입질 않으니… “자유로운 싸움 무술”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포르투갈 어로 “Luta livre”가 되어서 루타 리브레가 되었습니다. 물론 루타 리브레도 BJJ(브라질리언 주짓수) 급은 아니어도 아직도 브라질 포함 전 세계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이제는 이것이 “에스포르티바”(esportiva)와 “브라질레이라”(brasileira)로 나뉘었습니다. 즉 MMA 등의 경기용으로 하는 것을 “루타 리브레 에스포르티바”이고, 정말 실전 상황에서 (무기를 들거나 한 경우) 쓰거나 경찰들을 위해 하는 것은 “루타 리브레 브라질레이라”라고 나눈 것이죠. 차이는 일단 현대 MMA에서 금지하는 급소 공격이나 깨물기, 눈 찌르기, 구강에 손 넣기, 박치기 등의 기술이 빠지고, 좀 더 상대를 “조여서 끝내기 쉬운” 형태가 에스포르티바 (스포츠용)인 것이고, 브라질레이라는 그런 거 없이 정말 상대를 “쳐서 제압해야 하는” 상황에서 쓰는 기술이 많습니다.


UFC 선수 비센테 루케 선수가 직접 탐방한 루타 리브레 도장 (https://youtu.be/oWQcZorljT4)


카포에라가 19세기와 20세기에도 일종의 “브라질 전통문화” 화 해서 살아남았듯, 발리 투도도 역시 20세기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서 살아남았습니다. MMA의 시대가 와서 “발리 투도는 없어진 것 아니었나요?”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어 말하자면 아직 리우 데 자네이루나 몇몇 도시에서는 지역 리그 형태로 운영 중인 곳도 있습니다. 제일 그중에서 큰 곳이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리는 발리투도 경기들인데, 유튜브에도 영상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지금 현대 MMA에서는 금지된 기술을 일부 쓸 수 있기 때문에 다소 잔인할 수 있다는 거만 빼면 그래도 “발리 투도 경기의 원형”을 비교적 남겨놓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래도 UFC나 PFL 같은 북미 MMA 리그들의 일종의 "인재 팜" 역할을 해왔던 브라질의 특성상 MMA 정규 룰로 하는 곳이 대부분이고, 대표적으로는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하고 있는 "정글파이트"가 브라질 내에서는 큰 MMA 리그이기도 합니다.


브라질에서 진행중인 Jungle Fight MMA 경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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