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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타 보는 버스는 기름 냄새로 역겨웠다.
미영의 머리는 듣기 싫은 소리로 흔들렸지만, 멀미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느껴지는 소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미영은 정애 품에 기대어 흔들리는 머릿속과 멀미를 참으며 도착했고, 기진맥진 상태로 늘어져 정애 등에 업혀 내렸다.
정애는 버스터미널 근처 눈에 들어오는 다방에 들어가, 조용한 구석 자리에 미영을 내려 앉혔다. 그리고 뒤따라온 종업원이 테이블에 물컵을 내려 주자, 차가운 물수건을 부탁했다. 정애는 미영에게 물 몇 모금을 먹이고, 물수건으로 얼굴 식은땀을 닦아 주고, 미영을 품에 꼭 안았다. 겨우 기운을 차리는 미영을 잠시 소파에 기대어 두고, 정애는 계산대로 가서 시원한 꿀차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미리 계산하며 전화 한 통을 쓸 수 있겠냐 물었다. 하얀 분을 두껍게 덧칠하고 앞니에 묻은 새빨간 립스틱을 티슈로 닦아 내고 있던 다방 여자는, 넉넉한 지폐를 내밀고 거스름돈은 받지 않겠다는 비구니에게 전화통을 내주었다.
영재와 숙희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애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차를 몰아 다방으로 왔다. 정애는 생기를 찾은 미영의 테이블에 우유와 카스텔라 빵을 더 시켜주고, 다른 테이블에서 영재와 숙희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간에 있었던 덕재와의 만남과 덕재 아이 미영, 덕재 아내의 죽음과 덕재의 죽음, 어머니와의 만남과 지난밤의 일을 들려주었다. 여승이 되어 나타나 담담하게 지나온 박복한 삶을 내어놓는 정애를 대하며 숙희 두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국민학교 4학년 정애가 처음 약방 집 대문 턱을 넘어 들어섰을 때, 숙희는 정애를 보고 참으로 맑은 눈빛을 가진 아이라 생각했었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맑은 눈 속만큼이나 삶의 여정도 순탄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 정애가 자신은 죗값을 치르러 가야 한다며 미영을 데리고 와 부탁하고 있었다. 사실 부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태어났던, 미영은 영재 형, 덕재의 핏줄임은 분명했으므로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거두어야 할 아이였다. 미영은 영재와 숙희 손에 이끌려 자가용 뒷좌석에 올라탔고, 정애는 다시 역겨운 버스를 타기 위해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영재는 죽은 형, 덕재 처참한 죽음 현장에서 피가 질벅한 차 안에 굴러다니던 염주 알을 떠 올렸다. 부모님의 자랑이었던 장손 덕재는 재주꾼이었다. 열심히 노력해도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던 영재와는 달리, 덕재는 학업 성적, 음악, 미술, 운동까지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습득해 잘하는, 다섯 살 위 형은 영재의 우상이었다. 그런 형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었다. 부모님은 일본 여자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자의 직업이 딴따라 가수라 더욱더 탐탁지 않게 여겨 심하게 반대했었다. 두 사람은 음독자살을 시도했고, 덕재만 살아남았었다.
그렇게 홀로 남은 덕재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모님 뜻대로 집안 가업을 잇기 위해 한의사가 되었고, 정해주는 혼처 여자와 결혼했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죽은 여인 혼(魂)이라도 찾아 헤매듯, 걷잡을 수 없는 기이한 행태와 비행을 일삼았었다. 영재는 읍내에서 양약 약국 약사였지만, 미덥지 못한 덕재를 대신해 집안 가업을 이어 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당부로, 늦게 한의사 공무를 시작해 한의사가 되었다.
가을바람을 타고 범람하는 노란 곡식이 무르익은 들판은 금방 쪄낸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단호박 시루떡을 펼쳐 놓은 듯, 먹음직스럽게 탐스럽다. 연분홍, 흰색, 붉은색, 노랑 코스모스가 살랑살랑 한들산들 거리는 길을 따라, 차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푸짐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어디선가 풀 냄새도 꽃 냄새도 아닌, 어떤 향기가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 같더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풀들이 들판과 집집 지붕 위에 누워 볕 속으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영아, 이상한 냄새나지? 여기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약초 농사를 짓고 있거든. 앞으로 이런 냄새가 몸에도 배이고 할 텐데 익숙해져야 할 거야. 처음이라 약초 냄새가 좀 이상하지?”
