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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HSonG May 30. 2024

프라이즈 파이트, 싸움이 “노동”이 된 순간

“돈을 받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처음의 시대

우리가 보통 프로 스포츠, 그러니까 “프로페셔널 스포츠“ (Professional Sports)의 정의를 어떤 것이냐라고 하면 대개 ”돈을 받고 운동을 하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아예 직업에 있어서 ”운동선수“라고 하면 보통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어떤 종목이세요? “라는 것과 ”어떤 팀이세요? “라는 것이니까요. (뭐 관공서 및 공기업, 공기관 소속으로 뛰는 “실업선수” 도 있지만, 일단 그런 실업 선수들도 일단은 “세미프로 스포츠 선수”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프로 스포츠의 “기원”을 따질 때 그것이 어디서 시작했느냐라고 물어보면 이 부분에서는 머릿속이 깜깜해지실 것입니다.


런던대학 “History Hub” 채널의 산업혁명 해설 영상 (https://youtu.be/9xf1Lsy4CZ8?si=NlhSRYDUXW5gsaDN)


일단, 프로 스포츠가 언제부터 시작을 했느냐를 따지려면 18세기 중반, 1760년대의 “산업 혁명”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전까지는 모든 스포츠 선수는 모두 다 “아마추어” 였습니다만, 이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겨우 1839년의 영국에서야 이루어졌으니까요.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제 사람들의 생업이 단순히 “농업-어업-목축업 “ 과 단순한 ”길드“ 위주의 생산업(대장간이라던가, 광산 채광 같은 것들) 만을 해야 했던 시기에서 드디어 기계를 통해서 생산을 하는 ”공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때입니다. 모직물과 면직물에 “방직기”와 “방적기” 가 도입되면서 더 많은 섬유와 천을 생산할 수 있고, 양조장과 증류소는 이전까지 작은 단위로 해오던 주류 제조를 “커다란 발효조” 와 “커다란 증류기” 로 하면서 영국 기준으로는 “더 많은 위스키, 더 많은 진”을 생산했으며, 이것도 와트의 “증기 기관” 이 나오면서 석탄을 때어서 증류기를 가열한다거나, 증기 기관차를 도입한 철도로 생산한 물건들을 “수송” 하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드디어 지구 위에 “잉여 생산물”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이 잉여 생산물을 팔아서 돈을 버는 시대가 됩니다. 또한 “인클로저 운동” 으로 대표되는 사유 재산의 확대 (라고 좋게 썼지만 결국엔 개인의 소규모 농지를 대규모의 지주가 냅다 몰수-합병하는 방식의) 상황이 계속되면서 영국의 사람들은 점점 도시로 가 버리게 됩니다. 실제로 인클로저 운동이 끝났을 때 “영국 전 국토의 반이 사유재산화” 되어버려서 몰수당한 사람들은 그저 “돈만 가진 채로 “ 쫓겨난 지라 도시에 들어가서 살아야 했거든요.


“공장” 과 “대량생산” 그리고 “물류 이동”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노동” 의 개념도 바꿔버립니다. 이전에는 수공업 및 농업일 때는 “직접 수고를 해서 벌어먹는” 시대였던 것이 공장제 대량생산의 시대에서는 “기계를 가진 물주” 가 기계를 돌릴 사람들을 “고용” 해서 제품을 생산하면, 이 제품을 판매해서 수입을 올리면 그중 일부를 고용한 직원들에게 “급여” 로 배분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장님과 월급쟁이”의 관계 즉 사주와 노동자의 관계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지금 와서는 숱하게 나오는 갈등의 주 소재이지만, 당시만 해도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기계의 도입은 점점 확대되어 갔고, 드디어 그 정점에 다다른 것이 나왔으니 바로 1862년 제임스 해리슨이 발명한 “에테르 냉매식 냉장고” 와 1851년 제임스 킹이 발명한 “최초의 드럼회전식 세탁기”, 그리고 1885년 카를 벤츠가 (이전 퀴뇨의 초기의 증기식 자동차를 개선하여) 개발한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였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인 1860년 경 드디어 “현대식 유전 채굴방식“ 이 개발되면서 (물론 석유는 오래전 중국에서 채굴을 하여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타르는 오래전에 중동에서 많이 썼던 재료였습니다. 우리가 역청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 타르였기 때문입니다.) 석탄과 석유의 세상이 열리면서 드디어 사람들에게 “여가 시간”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런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런던 복싱 아카데미에서는 “신사와 귀족들만” 복싱을 수련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은 당연히 젠트리 계급 이상의 신사와 귀족층이 “일종의 교양과 상무정신 함양”이라는 이유로 복싱을 수련했었는데 (참고로 축구도 비슷한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축구는 엘리트 계급의 학교에서 체육종목으로 하던 것이었는데, 여기서 “손으로 공을 들고뛸 수 있느냐 / 없느냐” 로 지금의 축구와 럭비가 나오게 되었죠.) 드디어 이 복싱 아카데미에 “평민” 계급의 사람들이 복싱을 배우러 오게 됩니다. 평민이어도 일찍이 공장을 돌려서 부유해진 ”자본가“ 였던 것이고 이런 자본가의 사람들이 일을 끝내고 남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 하기 시작한 것 중 하나가 이 ”복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모든 평민들이 ”귀족들이 하는 방식의 “ 복싱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일반적인 평민들과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의 루틴이 ”일터와 집“ 에서 끝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는 단순히 “공장에서의 하루 일”로는 만족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니면 “공장에서 쉬는 시간”을 활용해서 뭔가를 할 수 없을까? 라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게 “개인” 단위라면 공장에서 일이 끝나고 주경야독 식으로 저녁이나 주말에는 “베어너클 파이트”를 동네 사람들 단위로 한다거나, 이게 “단체” 단위라면 공장 노동자들끼리 모여서 축구를 하는 방식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그 아스널 FC의 시작이 런던 울위치 왕립 무기고의 노동자들이 구성한 “다이얼 스퀘어 풋볼팀”입니다.)


