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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쑥 Jun 08. 2016

8월의 당신께,

~ 2002 과거의 영화를 만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재미있다 좋다 최고의 멜로 영화다 등등 이야기는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끌리지 않았달까? 나에게 한석규는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대왕님이시고, 심은하는 인기 많았다던 옛날 배우다. 그래서 이 두 배우의 멜로 영화라고 하니 뭔가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 들었다. TV의 영화 채널에서 방영을 해줘도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이번에 얼마나 좋은지 한 번 보자-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찾아서 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감독 허진호


  왜 이제서야 봤을까, 하고.

  보는 내내 참 따뜻했다. 문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아침 체조 소리와 따스하게 흩어지는 햇살, 머리맡에 놓여 있는 반짝이는 갈색 테의 안경, 이불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남자 정원. 따뜻함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있었다. 단지 '사랑' 영화라서 그런 걸까?

  이 영화는 정원과 다림의 사랑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놓여 있는 '죽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곧 있으면 죽을병에 걸린 정원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다. 정원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외면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생선회가 자주 등장한다. 횟감과 매운탕거리를 사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간 수산 시장에서, 정원은 수족관에서 헤엄치고 있는 살아있는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버지는 회 뜨는 것을 보다 고개를 돌려 그런 정원을 바라본다. 회는 죽은 것일까, 산 것일까? 펄떡펄떡 거리지만 이미 생선은 서걱서걱 잘린 채다. 정원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곧 생생한 물고기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내 앞에 놓인 죽음에 대해 아무리 덤덤해지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테다.


  이런 정원에게 이름도 귀여운 여자, 다림이 나타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요즘 말로 치면 밀당을 하는 새침하고 어린 아가씨. 다림이 정원에게 호감을 표현하며 흥흥거리지만 정원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동생 같아 보일 뿐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주 오래된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있다. 초원 사진관 앞에는 머리를 양갈래로 딴 두 여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한 명은 정원의 동생, 다른 한 명은 동생의 친구이자 정원의 짝사랑 상대인 지원이다. 정원은 지원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한 모양이다.



  하지만 옛사랑은 이미 추억 속에서 어룽어룽하다. 물이 흘러내리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원의 모습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정원의 내레이션처럼, 이제는 첫사랑 지원을 저 너머의 추억 속으로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참 얄궂게도 지원의 빈자리에 새로운 사랑이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와버린다. 그녀, 다림이다.

  햄버거를 냠냠 먹다가 정원과 마주치자 얼른 감추고 "잠깐 쉬고 있었어요"라며 내숭을 떨고, 차에서 잠든 척하다 차가 출발하자 창문 밖으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주고, "아, 내가 말 안 했나? 내 친구 서울랜드에서 일해요. 언제든지 오면 공짜 표 준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라며 앙큼하게 말을 하는 그녀, 다림. 다림의 귀여운 여우 같은 행동이 뻔히 보여서 참 웃기고 사랑스러웠다. 정원도 다림을 동생 같은 아가씨가 아닌, 한 여자로서 점점 사랑을 하게 된다.



  서먹서먹하게 우산을 쓰고 가던 정원과 다림. 다림이 많이 젖은 걸 안 정원은 손수건을 건네주고 그녀가 자신에게 우산을 기울여 씌어주는 걸 보고 그녀를 바짝 끌어당겨 함께 빗길을 걷는다. 정원과 다림은 이렇게 가까워져 갔다.


  하지만 정원은 죽음을 앞둔 환자다. 영화에서는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아픈지는 나오지 않는다. 정원은 그저 아버지를 위해 테이프 재생 방법과 현상기 켜는 방법을 종이에 꼼꼼히 적으며 자신의 주변을 정리해 나간다. 하지만 마냥 담담할 수만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죽을 수밖에 없나, 살고 싶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기도 하고, 입원한 병실에서 동생이 다 먹은 밥을 치우려 하자 빼앗아 꾸역꾸역 입에 넣기도 한다. 그도 간절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울고 불고 죽기 싫다고 난리 쳐야만 감정이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자연스럽고 묵묵하게 정원의 심정을 담아낸다.


  사진사가 직업인 정원은 다양한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다. 큰 머리를 헤어스타일로 감추려고 하는 여자의 증명사진, 권투선수의 카리스마 있는 시합 사진, 할머니의 영정 사진. 여기서 씁쓸했던 것은 어머니는 영정사진을 찍는데 자식들은 아파트 시세가 비싸네 어쩌네 이야기를 하고 있던 장면이다. 그들이 매정한 것일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순리일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심정이란, 사실 난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장례식장에 놓일 사진을 찍는 순간에 나도 정원처럼 웃을 수 있을까?


  이렇게 정원은 떠나고 다림은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편지를 남겨보기도 하고 계속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자 초원 사진관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깨뜨리고 만다. 아무런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정원을 원망하면서 다림은 그렇게 떠난다.


  사실 정원도 다림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써서 다림에게 전해주려 하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다림의 모습만 손으로 덧그리다 다림을 잡지 못하고 보내주고 만다. 잉크를 다 빼버린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조차 전해주지 못할 만큼 떠나가는 사람의 마음은 조심스럽고 애달팠다. 


  시간이 흘러 새침한 아가씨에서 성숙한 여인이 된 다림은 초원사진관에 찾아오고, 언젠가 정원이 찍어 주었던 자신의 사진이 그 앞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활짝 웃은 뒤 다시 발길을 돌려 떠나간다.



  정원의 상자 속으로 들어갔던 편지가 과연 다림에게 전해졌는지, 못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정원이 다림을 찍어준 저 사진 속에, 이미 그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을까?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옛날 배우, 옛날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18년이 흐른 지금, 나에게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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