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나에게 말 거는 모든 사람이 싫고, 출근해야 되는 사실도 싫다.
꼭 이런 날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듣는다. 정말 좋지 않은 소리인지 알 수 없다.
그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게 싫다.
왜 그렇게 싫은지 몰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특별한 이유도 없다.
그런 날이 자주 반복되었고, 예민함은 쌓여갔다.
날마다 힘든 나에게 술은 나를 잊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러다 언젠가 술이 너무 취해 처음으로 기억나지 않는 날이 있었다.
다음날 몸도 너무 아프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내가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마신 내가 원망스러워 다신 그렇게 마시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술을 마시면 잊혔다.
나는 자제를 잘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제어가 안 되는 날이 많아졌고, 기억이 나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이게 아닌 걸 알지만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 겁이 나서 외면했다.
늘 화가 나있고 모든 게 불만인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 차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몸에 안 좋은 건 거의 다했다. 그럴수록 더욱 예민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하고 슬펐다.
누가 인사만 건네도 눈물이 차올랐다. 참는 건 잘하니 울진 않았지만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감정기복이 심해지는데 웃는 일은 없었다.
늘 신세한탄만 하며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늘 욕을 입에 달고 살고, 부정적인 말만 골라서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좋은 일은 나에게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 있었어도 나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지은 내 기준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을 테니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항상 모든 걸 책임지려고 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모든 부분을 떠안았다.
내가 해야 되는 줄 알았다.
안 해도 된다고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다. 알려줬어도 못 알아 들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듣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몰랐다.
힘든 게 당연한데 나만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무작정 버텼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버텼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무언가 바라고 버텼던 것 같은데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항상 나는 무언가 주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그런 성향을 예상해 보면 나의 만족감을 위해서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나눠주는 것들이 당연해지고, 더 많은 걸 달라고 요구하면 다 줬다.
점점 이게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다 주었다. 잘못된 행복감이었다.
그건 내 인생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내 시간이었다.
책임감이 버거울 때면 다 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나를 붙잡아 늪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다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있었을까?
많은 걸 내어주고 알았다. 나 자신부터 챙겨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의 감정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남편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를 만나면서 나의 모든 게 변했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나는 행운을 만나서 회복되고 있었고, 이런 좋은 일이 전에도 있었을 거라 믿는다.
다만 지금의 행운은 여유가 생기며 알게 된 것이니 나 자신이 움직여야 변한다.
나를 그대로 바라보고 감정이 회복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술은 모든 걸 잊게 해 주지만 그만큼 후유증이 남는다. 그래서 되도록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모든 걸 떠안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굉장히 허망했다.
발버둥 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서서히 놓았다. 모든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는 준비를 했고,
나는 조금씩 나아졌다.
아직도 힘든 날이 있지만 전처럼 버겁지 않다.
남편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노력한 부분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자신의 의지가 개입하지 않으면 나아질 수 없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손등에 피부병이 심했었다. 뭘 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병원에서도 단순히 연고만 처방해 줄 뿐 그 연고를 발라도 나아지지 않았다.
몇 년을 손등의 피부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연고, 보습제, 소독약 등 사용해도 그때뿐 다시 악화되는 게 반복되었다.
자면서 긁다가 피도 나고, 무의식 중에 계속 긁고 있으면 시원하면서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런 통증이 지속되니 이건 고치기 힘들겠구나 단념했는데, 어느 순간 좋아졌다.
언제 나았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이다.
아직도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내 스트레스가 완화되면서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감정도 똑같이 약을 먹거나 위로받으면 그때뿐이지,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병도 어느 순간 좋아지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