숙희 말에 미영은 차창을 내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냄새를 먹고 맛을 느껴보았다.
달래와 냉이가 들어간 순득이 끓인 된장찌개에, 밥을 쓱싹 비벼 밥알은 얼마 보이지 않고, 달래와 냉이만 가득 떠 입안에 훅 넣어 주며, 꼭꼭 씹으면 맛나다던 순득의 말에, 미영이 풀냄새만 난다며 뱉어냈던 것을 순득이 손으로 받아 입으로 넣었던, 그때의 풀 냄새 맛 같기도 하고, 매주 매달 지푸라기에 물을 먹여 놓은 짚 냄새 같기도 했다. 미영은 순득의 생각으로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영재 차가 멈춘 집은 미영이 그림책에서 본 크고 웅장한 집이었다. 맹글맹글 크기가 다양한 동그스레한수십 개의 돌이 시멘트 흙과 어우러져 고르게 잘 다듬어진 담은, 공주님 드레스 레이스 기와 장으로 장식을 만들어 집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기와 장 레이스를 겹겹이 올려 지붕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있는 커다란 나무 대문은 소원 들어주는 알라딘의 램프처럼 반들 번들거렸다. 영재는 트렁크에서 미영의 짐가방을 꺼내 들고, 숙희는 허리를 굽혀 미영에게 말했다.
“미영아, 이제 이 집에서 살아야 해. 갑작스럽겠지만, 그래도….”
숙희는 어린 미영에게 어떤 말로 무슨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잊지 못하고 두 손으로 미영의 양 볼을 감싸며 일어나 미영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 집안은 정말 램프 속 요정이 만들어 낸 동화책에서 본 왕이 산다는 궁전 같았다.
마당 중앙에 미끈한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화단에는 잘 가꾸어진 이름 모를 사철나무와 꽃나무들이 어우러져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당 한쪽 커다란 감나무 아래 매끈 반들 한 크고 작은 장독대가 가을 햇살을 담느라 뚜껑을 열고 반짝이고. 멋스러운 지붕 아래 둥근 우물이 아닌, 네모난 나무집으로 단장한 우물은 우물 덮개가 열려, 두레박으로 물 긷는 여인과 우물 주변 수돗물을 콸콸 틀어 놓고 수다를 떨며 약초 씻는 여러 명의 아낙이 영재와 숙희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마당에는 크기가 똑같은 네모진 돌이 흙 마당 징검다리가 되어 영재와 숙희 터덕터덕 또각또각 발길을 받아 내고, 미영의 시선은 네모 속에 고정되어 숙희 손에 이끌려 종종걸음으로 딸려 갔다. 마당을 지나 작고 소소한 반짝임이 반복되는 하얀 돌 기단(基壇) 층계가 전통 한옥을 둘러 보호하고 있고, 기단 위 마루 아래 주춧돌 위에 코가 도도한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올려져 있다. 영재는 뒷마당을 관통하는 문이 열린 대청마루에 미영의 가방을 올려놓고, 미영을 번쩍 올려 안고 신을 벗겼다. 그리고 하얀 종이 위에 나무 격자무늬를 담고 있는 방문 앞에 서서 말했다.
“저희 들어갑니다.”
숙희와 함께 들어간 방에는 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쪽 머리를 한 할머니가 보던 책을 내려놓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영재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숙희는 미영의 얼굴만 보이고 미영을 데리고 나갔다.
“어머니,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여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이 엄마가 사정이 있어 키울 형편이 못 되어 데리고 왔어요. 저희 호적에 올려 제 자식으로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집 손이 확실하더냐?”
“예, 병원 확인 절차를 거쳐야겠지만, 형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내아이였으면 좋았을 것을….”
덕재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어머니 죽음 후 애정 없는 아버지와 다툼이 잦았고,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었다. 영재와 숙희 사이에는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지만, 몸이 약해 병원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아들 석진으로 인해 숙희 마음고생이 심한 터였다. 미영이 아들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숙희도 영재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영재는 미영을 자기 호적에 올려 자식으로 키우겠다는 말을 숙희와 의논하지 않았지만, 달리 다른 대안이 없었다.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아내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영재에게는 가장 만만한 해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