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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정지된 시간 같았다.
미영은 정지된 시간 속을 배회하듯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듣고 싶지 않은 소리로 흔들리는 머릿속과 순득의 마지막 모습을 대신할 수 있는 세상 영상을 찾아 저장하고 있었다.
누런 호박 시루떡이 펼쳐져 있던 들판은 어느새 하얀 백설기로 덮였고, 얼어버린 논두렁은 멈춘 시간 위를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내놓은 것 같았다. 그 길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구불구불 따라 도달한 곳에는 아껴놓은 시간이 고여 있는 것 같은, 꽁꽁 얼어붙은 마을 저수지가 나타났다. 저수지 앞에는 위험하다는 그림이 그려진 녹슨 철 간판이 보였지만, 동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수지를 침범하고 있었다. 무서운 기세로 거칠게 얼음지치기를 하고, 얼음을 부수고 깨며 겨울이 아니면 멈춘 저수지를 마음대로 짓밟을 수 없는 것처럼...
미영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잠시 상구를 떠 올리고 있었다.
동네에 나가 아이들 틈을 어슬렁거리고 있노라면, 또래 아이들은 미영에게 질문이 많았었다.
“너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던데, 진짜야?”
“귀신이 너 태어난 곳 알려 줬다던데, 너 귀신 봤어?”
“늙은 무당하고 중하고 너하고 귀신하고 다 같이 산다면서? 귀신도 밥 먹어?”
“귀신이 어떻게 밥을 먹냐? 귀신은 배고픈 것도 모를걸. 너 말 못 해?”
“미영이 말할 줄 알아, 내가 들었어.”
“상구 너는 얘 이름도 알아? 어떻게 아냐?”
“너희들 혹시 얼레리 꼴레리 했지?”
미영의 외출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동네 아이들에게 미영의 등장은 매일 똑같은 일상의 무료함을 깨뜨리기에 충분했었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미영을 따라오며 귀신이 붙은 아이라고 돌을 던지기도 했지만, 상구는 미영에게 날아드는 돌을 대신 맞아 주고 언제나 미영의 편이었다. 미영은 상구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가끔 동네 아이들 주변을 배회할 때면, 상구가 있는지를 먼저 살폈던 것도 사실이었다.
“너 약방 집 어르신 댁에 살지?”
멍하니 서 있던 미영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두 볼이 겨울 추위에 터서 볼그스레한 상희는 갓난쟁이 동생을 업고 얼음지치기에 정신없는 오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가 교대해 동생을 돌봐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다 지쳐, 골이 잔뜩 나 있는 터에 낯선 미영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 미영에게 말을 건넸다.
“내 이름은 이상희야. 네 이름은 뭐야.”
“......”
“나는 내년에 학교 입학해. 너는 몇 살이야?”
“......”
“너 말 못 해?”
“아니”
“어! 말하네.”
“미영이야.”
“무슨 미영? 성이 뭐야?”
“......”
미영은 순득에게 ‘미영’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리었을 뿐, 성씨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성! 몰라?”
상희 물음에 미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아 학교 들어가면 알게 돼? 학교에서는 뭐든 다 가르쳐 주거든.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알아. 너는 글자 못 쓰지?” 상희는 미영이 자기보다 두어 살 어린것 같아 막대기로 하얀 눈 위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적어 보여 주며 계속 말했다.
“우리 오빠가 학교 가면 글자를 배운다고 했는데, 그래도 친구들에게 쪽팔리지 않으려면 내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 줬어. 너도 집 언니들한테 가르쳐 달라고 해.”
미영은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동화책에서 보았던 그림과 글자를 그려 내려갔다.
“너 몇 살인데, 이런 글자를 다 알아?”
사실 미영은 글자를 익힌 것이 아니라, 동화책 페이지 장을 사진 찍듯 머릿속에 묘사해 담고 있었다. 글자를 쓰고는 있었지만, 읽지는 못하고 있었다.
“너 천재야?”
미영은 상희 물음에 ‘천재’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아무 말하지 않았다. 상희는 등에 업힌 동생의 칭얼거림이 계속되는 듯하더니, 동생이 똥을 많이 싸 옷에 묻은 것 같다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미영은 얼어붙은 논두렁을 다시 거슬러 집으로 돌아왔다.
담장 너머로 뻗은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어쩌다 남아 버린 몇 개의 붉은 홍시는 새 먹이가 되어 하나둘, 없어지고, 장독대와 우물 덮개도 잘 덥혀 찬 공기의 침범을 거부하고 있었다. 집집 지붕마다 널브러져 있던 약초는 집행량 채에 고스란히 쌓여, 작두 속으로 썰려 들어가고 있었다. 작두 속으로 한 움큼의 약초를 집어넣으며 모여 있는 동네 사람들은 미영을 보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작두의 위험성을 말해 주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언니들이 학교에 가고 넓은 집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미영에게 숙희는 책도 읽어 주고, 글씨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숙희가 유년 시절 살았던 세상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비행기 타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내렸는데, 깜짝 놀랐단다. 사람들 얼굴색이 각각이고, 거인국에 온 것처럼 사람들이 얼마나 큰지, 무서워서 그냥 울어버렸단다. 첫 느낌은 두려움이었는데, 살아 보니, 참 좋은 곳이었단다. 얼굴색이 다르고, 다른 언어를 쓰지만,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지. 얼굴이 검은 제니는 노래를 엄청나게 잘하는 친구였고, 파란 눈을 지닌 레이첼은 여자아이였는데, 야구를 정말 잘하는 아이였어, 나를 좋아했던 제이든은 젠틀한 아이였지…. 미국은 피부색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엄청 넓은 땅을 가진 아주 강한 나라란다. 미국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함을 국민의 권리로 인정했고, 누구나 부지런히 일하면 일한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란다. 미국에서는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던, 부모가 어떤 존재이든, 중요하지 않아. 오직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란다.”
숙희는 미영에게 넓은 세상을 말해 주며, 미영이 자라면서 자신의 출생으로 인한 상처가 덧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미영과 자신이 악연이 아닌, 선연(善緣)의 관계가 되길 바라며 진심으로 보살피고 싶어 했다.
미영은 희영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둘째 희옥과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고, 희옥은 희애처럼 예민하고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작은 라디오에 이어폰을 꽂고 혼잣말도 하고, 흥얼거리며, 미영 존재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미영이 악몽에 시달리는 날이면 깨워 물도 먹이고 식은땀을 닦아주었고 화장실에 데려다주는 수고를 불평 없이 해 주었었다.
미영은 다른 세상으로 공간 이동을 해 온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순득이 지켜주었던 안전함과는 다른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영재와 숙희를 보면서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알 것 같았고, 표정 없는 할머니에게서는 책을 좋아하는 미영에게 드러내지 않는 어떤 확신 같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몸이 약해 바깥 활동을 잘하지 않는 오빠 석진은 잔잔한 음성과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미영과 마주할 때마다, 미영을 안심시켜 주었다. 마음을 열지 않는 언니들이었지만, 미영은 언니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냥 무엇인가 많은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겨울 정체 되어 있는 시간처럼 미영은 이 집에서 이렇게 멈춰 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