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방문한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책에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느 곳에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존재 가능한 도시의 형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들이 그려져 있다(p173).” 베네치아에서 온 이방인이 들려주는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치 도시들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르코 폴로는 칸에게 여러 도시들을 이야기해주면서,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길의 계단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량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등을 말하는 게 별 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17p).”이다.
“도시는 기억, 욕망, 기호 등 수많은 것들의 총체이다. 도시는 경제학 서적에서 설명하듯 교환의 장소이다. 하지만 이때 교환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언어, 욕망, 추억들도 교환될 수가 있다(p211).”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여행한 도시의 기억, 욕망, 추억을 칸에게 전한다. 처음 동방에 도착해 그곳의 언어를 잘 모르던 폴로는 몸짓과 감탄사, 동물 울음소리, 가방에서 꺼낸 각종 물건들로 도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칸이 각 나라의 수많은 고유어들과 각 부족의 말들을 익혀, 도시에 대해 보다 더 세밀한 묘사를 할 수 있게 되고, 그의 질문에 자세하게 대답할 수 있게 되자 칸은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즐겁지 않는다. “쿠빌라이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은 의미를 분명하게 전할 수 없는 보고자에게 전해주는 모든 사실이나 정보 주위에 남아 있는 공간, 말로는 채울 수 없는 여백이었다(p52).” 세밀한 묘사가 아닌,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은 칸을 그 도시 한복판에 두기도하고, 길을 잃게 하기도, 혹은 그 곳에 살아보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시를 상상하고, 그 상상 속의 도시를 향유한다. 여행하는 도시는 멋지고 아름답지만, 생활하는 도시는 괴롭다고 말하지 않는가.
타마라 시의 상인들이 “판매대 위에 진열해 놓은 상품들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물에 대한 기호로서 가치를 가진다(p22).”고 말했듯, 도시는 사람들의 욕망을, 그 사치를, 과시를 이용할 줄 안다. 수가 놓아진 머리띠를 사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고정하는 물품을 사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수가 놓아진 머리띠는 우아함을 뜻한다. 이러한 상품을 착용함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이미지를 사는 것이다. 도시는 사람들의 상상으로부터 존재하고, 그 상상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으로 지속되며,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한 노동들로 유지된다. 매혹적인 도시 아나스타시아처럼 도시는 도시민들을 착각하게 한다. 도시는 모든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완전체이고,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 욕망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실상은 다르다. 그들은 아나스타시아라는 매혹적인 도시의 욕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들은 도시의 노예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동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도시는 욕망으로 사람들을 꾀어내어 도시가 가져야만 하는 일들을 수행하게 만든다. 사람을 매혹시켜 그들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마우릴리아를 방문한 이방인은 도시의 예전 모습이 그려진 엽서를 보고 애석함을 느낀다. 이곳은 오래 전 시골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만약 마우릴리아가 그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오늘날에도 우아함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도시는 더욱더 많은 매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바뀐 도시의 모습을 통해, 예전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며 향수에 젖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p42).” 마우릴리아를 통해 나는 ‘도시는 과연 객체로써 실존하는가’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도시에 대한 향수는 허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잠시 다녀온 유럽에서의 몇 달, 잠깐 놀러간 곳의 장면들, 우리는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향수를 느낀다. 인간의 뇌는, 특히 도시에 맞게 발달된 Metropolitan mentality는 힘들고 예민하고 복잡한 기억을 희미하게 하고,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들을 오랫동안 남겨놓기 때문이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던 베네치아의 한 이방인은 동방 제국의 황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폐하께서 떠나지 않고 필리스에 머물며 여생을 보내야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곧 도시는 폐하의 눈앞에서 빛을 잃고 원화창, 선반위의 상, 둥근 지붕들은 사라져버립니다(p117).” 우리는 도시를 상상하고, 욕망하고, 추억하면서 도시의 존재를 인식한다. 우리가 추억하고, 애정하는 도시의 모습은 과연 진짜일까? 내가 진정 원하고 그리던 도시의 모습, 시골에서 상경한 나의 관점에서의 도시는 언제나 빛나고, 바쁘고, 시끌벅적한 그런 전형적인 대도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자리를 잡고, 때로는 마르코 폴로와 같은 이방인으로 때로는 나의 욕망을 도시에 투영해 나의 노동력을 제물로 바치는 이곳의 프롤레타리아로 나는 존재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도시의 가장자리, 혹은 그 중심일지도 모르는 복잡하고 어려운, 그렇지만 왠지 동경하고 싶어지는 모습은 도시가 나에게 심은 환상이었다. ‘이처럼 멋지고 복잡한, 어른스러운 곳에 너도 들어와서 나에게 노동력을 바치렴’이라며 나를 유혹하는 번쩍번쩍한 포장지였던 것이다. 도시 속 프롤레타리아가 된 나의 일상은 잦은 야근과 적은 임금, 과로에 지친 몸을 제대로 뉘울 수 없는 비좁은 원룸이었을 뿐, 내가 어릴 적 선망하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의 쿨 한 뉴요커의 모습은 아니었다. 도시는 이미지로써 존재한다. 타마라 시의 한 여인이 시장 가판대 위의 수놓인 머리띠를 구매함으로써 비로소 우아함을 뽐낼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는 도시와 색을 맞추기 위해 보호색의 옷을 껴입어야한다.
베르셰바의 주민들은 “땅속에도 또 다른 베르셰바, 그들이 멸시하고 무시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들이 숨어 있는 장소가 존재한다고 믿(p146)”는다. 그들은 땅 속에 가장 권위 있는 건축가들이 설계하고 시장에서 가장 값비싼 자재들을 이용해 건설한 건물들과 장식 술과 리본, 끈들로 꾸며진 도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이는 “스스로의 텅 빈 항아리를 다시 채우는 데 골몰하는 우울한 열정을 미덕으로 여기기(p147)” 때문이다. 어쩌면 휘황찬란한 천국과도 같은 (그들이 칭하는)지옥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행복은 환영에 불과하고 과거에도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행복 추구는 결국 유토피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p211).” 유토피아를 본 적 있냐는 칸의 물음에 유토피아는 없다고 말하는 폴로. 그는 되려 세상은 어차피 지옥이라고 말하면서, 그 속에서 지옥 같지 않게 사는 방법을 말해준다. 이는 이 책의 저자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모습과도 닮았다. 칼비노는 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말한다. 하나는 베르셰바의 주민들처럼 지옥을 받아들여서, 우리가 사는 곳이 지옥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서 거기에 공간을 부여하고 그것의 성질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도시는 선과 악이 얽혀 있고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우리의 현실 속에 공존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찾아내고 지속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