“Absolute History” 채널에서 다룬 초기 영국 베어너클 파이트 (https://youtu.be/7GTrUCXALX8?si=4JKIP0CEeTOh8ClQ)

이쯤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산업혁명 전후 시기” 유럽 사람들에게 나왔던 베어너클 파이트의 방식입니다. 원래, 산업혁명 전의 유럽의 베어너클 파이트는 정말 “맨주먹으로 하는 막싸움”이었습니다. 그나마 지역마다 방식이 조금 달랐는데 (약간 아시아의 씨름과도 비슷한 무언가입니다.) 아일랜드에서는 “서로 발을 맞선 상태에서 서로 한 대씩 치고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라는 아이리쉬 룰 베어너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당시 프랑스의 법이 (지난번 결투 관련 편에 이어져서 결투에 대한 법적 규제가 되면서) ”칼과 손을 써서 결투를 할 경우 법정에서 처벌한다 “라는 규정 때문인지 당시 프랑스의 선원이나 농촌의 사람들이 ”그러면 발로 서로 때리는 건 문제가 안된다는 거네? “라고 하면서 손은 그저 보조적 수단으로 내버려둔 채 발로 주로 서로 싸우는 방식의 싸움을 하다, 이게 체계화되어서 ”사바테“가 되었고 이게 대충 18세기 중반까지였습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러시안 브롤”이라고 해서 1:1로 막싸움을 하되, 사람들을 빙 둘러싸서 벽을 만든다던가, 통나무나 건초더미로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이길 때까지 맨주먹싸움을 하는 방식의 베어너클 파이트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나마 영국은 런던 복싱 아카데미에서 글러브를 끼우고 하는 “퀸즈베리 룰 복싱”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이것이 아직은 평민과 노동자들에게는 완전히 보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영국의 베어너클 파이트라는 것은 “넓은 개활지” 혹은 일정한 공간에서 그냥 1대 1로 어느 한 사람이 KO 당할 때까지 하는 싸움이라는 것이 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방식이 미국 신대륙 개척 시기에 신대륙 이주민들 사이에 퍼진 것이 “러프 앤 텀블“ 방식의 베어너클이었지만, 이건 진짜 “결투용”으로만 하고 말았던 것이라 얼마 안 되어 그냥 미국은 다시 총과 칼로 하는 결투로 바뀌어 버리면서 잠시 사장되었습니다. 또한 독일이나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기존의 결투 방식에서 내려온 “퍼스트 블러드” 방식이 이어져서 “먼저 피를 흘린 사람이 패배” 하는 방식으로 끝나거나, 단순히 피만 흘리는 것으로는 판정 시비가 너무 많이 나오니, “먼저 다운되는 사람이 패배” 한다라는 식의 “퍼스트 다운” 방식의 베어너클 파이트가 성행합니다. 또한 북유럽 지역에서는 퍼스트 다운으로도 만족을 못했는지 “항복선언이 나올 때까지” 하는 실로 바이킹의 후예 다운(?) 방식이 있었고, 이것도 지역에 따라서는 “상대의 공격을 막는 건 허용되나 피하는 순간 반칙패“ 내지 ”맨주먹에 대충 옷소매로 가린 건 허용“ 같은 지금 MMA 시기에는 ”말도 안 되는 “ 것들이 왕왕 나왔습니다.


1860년대 “프라이즈파이트“ 경기 필름영상 (AP통신 영상 아카이브)

다시 산업혁명 시기로 돌아와서, 런던의 사람들은 이 베어너클 파이트를 2가지 방식으로 발전시킵니다. 먼저 첫 번째는 “베어너클 파이트에 상금을 걸자”였습니다. 단순히 공장 노동자들이나 평민들의 취미 내지 갈등 해결을 위한 주먹다짐 수단이 아니라 ”이것을 잘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자 “라는 방식으로 런던의 자본가들이 소소하게 대회를 열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 대회가 진행이 되면서 귀족층이 끼고 귀족들이 이것에마저 ”도박“ 을 도입하면서 영국 정부의 제재를 받긴 하지만, 그래도 단순이 사람들의 ”스트레스 해소 수단“ 내지는 ”짬짬이 일을 쉴 때 하는 체력단련“ 수준이던 베어너클 파이트는 ”공장 노동 외의 부수입“ 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되면서 영국정부가 법으로 막으려고는 했지만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하는 상황까지 옵니다.

