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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읁 Jan 06. 2021

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

공간과 시간은 도시화 되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 속에서 도시는 교환 가능한 재화를 생산하고, 운반하고, 판매하면서 자본을 배치한다. 도시에서는 자본의 배치를 위한 시간이 도시의 공간을 측량하는 척도가 된다. 자본의 생산되려면 생산을 위한 장소가 전제되어야하며, 자본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배나 수레, 항구, 은행과 같은 장소가 필요하다. 자본을 위한 시간은 도시의 공간을 측량하고, 공간은 시간을 규제한다. 따라서 도시는 스스로에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도시는 스스로에게 필요한 모습을 찾아 스스로를 써나간다. “도시는 위협을 가하고 위협을 당하는 ‘대상’인 동시에 축적의 주체, 즉 역사의 주체이다(p406).” 이러한 권력을 쥔 도시는 주변 농촌을 포획하고 착취하면서 동시에 농촌을 보호해주는 이중성을 띈다. 도시는 자신의 고정된 중심을 정립하고, 스스로 중심으로 존재하며, 자신을 받아들이는 주변을 에워 쌓인 특권적인 장소로써 존재한다. “도시는 자신의 복제, 반향, 메아리를 통해서 자신을 지각하며, 높은 망루에 올라가서 스스로를 내려다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p347).” 도시민들이 농민들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들의 자리를 결정하고, 존재의 우위를 명확히 하는 것처럼 도시가 가진 권력은 선택의 주체라는 것에 있다.      


절대공간은 상징을 간직한 공간이다. “사원, 궁궐, 추모 또는 장례 기념물 등의 특권적이며 특별한 표시를 간직한 장소들로 이루어진다(355).” 사회나 문화에 따라 공간의 층위를 해석하는 바가 다양하겠지만, “의미를 약간 완화시킨다고 해도 절대 공간은 본질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p349).”하며, 이는 공간이 지니는 ‘상징성’으로 드러난다. 절대공간은 상징성을 바탕으로 언어라는 정신적 공간에 접근하여, 그 내부에서 자의식을 형성하고 구체화된다. 지각과 인지라는 행위를 통해서 점유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절대공간을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정신적, 사회적 공간이며, 관찰 대상이 되는 집단의 모든 존재를 포함한 공간(355).”이라고 정의한다. 도시혁명의 과정 속에서 내적 특성과 상징적 가치를 지니는 절대공간은 추상공간으로 변한다. 종교적이고 정치적 의미를 내포한, 상징성으로 존재하는 절대공간과는 달리 추상공간을 생산하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아래 생성된 ‘공간의 재현’들 속에서 새로운 ‘공간적 실천’을 기반한 새로운 ‘재현의 공간’들이 끊임없이 생성된다.      


르페브르는 ‘공간적 실천‘, ‘공간의 재현’, ‘재현의 공간’의 삼각체제가 사회의 공간의 틀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공간의 재현’과 ‘재현의 공간’은 사회공간으로써 존재하며, ‘공간의 실천’에 의해 공간이 가진 역사를 바라본다. 르페브르에 의하면 공간적 실천, 공간 재현, 재현 공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간의 생산에 개입하며, 지각된 것, 인지된 것과 체험된 것 등의 결합관계는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다.     


‘공간의 실천’이란 인간의 활동을 통해 지각되는 공간을 의미한다. “공간적 실천은 장소, 지역적인 것과 총체적인 것의 관계, 이러한 관계의 재현, 행위와 기호, 보편화된 일상적 공간, 상징들로 이루어진 특권적인 공간을 동시에 규정한다(p420).” 인간은 일상의 여러 활동을 통해 공간을 물리적으로 생산하고 지배하며, 전유한다. 일상의 모든 활동들은 이동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일을 하러, 학업을 하러 혹은 산책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며, 이러한 행위를 통해 공간을 반복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개인의 일상적인 활동, 그 속의 사회적 관계망, 이를 구성하는 공간의 활용을 통해 사회적인 삶이 구조화된다.      


