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N잡에 대해
나이와 MBTI가 자랑도 아니고, 굳이 밝히고 싶지 않지만, '직장인 vs 프리랜서'의 고민에서 이 2가지 요소 모두 꽤 중요한 거 같아서 타이틀에 써보았다 :)
일단 '서른'은 관점에 따라서 어린 나이일 수도, 또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일 수도 있는 애매한 나이다. 20대처럼 돈은 무시하고 마냥 하고 싶은 것만 쫒아서 살기에는 어른의 무게가 있고, 또 진짜 '어른'들이 보기엔 아직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일테니 말이다.
MBTI의 경우 나는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E, 과거의 경험보다는 영감과 가능성에 더 끌리는 N, 이성보다 무조건 감성 F, 그리고 계획이란 전혀 없는 P로 설명할 수 있다. 설명만 봐도 벌써 보수적인 직장은 못 다닐 거 같다. ㅋㅋ
그리하여 작년 10월에 퇴사하고, 지금이 11월이니 퇴사한 지 딱 1년이 되었다. 그동안 직장인 시절 하던 N잡과 새로운 일들을 하며 아직은 굶어 죽지 않았고, 작업실 월세도 잘 내고 있다. 심지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욕망하는 물건을 소유하고 경험을 누리며 꽤 풍족하게 살고 있다.
그럼에도 1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고정적인 소득은 매우 작은 반면, 돈 쓸 시간은 많아짐에 따라 거의 늘어나지 않는 통장 잔고. ㅋㅋ 그래도 아직 정신 못 차린 걸 보면, 10년 전 꿈 많은 대학생일 때와 똑같이'아직 돈보다 나의 젊음을 경험과 추억으로 채우는 게 더 소중하다!'라고 외치면서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인 거 같아 감사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프리랜서의 장점 3가지를 우선 꼽아보자면:
무조건 1번은 이거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짜릿하고 감사하다. 나는 돌아다니기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무실에 하루 종일 있으면 정말 답답해서 미쳐버릴 거 같다. 특히 지금처럼 해가 점점 짧아지는 시기에는, 퇴근하고 바깥이 컴컴하면 회사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보냈더라도, 괜스레 또 지나간 나의 하루가 아까워 억울한 기분까지 들곤 했다.
반면 지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집에서, 작업실에서, 카페에서, 심지어 여행지에서도,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또 요즘 서울엔 좋은 곳이 셀 수도 없이 많고 또 계속 생기고 있는데, 평일 낮에 사람 없을 때 예쁜 곳에 가서 일하면 얼마나 좋은지. 정말 인생이 행복해진다.
추가로 개인적으로 졸업 이후로 쭉 해외에 살던 대학교 베프가 올여름 한국에 들어온 것, 그리고 예쁜 가을 날씨도 나의 행복을 배로 증가시켜줬다. 재택근무해서 평일 낮이 자유로운 친구랑 요즘 맨날 인스타 보면서 서로 새로 찾아낸 핫플을 공유하고, 볕 좋은 날 아름다운 공간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것. 요즘 나의 가장 큰 행복이다.
직장인도 각자의 직무가 있지만, 상황에 따라 나와 타인 업무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다른 부서와 협업하는 과정에 새로운 일이 추가되기도 하고, 연봉이 업무 베이스가 아니라 포괄적으로 나온다는 이유로 각종 TFT, 교육, 발표, 행사 등의 이벤트가 생겨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시간을 고스란히 월급이라는 명목 하에 저당 잡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반면 프리랜서는 일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프로젝트 별로 일을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뜬금없는' 일에 동원될 가능성은 적다. 그리고 만약 당장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기에도 부담이 적으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내가 소모되기보다 실력이 쌓일만한 일만 골라서 할 수 있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작업실 월세를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공간 대여 이외에는 '콘텐츠 에디터'로 하는 일들에 집중하고 있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이 진심으로 재밌고 좋고, 하고 있으면 정말 뿌듯하고, 무엇보다 실력이 늘고 있는 게 느껴져 기쁘게 하고 있다.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투입되는 예산이 많기 때문에, 중간에 의사 결정권자도, 보고 체계도 비례해서 길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내 성격의 특징이자 단점이기도 한데, 시시콜콜한 보고와 컨펌을 정말 싫어한다. 내가 결과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소통과 공유를 해야 하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본능적으로 그 과정이 너무 비효율적인 거 같고 귀찮다.
