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는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애와 예술 두 가지뿐이었다. -1890년 8월 의사 가셰-
불멸의 화가란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빈센트 반 고흐.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오늘도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긴 줄이 이어지고 있다.
15년 전쯤 광화문에 있는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고흐를 사랑하는 팬으로 그의 그림 전시회를 간 적이 있었다. 30대 초반에 꿈을 좇던 시기, 그의 전시회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았던 건 색이었다. 화려한 색과 강렬한 붓 터치. 15년이 훨씬 지난 오늘 다시 고흐의 전시회를 찾았다.
이번 전시회에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색이 아닌 인간이다. 삶의 좌절과 아픔, 고뇌와 고통을 온전히 품고 견디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건 바로 고흐 자신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라낼 정도로 견딜 수 없었던 삶의 고통.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고민한다. 나도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삶의 고통과 아픔을 견디며 수없이 덧칠했을 그의 작품들. 그의 작품 속에는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자 겪었을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과거에는 지나쳤을 작품 <슬픔에 빠진 노인(영원의 문에서)>(1890년 5월). <영원의 문에서>라는 네덜란드 시기에 그린 옛 작품이 밑바탕이 된 그림으로, <영원의 문에서>는 1882년 헤이그에서 반 고흐가 1년 전 그린 <피로에 지쳐>라는 제목의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당시 고흐는 데생 화가로 일하고자 했으며, 이 석판화는 사람들에게 값싼 판화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녹록하지 않은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반 고흐 전시회에 입장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전시회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두건을 쓴 다양한 여인의 두상 작품이다. 고흐의 초기 작품에 볼 수 있는 인물화이다. 대부분 어둡고 거친 얼굴에 고된 농부의 삶이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 가꾸지 않은 진솔한 인간의 모습 고흐가 가지고 있는 미술관이다. 그의 삶도 거친 농부의 삶처럼 처절한 삶을 살았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그림만이 그의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슬픔에 빠진 노인(영원의 문에서)>에 이어 <기도하는 두 여인>(1882년 10월) <책을 읽은 노인>(1882년 11월) <바구니에 앉아 애도하는 여인>(1883년 2월) 이번 전시회에서 나의 눈길을 끈 인물화들이다. 15년 전 본 고흐 미술전에서 보였던 화려한 색이 아닌 사람이 보인 이번 전시회는 아마 현재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탐구, 먼저 나의 깊은 내면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삶을 이끄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 말이다.
반 고흐의 그림에는 유령도 없고 환영도 없고 환각도 없다. 그것은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이 작열하는 진실이다. -앙토냉 아르토-
아를 시기의 주된 작품은 인물 내면에 치중하던 표현 방법과는 달리 색채를 통한 인물화의 완성에 초점을 두면서 다양한 배색 실험을 했다.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 대형 포스터/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대형 포스터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식대로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나는 색채에 심취하였다.” -빈센트 반 고흐-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씨 뿌리는 사람>, <생트 마리 드라 메르의 전경>(1888년 6월) 등의 작품이 있다. 특히 나의 눈길을 끈 <담쟁이넝쿨이 있는 나무>(1888년 7월)은 덧바른 붓 터치가 역동하는 강물처럼 강렬하고 살아있는 듯해 우리가 아는 고흐만의 색채와 그림 기법이 두드러져 보였다. 이 작품은 15년 전 찾았던 전시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품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생레미 시기는 위대한 자연의 발견과 거칠고 강렬한 붓 터치를 통해 응어리진 현실의 고통을 더 깊고 화려하게 표현했다. <해 질 무렵의 소나무>(1889년 12월) 이 작품도 이번 전시회에서 새롭게 선보인 작품이다. 달이 등장한다. 소나무에 걸쳐있는 붉은 달. 해 질 녘 노을 진 붉디붉은 달 아래로 밀을 이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찬란했던 청춘을 지나 인생의 반을 지나는 지금의 나, 밀을 이고 가는 여인처럼, 아직도 삶의 무게가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 고되기만 하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에 걸쳐있는 강렬한 붉은 달은, 뜨겁고 강렬한 여름을 견뎌냈기에 천상의 붉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아닐까.
노을 진 하늘이 더 빛나 보이는 지금, 바쁘고 퍽퍽한 삶에 자책과 방황에 게으름을 피웠다. 화가로 산 10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고흐가 그린 작품 수는 습작을 포함해 2500여 점에 달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정신 발작으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는 매일 한 점씩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고흐 살아생전 팔린 그림은 <붉은 포도밭>이라는 단 한 점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림을 그렸다는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존경과 경애를 표한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예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허무하지도 생각에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서사가 예술이며 예술가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빈센트 반 고흐. 그의 그림을 보면 그의 서사가 그려진다. 인간애와 삶의 고뇌를 그림으로 승화시킨 고흐는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화가다. 문명화된 지금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고흐의 예술관 인간애와 진솔함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앞으로도 추구해야 할 삶의 지표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