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갑자기 와인 수입사 직원이 되었는가
프리랜서가 된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다행히 아직 굶어 죽지 않았고, 앞으로 내 인생에 다시 '직장'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굶어 죽어도 프리랜서!'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작년 9월, 동네의 한 술집에서였다.
몇 개의 우연이 겹쳐, 처음 만난 사람과 합석해서 저녁 내내 일 얘기를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프리랜서 에디터로 자기 계발 콘텐츠를 포털 메인에 노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새로 사귄 친구는 애널리스트였는데, 콘텐츠 담당자와 협업하면서 증권 콘텐츠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랑받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의 일을 이해할 수 있었고, 대화가 무척 잘 통했다.
자리가 끝날 무렵, 그녀는 마침 팀에서 콘텐츠 매니저를 충원 중이니 지원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그녀의 초대로 말로만 듣던 화제의 스타트업, 토스에 놀러 갔다. 로비 카페에서 오늘의 드립 커피를 아이스를 주문했는데, 입안 가득 퍼지는 달큰한 산미에 '여기라면 직장인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직장인 시절, 화창한 날마다 창밖을 보면서 '나가고 싶다...' 하던 과거는 어느덧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고, 직장인이 누릴 수 있는 다양한 복지와 혜택이 점점 크게 보였다. 당장 직장인이 된다면 다시 저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거 같고, 일에 치여 힘든 날에도 말할 사람이 없어 메모장에 글만 끄적일 수 있는 외로움도 청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몰라 주는 게 두려워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끊임없이 올리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의 정의를 자꾸만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것도 그만하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이 모든 단점을 보상할 수 있는 해외여행도 못 가는 코로나 시국에서 프리랜서라니 너무 억울했다.
친구가 정성스럽게 써준 추천서 덕분인지, 서류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바로 그다음 과정인 과제 단계에서 탈락했다. 곧바로 당근마켓의 콘텐츠 매니저 포지션에 지원했는데, 이번에는 서류-과제에 이어 면접도 봤지만 결과는 역시 탈락.
그러고 1월, 친구가 콘텐츠 플랫폼인 롱블랙의 채용 공고를 보내줘서 3번째 입사 지원을 했다. 토스와 당근마켓은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었던 반면, 롱블랙 에디터는 '내가 100%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1. (인생은 정말 모르는 것...)
이쯤 되니 연말이라 갑자기 외로워져서 1주일에 소개팅 하나씩 했는데, 애프터에서 연락 끊기고, 삼프터에서 끝나고, 될 듯 말 듯 다 실패해서 결국 혼자 쓸쓸하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사람의 심정이 되었다. 직장도 연애와 마찬가지로, 많이도 필요 없고 나에게 맞는 'the one'을 찾으면 되는데, 그 과정이 '스펙'이나 노력과 꼭 비례하지 않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3 연속 실패에 우선 작업실 계약 날짜인 7월까지 프리랜서로 계속 살면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다시 잘 생각해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게 맨날 바뀌는 ENFP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좋아해 왔던 게 없지만은 않았다. 책이 1등이고 (since 초등학생), 술이 2등이다 (since 대학생). 첫 직장에서 난 반드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란 걸 깨닫고, 좋아하는 책을 쫓아 출판사로 이직했다. 2년 8개월 만에 여러 가지 상황으로 결국 퇴사하긴 했지만,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은 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2번째, 술 관련해서 소비자 말고 생산자가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우선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를 꼬셔서, 2022년에는 같이 와인 콘텐츠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핀터레스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유럽, 와인 무드보드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친구와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본격적으로 와인을 마시면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다 와인을 마시고 집에 온 어느 날, 문득 '와인 회사에 취업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서는 업데이트해둔 게 있으니, 술, 와인에 대한 애정을 경력과 엮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했고, 검색된 관련 공고 3개 중 리뷰가 너무 안 좋은 한 곳을 제외한 두 곳에 지원서를 냈다. 한 곳은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고 (ㅎㅎ), 나머지 한 곳에서는 지원 다음날 연락이 왔고, 그다음 날 실무, 임원 면접을 보고, 다다음날 대표님 면접까지 보고 바로 다음 주부터 출근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출근 6일째. 지금 내 자리에 내 눈앞에 와인이 6병이 있고, 파티션 오른쪽에는 와이너리에서 보내온 와인 선물이 쌓여있고, 바로 뒤에는 전임자가 남기고 간 샘플 와인이 잔뜩 있다. 돌아다녀보면 모두들의 자리에는 와인이 몇 병씩 있고, 벌써 3번이나 다녀온 지하 창고에는 또 와인이 한가득. 아! 회사 들어오면 1층 로비에는 양주가 가득한 바도 있다. ㅎㅎ
에디터의 일은 그 자체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자, 성장하는 기쁨이 촘촘히 있어서 즐거운 일이었다. 반면 이번에 새로 하게 된 와인 수입사의 '브랜드 매니저'라는 일은 잘할 자신은 충만한데 (난 뭐든지 잘하니깐 ^_^), 구체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와인 밀도'가 높은 곳에서, 좋아하는 와인에 둘러싸여 있는 것 자체도 나에게 큰 행복감을 준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래서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어제, 친구가 출근 짤을 보내왔는데, 아래와 같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대로 'happily ever after'였으면 좋겠지만, 언제까지나 또 하나의 시작이자 과정인 걸 알기에, 오늘도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나를 향한 여정'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 본다. 앞으로 프리랜서는 아니지만, 행복한 직장인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