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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킴 Jul 18. 2021

1990년 2월의 그 심장소리.

조덕배의 '꿈에'를 듣다가 어느덧 옛 생각이...

고등학교 1학년이 마무리되고

2학년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생각이 많았던 사춘기의 무료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나에게 미팅에 조인해달라는

날라리 친구의 갑작스러운 요청이 있었다.

4대 4  미팅이었다.

당시 내겐  고등학생 미팅은 생각지도 못 했던 일이었다. 대학에 가야 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내가 다른 날라리 대신 대타로 나간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내 대답은 서슴지 않고 바로 '오케이'였다.

첫 미팅이라 호기심도 많았고

 무료함에 반항심도 컸던 시기였다.


우린 혜화동 대학로에서 만났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마로니에 공원의 낭만적인 모습을

뒤로 하고 카페로 가서 기다렸다.

세 친구들은 들어서자 익숙하게 음료를 주문했다. 오렌지주스를 시키려다 옆 친구 권유로

체리에이드를 시켰다.

그녀 G도 분명히 얼음을 뺀 체리에이드였다.

한쪽 손에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스트레이트성 헤어는 얼굴의 반을 덮었다, 비췄다 했다. 나의 고집스러운 윤리적 잣대의 기준은 그때부터 한 순간 사라지고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다는 법칙이 새로 정립되는 모순, 그리고 자기 정당화.

G라는 여성 앞에서 심장소리가 쿵 하면서

 공부하면서 배운 것은 쉽사리 주저앉았다.


여자들이 각자 가져온 소지품을 내놓고

남자들이 하나씩 선택해서 렌덤 하게 짝꿍이 되는

 복불복 커플 만들기 이벤트였다.

난 분명 G와 커플이 되어 당황스러워했지만,

그녀는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친구 중 싸움도 잘하고 우기기 선수였던 그 녀석은

이번 게임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여성이 남성 소지품을 고르는 게 정석이라나...


나 빼고 모두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발 빠르게 남자들 소지품 취합이 이루어졌다.

우기기 친구는 무릎 아래로 은밀하게 준비해 온 소지품을 모았고, 난 준비해 온 소지품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 친구가 '동전이라도 내'라는 말에

500원짜리를 주머니에서 빼 넘겨줬다.


G는 우리 둘의 대화를 분명 엿듣고 있었는데,

소지품 4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마자

 500원짜리 동전을 낚아채듯이 G가 가져갔다.

 그리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 얼굴 쪽으로 내뿜었다.

 가려진 반쪽 헤어가 귀 뒤편으로 넘어가더니

반짝이는 두 눈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똑똑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뭔가 그늘이 느껴졌다.

그때 내 심장에 쇠구슬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첫 미팅에서 촌스러운 짧은 머리의 난

 참으로 부담스러운 이성과 커플이 됐고

 함께 대학로를 걷게 되었다.

1990년 2월이라 눈이 녹아 내려서

슬러시 같은 길 위였다.

청바지 아랫단이 진흙으로 도배가 될 정도로

 많이 걸었던 그런 날이었다.

대학로 리어카에서는 조덕배의 '꿈에'라는 테이프 노래가 촉촉하게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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