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에서 살아남기
게임을 즐겨하진 않는 편이지만 게임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이템빨’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안다. 특히 전투 게임에서 레벨을 높이고 적에게 쉽게 당하지 않는 캐릭터가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기능을 지닌 무기 아이템들을 효과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게임 밖 인생도 별로 다르지 않다. 갖춰야 할 무기의 종류가 다를 뿐. 삶의 많은 요소들이 순위로 매겨지는 의자 게임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스펙’이라는 무기를 갖추어야 한다고 배운다. 학교도 부모도 미디어도 입을 모아 말한다. 그래야 인생이 수월해진다고, 인생의 레이스에서 뒤처지지 않는다고.
학창 시절에 갖춰야 할 유일무이한 무기는 역시 성적이다. 그 성적을 토대로 학벌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면 갖춰야 할 무기는 더욱 다양하고 많아진다. 정규직 명함은 많은 사회 초년생들이 가장 열렬하게 꿈꾸는 무기다. 그 안에서도 기업의 규모와 안정성, 연봉 등에 따라 무기의 레벨이 나뉜다. 그 외에도 자가 소유의 브랜드 아파트(빚으로 사더라도), 배우자와 아들딸로 구성된 ‘정상가족’, 평균 이상의 연봉, 정년이 보장된 일자리, 부동산, 직급과 나이에 따른 승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인맥 등 삶을 안전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리라 의심치 않게 하는 수많은 무기들이 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나는 전쟁터에서 제대로 된 갑옷 하나 없이 덜렁덜렁 걷으며 산책이나 하고 있는 레벨 1의 최약체 캐릭터다. 안정적인 월급이 보장되지 않는 非정규직 프리랜서에 결혼을 하지 않은 非혼. 당연히 자식도 없는 無자녀이며, 서울의 ‘억’ 소리 나는 집값에 자가는 아직 꿈도 꾸지 못하는 無주택자이다. 게다가 이제는 슬슬 여러 정책 지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청년의 기준에서도 벗어나고 있으니, 非청년도 옵션에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튼튼한 스펙으로 무장을 해도 살아남을까 말까인 이 험난한 세상에서 非와 無로 둘러싸인, 조금 다른 의미의 비무장지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자의로 취한 非와 無도 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도 있다.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비무장지대의 삶은 의외로 좋은 점도 많다. 튼튼한 갑옷이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가볍고 자유롭기도 하다. 사회가 요구하는 수많은 정석의 ‘역할놀이’에서 비껴나갈 수 있고, 좀 더 자율적으로 내 삶을 꾸릴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비무장지대는 불안하다. 위기에 너무나 취약하다. 총탄이 날아들면 나를 지켜줄 튼튼한 방패가 없고, 구덩이에 빠졌을 때 부여 잡을 밧줄은 약하고 짧아 보이기만 하다.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만족을 추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보기도 하던 비무장지대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사람들의 일상이 흔들리고 위태로워졌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 각자의 전쟁을 하며 재난의 시대를 버텨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부실한 무기로 겨우 버티던 사각지대 바깥의 이들에게 재난의 바람은 더욱 가혹하게 분다. 단적인 예로 경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많은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의 일감이 끊겼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튼실한 재무 구조를 갖추지 못한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에게도 칼바람이 불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들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노인층은 제공되는 그 안에서 유용한 정보를 골라내기에도 벅차다. 당장 일자리를 잃으면 한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 취약층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 재난으로 타격을 입은 이들을 위한 여러 지원정책이 쏟아지지만, 어쩌면 진짜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은 그 지원정책의 규격에조차 자신의 삶을 맞출 수 없을 것이다.
최근 키우던 식물 하나가 병충해를 입었다.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병충해는 유독 식물의 가장 여리고 어린잎을 잘 공략한다고 한다. 재난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는 사회의 사각지대, 취약한 비무장지대부터 파고든다. 1995년 시카고에서 일어난 폭염 당시 사망자 중에는 유독 노인과 빈곤층이 많았다. IMF 시기는 빈부격차를 더욱 벌리면서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이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규격화된 삶 속으로 들어가 ‘스펙’의 무기를 갖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불안을 부추긴다. 각자도생의 셈법을 추구하게 만든다.
평화와 불안, 즐거움과 빈약함이 공존하는 나의 비무장지대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모호하고 막연한 단어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굴려본다. 사회가 울타리 쳐놓은 수많은 ‘평균’에서 벗어나 온갖 非와 無를 명함으로 달고 있는 나에게 지속 가능한 삶은 가능할까. 위기에 흔들릴지언정 함께 풍파를 막아내며 새로운 텃밭을 일굴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조건 더 많은 무기, 더 값비싼 무기를 갖추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삶보다는, 비무장이어도 괜찮은 삶이고 싶다.
https://brunch.co.kr/@forgetage/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