‘공간 재현’이란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상징들과 이미지들의 결합, 즉, 인지된 공간을 의미한다. 공간의 재현은 특정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담기도 한다. 권력자들의 필요에 따라 공간이 재단되고, 도시계획자들의 설계에 의해 실제 공간이 구획되고, 배열되는 기술관료들의 공간인 것이다. 위치 매김 된 권력의 행동인 조작적인 과정들로부터 겉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공간의 논리가 도출된다. 공간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으며, 공간으로부터 배제된, 즉 ‘공간을 갖지 못한’ 자들이 생겨난다. 이런 공간은 역설적으로 공급자와 소비자의 유동성과 역동성에 의해 새로운 자발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재현 공간’이란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체험된 공간을 의미한다. 재현 공간은 공간에 대한 모든 담론을 담고 있으며 인지공간을 구성한다. 공간이나 장소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물에서는 마치 회화작품을 보는듯한 오묘한 판타지를 느낄 수 있다. 가우디는 건축물의 ~~를 통해 ~~~하는 공간 재현을 ~~~하는 재현 공간으로 보낸다. 공간 재현에서 재현 공간으로의 이동은 이데올로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특히 정치와 권력은 추상화를 통해 현실을 은닉한다. “추상화와 그것의 실천적 사용에는 폭력이 내제되어 있다(p420).” 추상화의 근간이 되는 기호는 사실 잠재성이나 무의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추상을 통한 강제적인 의미의 함입, “자연 속에 강제적으로 추상을 도입함으로써 치명적인 무엇인가를 지니게(p421)”되는 것이다.      

도시는 이제 글로 써지며, 그림으로 기록된다. 설계도와 조감도가 무수히 만들어진다. 지도들은 회화로 존재하며, 이에는 신적인 차원의 의미가 아직 내포되어 있다. 이렇듯 도시의 이미지는 필요에 의해 조작된 언어이다. 대형 건물과 그 부속건물 하나하나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 혁신에 의해 변화하며, 전체로써 세부사항들이 종속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 공간과 같이 정치권력의 개입은 공간의 모든 것을 제어했다. 도시는 더 이상 연속의 내레이션이 아니다. 힘과 정치, 권력에 의해 공간의 코드가 형성되는 것이다. 파사드와 원근법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아주 잘 보여준다. 권력과 위엄을 세우기 위해 공간의 수직성을 강조하는 것, 첨탑의 높이로 정치적인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파사드’를 부각시키는 행위와 세부가 아닌 전체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공간이 담고 있는 것, 그 내부의 배치를 감추는 원근법은 공간의 생산이 시각적인 것을 향해 진행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의’ 공간은 이렇듯 역사의 후기 침전물, 축적, 수량화의 기저에서 규정된다. 이것은 공간 안에 깃들어 있는 특성이 아니라, 공간의 속성(p342)”인 것이다.      


“현재의 형태를 ‘역사적인’ 매개를 통해 즉각성과 결부시키는 것은 역순으로 이를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현 공간과 그것이 내포하는 상징주의 사이에는 갈등이 드물지 않다(p342).” 역사의 서술과 이미지는 다르게 쓰이고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까지도 도시공간은 기념물적인 양상을 띄는 장소로 존재한다. 정치와 권력의 힘에 의해 계획된 도시 공간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자본주의에 의해 계획되고, 권위 있는 설계자들이 획을 그은 계획공간들은 시민의 자유와 참여를 선망하는 사회 공간적 실천을 나타내고 있는가? 우리의 도시 공간은 자유와 평등을 그리며, 민주적 참여를 자아내는 도시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본에 의한 사회적인 불평등과, 보이지 않는 계급을 은연중에 느낄 수밖에 없게 하는, 나의 하위계급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목소리를 내거나 민주적인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도시공간이라는 가두리 속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실재 속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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