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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나 Nov 25. 2021

어느 게으른 1인가구 프리랜서의 루틴 분투기

가지 가지 다 하는 에디터의 하루


*해당 에세이는 2019년 <프리낫프리> 2호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루틴을 위한 장치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분투하고 있군요..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 장면


나는 글 관련 작업을 주로 하는 프리랜서다. 동시에 1인가구 생활자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으레 “자유롭겠다”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먹고사는 자에게 자유란 따뜻한 아이스커피 같은 불가능한 상태의 무엇이지만,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건 곧 제때 자고 제때 일하는 규칙적인 생활과 멀어지기 쉽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험자는 알겠지만 프리랜서의 일이란 대체로 매일 일정하게 할 수 있는 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들쑥날쑥한 외주 업무는 생활 리듬도 덩달아 날뛰기 딱 좋은 멍석을 깔아준다. 게다가 내게는 하루 12시간씩 6박 7일을 몰아서 일해도, 새벽까지 넷플릭스 드라마를 몰아 보다가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도, 삼시 세 끼를 인스턴트로 때워도 잔소리할 타인의 존재가 없다. 심지어 계획대로 착착 움직이는 근면 성실형과는 거리가 먼, ‘내일 해도 될 일을 굳이 오늘 해야 할까’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인간형이다. 게으르다는 소리다.


프리랜서라는 노동 형태와 1인가구라는 가구 형태, 그리고 미루는 기질이라는 삼요소가 만나면? 그 폭발력은 무엇이 됐든 상상 이상이다. 일이 밀려올 때는 마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일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체력도, 생산성도, 의욕도, 정신머리도 모조리 함께 휩쓸려 나간다. 그런 후에는 ‘딱 한 편만 더’를 반복하면서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미드를 새벽까지 본다 – 알람을 13번쯤 끈 후 해가 정수리 위로 올라올 때 겨우 일어난다 - 어차피 오늘은 망했다고 합리화하며 오후 내내 와식생활을 한다 – 남들 노는 저녁이 되면 기어나가 또 논다 - 당연한 수순으로 찾아오는 불면의 밤에 괴로워하다가 잠든다 – 다시 마감이 찾아오면 퀭한 눈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이번 마감만 끝나면 규칙적으로 살 거야’라는 부질없는 결심을 한다-라는 루틴만을 착실하게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했다. 철저하게 나를 불신하자. 프리랜서에 1인가구인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은 의지에 달렸다’ ‘마음만 먹으면 계획대로 할 수 있어’ 따위의 생각은 치명적이다. 그동안 나를 인간답게 살게 한 것이 회사의 근태 관리와 사무실 공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루틴을 위한 외부 장치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한 달 단위로 지켜야 할 습관 점검표를 만들었다. ‘8시 이전에 기상’ ‘주 3회 이상 운동’과 같은 목표와 일별 점검표를 만들어 화장실 문에 붙였다. 접속 안 하면 그만인 습관 만들기 앱에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던 차에 생각해낸 방법이다. 집에서 가장 많이 왔다 갔다 하는 장소에 점검표를 붙여두니 아무래도 더 의식을 하게 됐다. 매일 형광펜으로 실행 여부를 표시하고 한 달 단위로 평균 점수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점검표도 지키지 않으면 그만. 강제성 있는 외부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올 초에는 ‘운동 안 하면 남은 미래는 비명횡사뿐!’이라는 생존 본능으로 운동센터에 등록하면서 자율적으로 가는 단체수업 외에 주 1회의 오전 PT를 함께 시작했다. 다행히도 ‘늦잠 욕망’ VS ‘약속 어기기를 싫어하는 책임감, 비싼 트레이닝 비용 생각’에서 후자가 승. 초반에는 새벽까지 마감을 하다가 수면 부족 상태로 운동을 가는 날도 허다했지만 차차 그 횟수가 줄었다. 한 번씩 루틴이 깨져도 운동을 기준점 삼아 움직이다 보면 서서히 일상의 시간표가 회복됐다.


들쑥날쑥한 기상 시간을 잡기 위해 매일 대화를 나누는 단톡방 친구들에게 “아침 8시 전에 일어나겠다!”라고 선포한 후 기상 보고도 했다. 이 단톡방은 기상 시간 외에도 일상의 루틴을 지키는데 여러모로 효과적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급격히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식단 사진이나 운동 여부를 공유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다. 디스를 친밀함의 표현으로 삼는 사이지만 운동과 식습관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잘한다 잘한다” 당근 주기를 아끼지 않는다. 감시자이자 지지자인 동료가 없는 1인가구 프리랜서에게 관계망을 활용한 소통은 루틴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동네 프리랜서 모임도 하나의 루틴이다. 저마다 다른 공부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 동안 할 일을 하다가 흩어지는 느슨한 모임인데, 이 역시 루틴이 무한정 깨지지 않도록 지지대 역할을 해준다.


이외에도 ‘나른해지는 오후에는 무조건 노트북 들고 카페행’ ‘타이머 맞추고 외출 준비(정해진 출근시간이 없어 꾸물거리는 시간이 길어지므로)’ ‘다른 프리랜서들의 브이로그 보며 일 시작하기’ ‘사적인 약속은 최대한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잡기’ 등 루틴을 위해 시도했거나, 시도 중인 여러 장치가 있다. 자가 임상실험을 해 본 결과, 주기적으로 장치를 바꾸거나 더하며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노력이 무색하게 침대에 널브러져 하루를 보내거나 할 일을 방치한 채 자체 휴가를 즐길 때도 있다. 미루고 미룬 마감을 끝내느라 밤잠을 설친 후 운동을 가거나, 아예 빼먹는 사태도 여전히 일어난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놀랍게도 애초부터 나는 나를 믿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예지력과 자기 객관화 능력에 흡족해하며 루틴을 다시 시작하거나 더 효과적인 장치를 고안하면 된다. 그리고 솔직히 적당히 느슨해도 되고 때로는 뒤죽박죽 일상을 즐겨도 되는 게 안정적 월급과 맞바꾼 프리랜서의 특권 아닌가.


그러니까 앞뒤 안 맞는 소리지만 루틴 만들기의 핵심은 ‘내가 알아서 할 리 없어’라는 철저한 자기 불신으로 시작해 ‘내가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우쭈쭈 자기애로 끝나야 한다는 거다. 때로 무너지고 휩쓸리고 지지부진해지는 일상 안에서 굳건히 지켜내야 할 단 하나의 루틴이 있다면 바로 이 의식의 흐름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겨우’ 규칙적으로 살 수 있다니. 애초에 프리랜서가 적성에 안 맞는 인간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이 들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찌 됐든 1인가구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현재의 상태를 잘 꾸리고 지켜나갈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사실 프리랜서는 가능하다면 오래 지속하고 싶은 매력적인 상태이기도 하니까.



박의나

프리랜서 에디터이자 라이터. 독립잡지 '나이이즘'을 발행하며, 에디터 세계 안내서 '근데 에디터는 무슨 일 해요?'를 펴냈다. 콘텐츠 기획, 집필, 인터뷰 등 콘텐츠를 만드고 편집하는 다양한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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