그러고 나서 생긴 두 번째는 드디어 “베어너클 파이트에 룰”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초기의 프라이즈 파이트의 경우 “그냥 1:1로 맨손 싸움을 해서 어느 한쪽이 더 못 싸울 때까지 가면 승패가 판가름 나는” 방식이 끝이었기 때문에 “어쨌든 쓰러뜨려서 이기면 된다”라는 것에 입각하여 각종 반칙이 난무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대회가 진행되면서 런던에서 프라이즈 파이트를 개최하는 주최자들은 드디어 “이런 공격은 반칙이다” 라면서 “룰”을 제정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런던 프라이즈 룰”이었고, 역사가들은 이 것을 “초기 원시 프로복싱” 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물기, 박치기, 허리 아래 타격 금지 / 단, 상대를 잡거나 안은 상태에서 던지기는 허용한다.

2. 상대가 쓰러졌을 때 타격 금지 / 쓰러진 상대는 8초의 카운트다운을 세며, 그때 일어나면 30초간 휴식 후 다시 경기 재개

3. 세컨드 대동 가능 (없으면 혼자 뛰어도 됨)


문제는 이 런던 프라이즈 룰마저도… “판정승” 의 개념이 없이 그냥 “어쨌든 상대가 8초의 카운트다운을 세도 시합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한다”의 시간 무제한 경기였기 때문에, 결국엔 “체력이 남아도는 사람이 이기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때 나오는 꼼수 아닌 꼼수가 대충 맞고 드러누운 다음에 8초 안에 일어나서, 30초를 쉬고 다시 하면, 좀 힘들다 싶을 때 어느 정도 공격을 막고 누운 후에 일어나서 쉬고, 이것을 계속 반복하는 상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거로 인해 야사 기록에 알려진 최장 경기시간은 무려 ”9시간“ 넘게 했다는 기록이 나왔을 정도니 이쯤 되면 “탈진 안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이 “프라이즈 파이트“ 의 여파는 대단했습니다. 왜냐면 드디어 이 지구 위에 ”전문 프라이즈 파이트 선수“라는 일종의 ”직업 선수“ 의 개념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부업“처럼 하던 사람들 중에 의외로 ”이것만 해도 먹고살 수 있을 급의 “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 몇몇 나오기 시작했고, 아무튼 ”폭력적인 게 문제라고 해도” 일단 보는 재미는 충분히 있던 스포츠였던 것은 맞기 때문에, 아무리 나라에서 “도박 성행 방지” 라든가 “사회 미풍양속상 안 좋아서” 금지를 한다 해도 이걸 결국엔 막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영국 현지의 도시들과 순회 서커스를 통해서 이 프라이즈 파이트 경기는 “정례화” 되었고, 특히 이 서커스장을 돌면서 했던 프라이즈 파이트의 전례를 따라 선수들의 “시즌” 이 만들어졌죠. 서커스에서 하는 프라이즈 파이트는 그 순회 날짜를 미리 광고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전문 프라이즈 파이터들은 그 일정에 맞추어 타지를 가거나, 자기 지역에서 하기 전에 맞춰서 몸을 준비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1913년 체코에서 진행된 “캐치레슬링” 프라이즈파이트 경기 (https://youtu.be/CLNfu5GXuhQ?si=I9tZfRT0NUNxB1rC)

그리고 이러면서 같이 나온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프라이즈 파이트는 “베어 너클” 경기가 주였긴 하지만, 그래플링을 하는 사람들의 경기도 간간히 열렸고, 이것은 영국에서는 아직 “올림픽 자유형 레슬링” 이 정립되기 전이었습니다. 이때 하던 레슬링을 “포크스타일(FolkStyle)” 레슬링이라 했고, 이것을 개량해서 ”Catch as Catch Can”이라는 서브미션과 핀 폴 룰로 승부를 가르는 방식으로 개량을 하게 되니 이것이 “캐치 레슬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들 사이에 선수들이나 묘기꾼들이 하는 일종의 “예능성 경기” 내지 “합대련” 이 있었고, 바로 여기서 “프로레슬링” 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면서 “컴뱃 스포츠” 의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오픈 챌린지” 방식, 즉 현장에서 도전자를 받아서 계속 경기가 이어지는 방식이라던가, 토너먼트 방식, 즉, 미리 참가자를 받아서 1명이 우승할 때까지 하는 경기 방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정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흘러가며, 전문 선수들을 후원하는 후원자와, 이들을 관리하는 “프로모터” 와 “매니저” 개념이 등장했고, 이 방식은 영국에서 프랑스와 독일등의 유럽을 거쳐서 신대륙인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등으로 점점 퍼져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대는 1900년대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시대는, 엄청난 격동의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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