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은 변혁의 시대 속에서 도시가 변화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관찰했다. 그 당시에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과 주류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멸시받으면서도 변혁기 당대를 살던 학자로서, 변화하는 도시를 주목하고 그 현상들을 분석하고 예측한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이 책을 읽으며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뛰어난 통찰력 덕분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의 통찰에 대해 공감을 느끼면서 때로는 위로받는 듯 한 느낌까지 든다. 주류 학계는 그를 ‘배부른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쓸모없는 지적 유희’라고 비판하지만, n포 시대를 직접 살아왔던 청년세대의 입장에서 그의 이야기는 한 세기가 훌쩍 난 지금에도 공감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꽤나 통찰력 있다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중세에는 인간이 토지나 봉건적 연합체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존재하였다. 그들의 인격은 사회적 이해집단에 용해되었고, 이는 집단의 참여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원시시대 토지 소유가 개인의 인격 그 자체에 귀속되던 것에 반해, 중세에서는 인격적 권리가 토지 소유에 의존하는 형상을 유지했다. “경작지의 완전한 소유는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권한을 의미(p12)”했고, 경작지의 소유자가 연합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경우 그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요소와 지역적 요소 사이의 상호 의존성은 근대 화폐경제에 의해 해체된다. 근대의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로 변화했다.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적인 인격체를 분리하고도 단순한 경제적 기여나 이해관계를 충족한다면 얼마든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결사체가 추구하는 목적들이 순수한 객관성과 순수한 기술적 특성을 띄게 되고, 개인적인 채색으로부터 해방되었다(p13).” 하지만, 기술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보급은 그들의 삶에 객관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개인을 사물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지배받게 만들었다. 그들은 더 이상 개인의 인격체로 존재하지 않고, 사회가 원하는 구성 집단의 일부로 존재하게 되었다.
“돈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모든 인격적인 겻과 특수한 것을 절대적으로 유보한 채 개인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르쳐주었다(p15).” 돈은 수만 가지의 결합관계들을 유지시키는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수단이다. 많은 인간들 사이의 연결 관계를 창출한 것은 궁극적으로 돈이다. 돈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직접적인 상호이해의 토대를 형성하고, 평등한 행위규정을 제정하였으며, 이는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에 대한 표상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에 틀림없다(p17).” 현대의 삶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급자와 공급원이 서로 의존한다. 많은 이해관계가 순환될 수 있었던 것은 화폐경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노동에 대한 분업으로, 나아가서는 분업에 대한 전문화로 이어지게 된다. 돈은 인간의 고유한 자아를 경제행위와 명확하게 분리시키고, 개인의 인격체에게 자유를 주었다. 13세기 귀족들이 군인과 노역의 의무를 돈과 교환한 것과 같이 “이는 자유를 향한 커다란 진보가 되었다(p19).”
돈은 도시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아주 직관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싶은, 열망하는 모든 것과 치환되는 것처럼 보이는 돈은 되려, 그 모든 것에 대한 등가물이기 때문에 가장 비천하다고 볼 수 있다. 돈은 재산 가치로 치환될 수 없는 행위, 가치, 삶의 내용, 인격체 등에 숫자를 매긴다. “사람들은 경제적 교환의 객체가 돈으로 표현할 수 없는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주 간과한다(p21).” 도시는 교환의 장소이다. 하지만 화폐뿐만 아니라, 경험, 역사, 삶의 이야기 등도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내가 욕망하는 무언가와 같이 숫자로 가격 매겨지지 않기 때문에 쉬이 그 가치가 비천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개별적인 것만이 고귀한 것이라는 짐멜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돈은 단지 최종적인 가치들로 가는 다리에 불과하며, 사람이 다리 위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p24).”
돈이 개인의 인격체와 경제활동을 분리시키면서, 우리는 모든 특정인으로부터 훨씬 더 독립적이게 된다. 돈에 의해 쉴 새 없이 굴러가고 있는 도시의 모든 활동에서 부품은 쉽게 갈아치워지며, 어느 누구도 그 부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 부품은 단지 그의 일을 수행해야하는 자리로써 존재한다. 현대문화의 흐름인 수평화, 평등화와 함께 도시 속 공급자와 공급원의 상호작용의 무대는 더욱더 넓어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돈은 인간에게 자유를 지불하였다. 동시에 “돈에 의해서 야기된 매우 밀접하고 불가피한 결합 관계는 다른 한편 개체성과 내적 독립성의 폭을 매우 크게 넓히는 독특한 결과를 가져온다(p17).”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격체들을 사회의 일부를 수행하는 부품으로 치환시키는 것, 그것이 현대 도시의 개인주의를 창출하였다.
“화폐 경제와 이성의 지배는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p37).”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늘 신경과민에 시달린다. 매일 새로 보는 얼굴들,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환경, 아침엔 서울의 외곽에, 점심엔 서울의 중심에, 저녁엔 서울의 번화가에서 시간을 보낸다. 복잡한 외부 환경의 변화 속에서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사회의 일부를 담당하는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그들은 대도시의 억압적인 힘으로부터 개인의 주체적 삶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둔감해지는 것을 택한다. 모든 사물의 다양성이 균등한 척도로 측정되는 화폐경제 사회에서, 돈은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p42).” 숫자로 평가되는 업적만이 업적으로 인정받고, 개인들의 고도한 신경전 속에서 “곧 개인은 사물들과 세력들의 거대한 조직에 비해서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로 격하된다(p51).” 도시인들의 삶은 개인적 색채를 몰아내는 비인격적인 내용물들로 채워져 있다. 매 순간 평가의 무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시인들은 늘 자신이 좋은 평가를 받길 원하며, 개인적 색채를 뽐내고 싶은 욕망을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집단에서의 개인적인 열외를 원하지는 않는다. 색채를 드러내고 이를 인정받으면서 남들보다는 우위에 서있고 싶은 욕망, 그리고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은 우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속에 섞여 안도감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공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유행’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의 결합에서 오는 의존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집단성 폐쇄성을 보여준다.
도시를 사는 사람들은 외롭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며 집단으로 퉁 쳐지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집단에 속해있지 않으면 또 불안함을 느낀다. 집단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위안을 받으면서도, 그 속에서 튀고 우쭐대고 싶어 한다. 어쩌면 도시인들에게 집단은 본인이 우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비교대상들의 집합체이자, 나는 소수가 아님을, 다시 말해 내게도 힘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방어막일지도 모른다. 개인은 언제나 사회에 비해 매우 작은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쉬이 이용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도 집단을 때에 따라 필요에 맞게 이용하고 있다. 그것이 본인의 존재의 가치와 당위성을 증명하는 것이든, 본인의 뛰어남을 자랑하려는 것이든 말이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쓰면서 쉴 새 없이 sns를 들락날락한다. sns속에는 실시간으로 본인이 무얼 하는지, 무얼 먹는지, 어떤 곳에 갔으며, 어떤 옷을 샀는지, 각자의 개인적인 색채를 뽐내는 무대들이 펼쳐져 있다. 나는 오늘, 나의 바쁨을 뽐내었다. 내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처럼 나 또한 바쁨을 강조하면서 사회적인 흐름에 위배되지 않고 있다는 안도감을 얻었고, 바쁜 와중에도 밥을 잘 차려먹고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여유가 있는 나’를 뽐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