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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아래 겨우내 가늘고 연약한 앙상한 가지들이 찬바람을 견뎌내더니, 어느새 담장을 얌전하게 타고 뻗어 새싹을 틔워내기 시작했다. 노란 개나리가 담장을 둘러 무성하게 넘쳐 피었고, 하얀 나비는 노란 세상에 물들어 안착하려는 간절함으로 이 가지 저 무리에 살그머니 내려앉아 개나리 세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넷째 희애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둘째 희옥과 같이 서울 외가댁으로 갔다. 몸이 약한 석진은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잦아졌고, 희선은 국민학교 5학년이 되었다. 미영은 병원 확인 절차를 거쳐 법원의 허락을 받아, 영재 호적에 올려져 영재 성씨를 얻어 조미영이 되었다. 그리고 또래보다 한해 일찍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아침마다 영재 출근길에 영재 자가용을 타고 희선과 미영은 학교에 같이 등교했지만, 희선은 학교에 도착해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미영을 투명인간 대하듯 했었다. 미영은 그래도 괜찮았다. 하얀 나비처럼 살그머니 내려앉아 조금씩 이 집에 물들어 안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희는 미영보다 한 학년 위였지만, 미영에게 숙제를 물어보거나 전과를 빌리기 위해 자주 찾아왔다. 늘 아장아장 걷는 동생을 데리고 오는 상희는 미영에게 숙제를 물어보는 것같이 하지만, 어느덧 미영이 상희 숙제를 대신에 해 주는 날이 많아졌고, 둘은 단짝 친구가 되었다.
“조미영, 너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면서 매일 반말이냐?”
“......”
“내가 너보다 공부 좀 못한다고 깔보는 거야? 내가 동생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 앞으로는 언니라고 불러 꼭”
“.....”
“왜 대답을 안 하냐?”
“나는 우리 언니들에게만 언니라고 할 거야.”
“야, 그런 게 어딘 냐? 나한테도 언니라고 해야지.”
“......”
“언니라고 안 하면, 나 너랑 안 놀 거야.”
미영은 친구가 없었다.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미영이 어쩌다 부잣집에 생겨버린 아이라는 사실이 시골 작은 학교에 이런저런 무성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미영의 존재가 보이면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모래성 집을 짓듯 만들어졌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영은 아이들의 그런 은근한 분위기를 개의치 않았고,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뭔가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즐거웠고,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머릿속을 흔들던 듣기 싫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순득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있었지만, 영재와 숙희의 의무적인 애정은 부족함이 없었다. ‘약방 집 어르신 댁 아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드러내 놓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떤 특권층 증표를 달고 있는 것 같았었다.
“그럼, 숙제 안 해줘도 되지?”
“야, 하던 숙제는 해 줘야지. 내일부터 친구 안 하겠다는 거야.”
“......”
“언니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어렵냐?”
“......”
“그래 알았어. 친구는 아니지만, 숙제는 계속해 줘.”
미영은 상희를 통해 학교에 어떤 소문이 떠도는지, 동네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공책 네모 칸 띄어쓰기하듯 토막토막 들을 수 있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둥, 어떤 선생님이 차별을 많이 한다는 둥, 누가 미영에 대해 어떤 소문을 퍼트렸다는 둥, 이웃집 언니가 윗동네 총각과 연애한다는 둥, 어느 집 아저씨가 읍내 다방 여자와 바람나서 마누라가 다방에 찾아가 여자들끼리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다는 둥, 아랫동네 아줌마가 아이를 낳다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둥, 읍내 대폿집 할머니 손녀가 고등학생 때 어디서 아이를 낳아 버렸는데, 그 일로 손녀가 학교 퇴학당하고, 객지에 나간 지 십여 년이 다 되어 가도록 연락할 길이 없어, 할머니가 오늘내일하면서도 명줄을 못 놓고 다 죽어 가는 몸으로 대폿집을 지키고 있다는 둥…….
상희 이야기는 모든 것이 두서없고 맥락 없이 뱉어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완전히 근거 없는 거짓말은 아녔다.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인기 많은 오빠 덕분에 고학년 언니들 무리에 잘 어울리는 편이었고 상희 부모는 읍내를 오가는 약초 도매상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와서, 밥상머리에서의 부부 수다는 고스란히 호기심 많은 상희 귀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대폿집 할머니는 왜 그런 손녀를 기다리는 거야?”
“조미영, 네가 궁금한 것도 있냐? 그 할머니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손녀를 낳고 죽었데. 그래서 손녀에게 엄마 잡아먹은 년이라고 그렇게 구박하며 키웠는데, 죽을 때가 되니 손녀에게 미안한가 보지. 그래서 사과하려고 기다리는 거 아닐까?”
미영은 왠지 모를 관심이 생겼다.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와의 만남은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정애가 순득에게 어머니라 불렀던 것이 생각났다. 정애가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날 밤의 불행한 일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