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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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이

미영이 우물 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물 속에서 순득이 슬그머니 기어 나와 미영을 확 끌어당겼다. 우물에 뛰어들려는 정애를 말리던 순득이 우물 속으로 쑥 하고 떨어지는 순간을 순득이 밖으로 나가며 열어 두었던 문 사이로 미영은 보았었다. 끔찍한 악몽이라 여기고 잠이 들었지만, 순득이 없는 아침을 맞이하고서야 꿈이 아닌, 진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정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순득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득이 우물 속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린아이 불안함은 어쩔 수 없었다.


“엄마, 엄마….”

넷째 희애와 다섯째 희선이 같이 사용하는 방에 미영을 재웠고, 미영이 악몽을 꾸고 오줌을 싸면서 희애가 소리 질러 엄마를 불러 댔다.

“엄마, 아 정말 미쳐 얘 몇 살인데 오줌을 싸고 난리야.”

“할머니 들으시겠다. 조용히 하렴.”

희애 목소리를 듣고 잠옷 차림 종종걸음으로 급하게 온 숙희는 유독 예민한 희애 방에 미영을 재운 것을 자책했다. 미영을 안고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을 때, 미영은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 울지는 않았다. 숙희는 미영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말 대신 품에 안아 주려고 미영을 끌어안았지만, 미영은 숙희 품에 안기기를 거부하고 마루에 나가 앉아 하늘만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첫째 희영은 어느 날 생겨버린 미영의 존재가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집안을 시끄럽게 했던 큰아버지 자식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떤 말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빠니 바라보는 미영의 눈빛은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외가 어른들 사랑을 유독받고 자란 희영은, 미영의 등장을 빌미 삼아 외삼촌이 사는 미국으로 유학 보내 달라 떼를 쓰고 있었다.

둘째 희옥은 미영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매일 밤 오줌을 싸고 악몽에 시달리는 미영을 안타까워하는 엄마가 못마땅했다. 그리고 몸이 약해 기가 허해져 그렇다며, 약방에서 손수 조제 해 온 보약을 들고 들어오는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모든 애정이 미영에게로 옮겨간 것 같아 괜스레 미영이 미웠다.

셋째 석진은 태어날 때부터 미숙아로 태어나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은 편이었다. 심약한 성격으로 미영에 대한 연민이 커 유일하게 미영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오빠였다.

넷째 희애는 몸이 약한 오빠 석진과 심장병이 있는 동생 희선으로 인해, 비교적 부모 애정을 덜 받은 탓으로,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자기 영역에 대한 어떤 침해도 용납하고 싶지 않아 했다.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동생 희선을 신경 쓰고 돌보는 것도 지긋지긋 한 터였기에, 돌봐야 할 동생이 또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미영의 존재에 대해 없다고 여기고 상대도 하지 않았다. 다섯째 희선은 태어날 때부터 심장 기형으로 수술을 받아 오랫동안 엄마 품에서 애정을 독차지했었다. 희선에게 미영의 존재는 갑작스레 등장한 경쟁자였다.


네 자매는 똘똘 뭉쳐 철저하게 미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영재와 숙희는 아이들 언행을 꾸짖고 야단쳤지만, 소용없었다. 훈육하면 할수록 아이들은 더 견고하게 뭉치고 지능적으로 미영을 외면했었다. 안타까웠지만, 아이들과 미영의 문제는 어른들 개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받아들이고, 미영이 잘 견뎌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숙희와 시어머니는 용하다는 무속인을 찾아가 독자 석진이 별 탈 없이 집안 가업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부적이라도 하나 받아 올 요량으로 찾아와 묻고 있었다. 사실 숙희는 영재가 어디서 건강한 아들이라도 하나 낳아 오길 바랄 만큼, 병약한 석진에게 심적 부담까지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 마음을 헤아려 주고 싶어 동행한 길이었다.

무속인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시어머니 기(氣)가 강해 큰아들 내외와 손자까지 잡아먹었다며, 시어머니가 내림굿을 받아야 집안의 불운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왕가 성씨를 가진 몰락한 양반집 규수였지만, 신학교를 다닌 지식 여성이었다. 약방을 하는 만석꾼 남편을 만나 남편에게조차도 양반 대접과 신여성으로 존중받으며, 평생 궁핍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사실 그녀는 시집오기 전 동네 굿판에서 굿판을 뛰어다니던 무당이 그녀에게 다가와 큰 신을 모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이유 없는 열병으로 앓아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용하다는 의원 집에서 열병을 다스렸고, 그 집 아들에게 시집가게 되었었다. 큰며느리의 변고를 겪기 전까지는 그런 무당말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 키워놓은 큰아들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 손주의 자살과 끔찍한 큰아들의 죽음까지, 멈출 줄 모르는 집안의 어두운 그늘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알려진 무속인을 찾았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 석진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고 영재마저 불운이 덮칠 수 있다는 불길한 예언에 그녀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불안과 공포로 급기야 앓아눕고 말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쓸데없는 곳에 다녀와서 연로한 어머니가 병까지 얻었다며 영재는 애꿎은 숙희를 나무랐다. 영재는 형 덕재가 죽은 겨울, 들어내고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가 가슴이 답답하다며 방에 불도 지피지 못하게 했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웠다. 시어머니의 절박한 마음을 무심히 넘길 수 없어 따라나섰던 곳에서 숙희 역시 좋은 이야기는 듣고 오지 못했다. 단명한다는 석진의 이야기와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불운이 피해 간다는 첫째 희영, 숙희 자신과 미영의 만남은 악연이라 누군가 하나 죽어야 끝이 난다고 했다. 숙희는 무속인의 말을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희영 아버지, 희영이 미국 동생네 보내는 게 어떨까요?”

희영은 어릴 때부터 방학 때 틈틈이 외삼촌을 따라 일본과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영재도 언젠가는 희영은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지 않을까, 염두(念頭)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어리다고 여겼다.

“고등학교나 졸업하고 보낼까 했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보내면 적응도 빠르고 학교도 일찍 시작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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