반면 지금 일하는 시스템상 나는 나에게 맡겨진 부분의 일만 하면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내가 직접 알아서 하면 된다. 또 이건 근무 형태의 문제보다도 직무의 특징일 수도 있는데, 콘텐츠를 만드는 일 특성상 급박하거나, 많은 돈이 오고 가거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만한 상황은 거의 없다는 점도 지금 상대적으로 평온한 생활에 한몫을 한다.
또 회사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경영진, 타 부서 사람들, 경영지원부서, 협력업체 등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사람 만나는 일 자체에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이 사람들은 환경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람들이고,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 전 직장들에서도 돌이켜보면 나는 멍청한 사람이 정말 싫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배울 점이 있는 사람만 만나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운 좋게 그렇게 살고 있다. 프리랜서 만세!
장점이 이렇게나 많고 확실하니 앞으로 쭉 프리랜서로 살면 되겠지만, 인생이 또 그렇게 쉬울 리만은 없다. 최근 2번이나 직장인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뻔한 상황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안됐지만), '프리랜서 vs 직장인'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나는 다시 '직장'을 선택했었다.
이렇게 흔들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프리랜서가 좋고,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게 과연 내 진심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어서 프리랜서의 단점에 대해 또 생각해봤는데, 3가지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집중력 짧고 새로운 거 좋아하는 나에겐 다양한 일을 하는 게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엔 또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자꾸 이것저것 다 잘하는 제너럴리스트가 될 뿐, 특정 분야에서 뾰족한 성장을 못하고 있는 거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또 일과 일 사이 전환이 너무 많아 가끔은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
그래서 현재 메인으로 하는 콘텐츠 에디터 일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였던 꽃 수업을 지난달에 접었다. 수업 자체는 주 1회 3시간이었지만, 당일 새벽부터 차도 없이 힘들게 꽃시장에 갔다가 꽃을 옮기고 정리하고, 수업 준비에 수업까지 마치면 토요일 하루가 다 간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평일에도 모객 및 CS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너무 분산되는 거 같아 1달째 중단하고 있다.
고백컨데 나는 시간 관리,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계획은 못해서 싫어하는지 싫어해서 못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꽤 즉흥적인 편이며, 일을 할 때조차 감성이 이성이 압도하는 편이다. 이런 나에게 출근과 상사가 없으면 갑자기 펼쳐 든 소설에 하루가 다 가버리는 일이 생기고, 일할 기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상에 일보다 중요한 게 훨씬 많다는 핑곗거리를 방패 삼아 하루를 가볍게 날려버리는 일도 다반사다.
또 다른 측면으로 최근 한 디자이너님이 프리랜서의 삶은 '끄지 않고 잠자기 모드로 들어가는 컴퓨터'라고 비유하셨는데 무척이나 공감되었다. 노트북 뚜껑을 열면 바로 바탕화면이 뜨고, 언제라도 일을 할 수 있게 컴퓨터를 켜 두는 것과 꽤나 비슷하게,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퇴근의 개념도 없는 거다. 여행을 가도 일상을 벗어나 리프레시하는 느낌은 전혀 없고, 일을 완전히 놓을 수 없으니 여행지에서도 재택근무 중에 몰래 놀러 나온 원격근무자의 마음이 든다.
선택과 집중을 잘해서 분산되는 에너지야 어떻게든 모아볼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시간 관리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재정비한다면 못할 건 또 없을 거 같기도 한데, 3번 금전적인 아쉬움은 적어도 당장은 어떻게 해결해보기 어려울 거 같다.
꽃 수업을 쉬기 전에는 지금과는 또 달랐지만, 내가 하고 싶은 콘텐츠 에디터 일만 하고 있는 현재의 수입은 아쉬운 수준이다. 연봉이 꽤 괜찮았던 첫 직장에서는 저금을 하지 않고 마음껏 써도 통장 잔고가 자꾸만 쌓였는데(!), 지금은 '어? 웬일로 통장에 돈이 좀 있네?' 싶으면 어김없이 월세 내는 날이 며칠 안 남았다. 아직은 이렇게 조금 더 살아도 될 거 같지만,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결론은 없다.
우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일과 삶의 방식을 최대한으로 누리고 싶다.
요즘 부쩍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낀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맛있는 것도,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무엇보다 멋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다 탐구하려면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오늘도, 진지하게, 다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