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목적지 대신 핸들을 잡는 마음
특별한 이유도, 거창한 목적지도 없다. 이제는 ‘왜 떠나느냐’보다 ‘언제 떠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일과를 마치고 차에 오르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순간이다. 사람들과 나누었던 말들, 처리해야 했던 일들, 괜히 신경 쓰였던 타인의 표정들이 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하나씩 멀어진다. 업무 전화는 가방에 대충 밀어 넣고, 시동을 건다. 엔진 소리와 함께 오늘이라는 하루가 저만치 뒤로 물러난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보고는, 딱히 정해 놓은 곳도 없이 일단 차를 몰기 시작하는 것이다.
차박을 막 시작하던 무렵에는 떠나기 전 준비 자체가 일이었다. 무엇을 챙길지, 어디로 갈지, 그곳에 하룻밤 차를 세울 수 있는지, 화장실은 있는지 혹은 깨끗한지, 겨울이면 그 화장실에 온수가 나오는지 아닌지까지 하나하나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빠진 것이 없는지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혹시라도 준비가 덜 된 건 아닐까 괜스레 불안했다. 무언가 하나라도 빠지면 여행 전체를 망칠 것만 같았다.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준비하지 않기 위해’ 차박을 떠난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차 안이 차박 짐으로 꽉 차서 기어이 지붕에 루프박스까지 이고 지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그저 최소한의 것만 차에 남겨두고, 굳이 더 챙기지 않는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하루를 보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몇 개월씩 장기 여행을 떠나면서도 기내용 트렁크 하나면 언제든 괜찮았던 것처럼.
미키는 내가 가방을 들 때보다 차 키를 집어 들 때 먼저 알아챈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현관문에 와 앉아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웃음이 난다. 그 모습이 마치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는 멀리 가지 않는다. 집에서 한두 시간 남짓,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걷기 좋은 길이 있는 곳이면 충분하다. 유명한 곳일 필요도 없고, 이미 여러 번 다녀온 길이어도 상관없다. 도착하면 먼저 걷고,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한다. 걷는 동안에는 굳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키는 냄새를 맡고, 나는 주변을 본다. 미키가 멈추면 나도 멈추고, 다시 움직이면 그 뒤를 따라간다.
걷다가 잠시 서서 바람을 느끼고, 다시 몇 걸음 옮기다 또 멈춘다. 예전 같으면 ‘이러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가 다 져버릴 거야’하며 조바심을 냈겠지만, 이제는 이 속도가 좋다. 서두르지 않아도 하루는 제 몫을 다 채운다는 걸 알게 된 까닭이다. 하루에 고작 3킬로미터를 걸었을 뿐이라도 괜찮다. 어딘가를 꼭 다녀왔다는 막연한 성취감 보다, 오늘 또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감각이 나를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많이 걷지 않았어도 몸에는 기분 좋은 피로감이 느껴진다. 노곤해진 마음이 속 시끄럽던 도심 속으로부터 나를 놓여나게 한다.
해가 기울 무렵 차로 돌아온다. 문을 닫고, 불을 켠 뒤 우리는 잠자리를 만든다. 창문에 암막커튼도 꼼꼼히 붙여야 한다.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불빛이 조금이라도 바깥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복잡할 것 같던 차 안의 밤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여느 캠퍼처럼 화려하고 요란한 캠핑 요리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 이제 와 하는 얘기지만, <오늘부터 차박캠핑>을 집필할 때는 편집자가 그런 유의 차박 요리 사진을 꼭 넣고 싶다 하여 몇 번 만드는 시늉만 했던 것이다. 집에서도 음식 한 번 하지 않는 내가 책에 나온 캠핑 음식을 직접 만들었다니, 나를 잘 아는 이들은 그저 웃음만 보였을 뿐이다. –
내게 있어 현실 차박이란 그저 현지에서 제법 알려진 식당을 찾아 이른 저녁을 먹고 돌아와, 지친 몸을 뉘이는 일. 그게 전부다. 자리를 펴고 물 한 모금 마신 뒤, 미키가 먼저 자리를 잡으면 그 옆에 앉아 하루를 정리한다. 낮에 걸었던 길을 떠올리며 핸드폰에 담아 둔 사진을 뒤적이거나, 카페에 들러 사 온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여름이면 선루프를 열어 밤하늘의 별을 본다. 운이 좋은 날엔 은하수를 보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이 유리창에 맺혀 떨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낸다. 가로등 불빛을 한껏 머금고 반짝이는 물방울은 마치 살아 숨 쉬듯 역동적이다. 어느새 내 팔을 베고 쌔근쌔근 잠들어가는 미키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더없이 사랑스럽다. 그렇게 누워서 뒹굴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하등 쓸모없어 보이지만 무용한 그런 순간들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제는 안다. 하루가 완벽하지 않아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는 것을. 내게 차박은 화려한 여행이 아니라 하루를 건너가는 안온한 일상의 의식이 되었다. 버거웠던 오늘과 막연한 내일 사이를 잇는 평온한 통로. 나는 오늘 그 통로를 지나며 이럭저럭 하루를 갈무리한다. 그걸로 충분한 밤이다.
[미키의 킁킁 차박]
*날씨: 꼬리가 붕붕 돌아가는 맑음
엄마 주머니에서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내 귀는 이미 쫑긋!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같이 가자’는 마법 주문이다. “우리 같이 갈까?”라는 기분 좋은 신호다.
엄마가 자동차 키를 집어 들기도 전에 벌써 나는 안방 침대에서 뛰어내려 복도를 냅다 가로질렀다. 현관문 앞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엄마를 올려다보면 엄마는 꼭 웃음을 터트린다.
“미키, 벌써 준비 다 했어?”라고 웃으면, 웅! 엄마, 나는 발바닥 패드까지 벌써 준비 완료라고! 내 꼬리는 헬리콥터처럼 돌아간다.
차 문이 텅! 하고 닫히면, 우린 이제 우리만의 세상으로 출발이다.
[차박 팁] 가볍게 떠나는 법
차박을 처음 시작할 때는 완벽한 체크리스트가 안전벨트 같았다. 화장실 유무와 온수 상태를 확인하느라 출발 전부터 이미 지쳐버리곤 했다. 하지만 진정한 차박은 무언가를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지금은 알게 되었다.
짐의 무게 줄이기: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하루를 보내보자. 숙면을 도와줄 매트와 침낭 등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었을 때 비로소 차 안의 공간이 넓어진다. 차박의 본질에 충실한 짐만 가져가기.
음식에 힘 빼기: 화려한 캠핑 요리 대신 현지의 소박한 식당을 이용해 보자. 요리에 쏟을 에너지를 아껴 미키와 한 걸음 더 걷고, 창밖의 별을 보는 데 사용하는 것이 '현실 차박'의 묘미다.
비밀스러운 빛 단속: 밤이 깊어지면 창문에 암막 커튼을 꼼꼼히 붙인다. 우리만의 불빛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단단히 여미는 순간, 차 안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비밀 기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